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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보> 나를 지키며 산다는 것의 의미

그래도 당신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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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서 말을 위해 싸운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을 얘기하기 위해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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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Dear Mr. Trumbo,

 

당신을 그린 영화 <트럼보>를 보고 주인공인 당신에게 편지를 띄우고 싶어졌습니다. 혹시 이 편지가 당신의 영면을 방해하더라도 양해해주기를 바랍니다. 

 

달튼 트럼보(1905~1976). 당신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일이란 1947년 미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미국-소련의 해빙기에 공산당에 가입하고, 분배의 정의를 위해 노조 파업을 지지했던 전력이 ‘가장 몸값이 비싼 작가’의 발목을 잡은 것이지요.

 

그래도 당신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친구들을 배신하고 부유한 삶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매카시즘의 광풍에 맨몸으로 맞서느냐. 당신은 의회에 출석해 말합니다. “사상의 자유는 의회도 빼앗을 수 없다.”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나 노예일 뿐이다.” 증언을 거부한 당신은 의회모욕죄로 교도소에 가게 되지요. 교도관 앞에 알몸으로 서는 굴욕도 맛보게 됩니다. 

 

교도소 출소 후엔 동료들과 함께 블랙리스트에 오릅니다. 대형 영화제작사들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겁니다. 당신 앞에는 또 다시 두 갈래 길이 놓입니다. 하나는 변절. 영화계 대부(代父)들에게 전향서를 제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좌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가정이 부서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두 길을 한사코 거부합니다. 대신 제3의 길을 택합니다. 11개의 가명으로 시나리오 쓰기를 계속하는 것이지요. 전직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B급 영화 제작자를 찾아가 3일에 시나리오 하나씩, 무엇이든 쓰기로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이름을 빌리거나 가명으로 시나리오(<로마의 휴일>, <브레이브 원>)를 써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습니다.

 

두 차례의 각본상 수상. 세상은 흔히 당신을 ‘천재 작가’라고 말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당신은 재능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묻고자 합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정치권력, 자본권력에 무릎 꿇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작품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닌가요. 당신이 자신의 믿음과 다른 선택을 했다면 ‘쓰레기 속에서 진짜 좋은 스토리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요.

 

가령 당신이 매카시즘에 백기 들고 투항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잘 팔리는 시나리오를 쓸 수는 있었겠지만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작품들은 쓸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커크 더글러스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에서 동료 노예들은 “누가 그인지 알려주면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겠다”는 적(敵)의 요구에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라고 일어섭니다. 그런 장면은 자신과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결기의 경험 없이 나오기 힘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반전이 가능했던 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마음 속 작은 나사 하나만 틀어져도 망가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해도 스스로는 서서히 망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지요. 당신이 만든 당신의 상황이, 영화계 주류에 외면당하며 가명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트럼보라는 정신의 튜브에서 최대한의 것을 짜내도록 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나를 지키며 산다’는 건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절실한 일 아닐까요. 자존감(自尊感)은 때론 인간에게 모든 것이기도 하니까요. 

 

경의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건 당신의 천재성이 아니라 성실성입니다. 아니, 그 끝없는 성실성이 천재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아무나 당신처럼 밤낮없이 타자기를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할 수는 없을 테니. (오, 트럼보, 당신의 타자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당신의 성실성은 가족 생계에 대한 책임도, 작품에 대한 책임도, 자기 믿음에 대한 책임도 다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나아가, 견딘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링컨이 말했듯 “모든 사람을 잠시, 몇몇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어도 만인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잠시, 몇몇 사람을 영원히 공포로 지배할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공포로 지배할 순 없습니다. 블랙리스트의 올가미가 풀린 데는 당신 노력도 컸지만, 그 10여년 시간을 거치며 대중이 매카시즘의 공포에서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삶으로 보여준 진짜 스토리는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도 결코 좌절해선 안 됨을 2016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트럼보.  

 

 

P.S 영화관을 나오는데 소설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당신이 통과해야 했던 매카시의 시대를 다룬 필립 로스의 소설이지요. 노동자 출신 공산주의자인 주인공은 속물 여배우였던 아내의 배신으로 파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소설엔 “생각을 해야지. 난 작가니까. 중요한 것들을 얘기하는 작가!”라고 말하는 당신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옵니다. 

 

“잃어버린 대의를 위해 싸우고 싶나? 그렇다면 말을 위해 싸워. 거창한 말이 아니라, 감격적인 말이 아니라, 이걸 찬성하고 저걸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형벌처럼 미국에서 살아가는 교양 있는 소수에게 네가 말의 편이라는 걸 알리는 말을 위해 싸우라고!”

 

트럼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한국 땅에서 말을 위해 싸운다는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을 얘기하기 위해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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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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