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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에게 길을 묻다 : <아노말리사>

무딘 일상과 날 선 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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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그 작가 때문에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찰리 카우프만은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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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거나, 그 작가 때문에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찰리 카우프만은 좀 다르다. 1999년 <존 말코비치되기>는 스파이크 존스 감독보다 찰리 카우프만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스파이크 존스와의 두 번째 작품 <어댑테이션>에서는 아예 본인이 영화 속 캐릭터가 되는 기행(?)을 선보인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부터 논픽션으로 봐야하는지 경계를 무너뜨리고,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과 현실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난장이 되고서야 마무리가 된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찰리 카우프만 역할로 등장해 관객들이 지금 보고 있는 시나리오 쓰기에 실패한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을 보여준다는 식이다. 관객들은 감독의 손에 의해 화면으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의 텍스트, 그리고 그 텍스트가 가진 무한의 상상력을 체험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대중적이진 않았다. 무의식과 삶의 권태, 무딘 일상과 날 선 권태에 동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를 조금 더 대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미셸 공드리와의 만남 덕분이다. 작가의 상상력을 동화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미셸 공드리의 연출력 때문에 찰리 카우프만이 지닌 본질적인 권태와 짜증, 그리고 삶에 대한 싫증은 다른 빛깔로 빛나게 된다. 2001년 <휴먼 네이쳐>는 스파이크 존스가 제작자로 나서고 미셸 공드리와의 멋진 앙상블이 시작된 작품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타잔>의 이야기를 비비 꼬며 문명과 야생의 만남 사이에서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은 그 기발한 상상력만큼이나 웃프다. 하지만 미셸 공드리의 표현은 과하고, 찰리 카우프만의 상상력도 거친 느낌이었다. 2005년 <이터널 선샤인>은 달랐다. 기억 소거라는 SF적 설정과 아름답기까지 한 영상 속에 로맨스와 삶, 그 자체의 의미를 되묻는다. 이제까지 이런 방법으로 사랑을 그려낸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복잡한 이야기에 앞서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그런 영화였다. 그리고 그 영화는 찰리 카우프만의 오늘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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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좀 더 욕심을 내 본다. 2007년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을 직접 연출했다. <시네도키, 뉴욕>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는 복잡한 그의 내면을 더욱 복잡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의 상상력을 구현해줄 연출의 도움 없이 스스로 만들어간 그의 내면은 거칠고 우울하고 지적이었지만 너무 철학적이고 신경쇠약 직전처럼 보였다. 긴 휴지기를 거쳐 2015년에 완성된 <아노말리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전작들에 비하면 무척 단순하다. 강연을 위해 영국에서 미국 신시내티로 향하는 마이클 스톤에게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소리’를 지닌 먼 타인일 뿐이다. 호텔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목소리를 지닌 여인 리사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순식간에 빠져들어 청혼에 이르지만, 과연 그 사랑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중년 남성의 황폐한 내면을 바라보는 그의 날 선 시선에는 여전히 삶에 대한 회의와 권태가 뚝뚝 묻어난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기법을 빌려왔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오히려 판타지는 줄고, 현실이라는 진창에 훨씬 더 깊이 발을 담갔다. 쉽게 동화되거나 동정을 가지게 되거나, 응원하고 싶어지지 않는 비호감의 중년 남성의 태도는 미화되지도, 변호할 만한 감정의 교류가 담기지 않는다. 그저 모두 함께 있어도 늘 고독하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미간을 찌푸려야 할 만큼 괴로운 남자의 심리는 정확하게 가시화되어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피부 톤과 늘어진 살까지 세밀하게 표현하고 이기적인 남성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리얼리티에 가깝지만, 충격실험용 인형 ‘더미’를 연상시키는 분절된 얼굴은 등장인물들이 ‘인형’이라는 사실을 자꾸자꾸 환기시켜 또 거리감을 둔다. <아노말리사>는 찰리 카우프만에게 <이터널 선샤인>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밋밋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반면 <이터널 선샤인>에 담겼던 삶의 불확실성과 사랑으로도 구원되지 못한 지독한 외로움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혹자에게는 출장 온 남자의 하룻밤 불륜으로 읽힐 수도 있고, 끝도 모른 권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남자의 심리를 쫓는 하룻밤의 판타지로 볼 수 있다. 사실 보편적 이야기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자에게 그 종이 한 장은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울 수 있다. 영화 속 마이클 스톤은 절대 고독에 갇혀 허우적거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기적인 투정 정도로 비칠 수도 있다. 실존의 묵직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공기처럼 가벼워 공허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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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을, 미셸 공드리의 <마이크롭 앤 가솔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찰리 카우프만과 함께 하지 않은 미셸 공드리의 <마이크롭 앤 가솔린>이 개봉했다. 더 공교롭게도 이 영화는 미셸 공드리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판타지가 사라진 가장 무난하고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상상력을 구현하는 화려한 영상 뒤에 가려진 밋밋하지만 진짜인 이야기를, 달라진 미셸 공드리의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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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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