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 허스트베트는 전방위 인문학자이자 비평가 겸 소설가이다. 시 낭송회에서 작가 폴 오스터와 만나 이듬해 결혼해 뉴욕에서 살고 있다.
국내에서는 폴 오스터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1983년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 17개국 언어로 번역 출판된 첫 소설 『눈가리개』부터 시작해 『어느 미국인의 슬픔』, 『내가 사랑했던 것』, 해박한 미술사 지식과 통찰력을 집약한 독창적인 미술 에세이 『사각형의 신비』를 출간하는 등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이번 『불타는 세계』 한국판 발간과 함께 책에 실린 번역가의 해설을 특별 기고한다.
참으로 운이 좋아 시리 허스트베트의 소설을 번역하게 되면, 그때마다 능력의 한계치에 부딪히다 급기야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책이 아직도 읽히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걸까? 그 용기와 뚝심에 찬탄하고 경탄한다. 우리 시대의 소설이 지성을 홀대하다 못해 적대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적지 않다.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쉽사리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 아니면 독자를 찾기가 힘겹다.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는 흔히 ‘머리를 식히는’ 여가활동과 동일시된다. 소설을 집어들 때면, 특히나 소위 ‘고전’이 아닌 현대소설을 집어들 때면 대다수 독자들은 논문과 서류와 전공서적에 지친 지성에 ‘휴식’을 주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지적인 사유와 성찰이 감수성과 이항대립을 이루는 구도가 알게 모르게 소설이라는 장르에 배어들어 굳어진 건 언제부터일까. 우리는 수많은 소설을 만나지만,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즉자적인 쾌감에 만족하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며칠 동안 즐거웠어.’라고 인사한 후 미련 없이 잊어버린다. 헌신도 통찰도 여운도 기대하지 않고서.
하지만 번역을 하다보면 아주 가끔은, 허스트베트의 전작 『내가 사랑했던 것』과 이번에 출간되는 『불타는 세계』처럼, 독자들의 지성과 독서 행위에 대한 헌신을 철저히 믿고 지적으로 훈련된 독자들이 투입하는 노력에 감동적으로 보답하는 책들을 만날 때가 있다. 지성이 휴식을 취하기는커녕 과부하가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연루되지 않을 길도 없다. 뇌와 심장이 함께 해결해야만 풀리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단한 해석의 노력은 텍스트에 대한 헌신으로, 나아가 독자와 텍스트의 진짜배기 관계로,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잊을 수 없는, 삶을 바꾸고 의미를 주는 애증의 연애로 이어지고 발전한다.
어쩌면 허스트베트가 써내는 일련의 소설들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가 품고 있는 거대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야심에 찬 프로젝트인지도 모른다. 사유와 감성의 이항대립을 보기 좋게 박살내고, 오로지 치열한 사유와 서사적 감수성의 공조를 통해서만 제대로 도달할 수 있는 아득한 통찰의 깊이를 목표로 삼아 시대의 피상성에 도전하는 돈키호테적 프로젝트 말이다. 허스트베트의 프로젝트가 가로지르는 건 사유와 감수성의 벽에 그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 통념과 예술, 정체성과 기억, 전통과 혁신, 자아와 타자, 이성과 미신, 비평과 창작, 재현과 본질을 모조리 가로지르는 유동성, 세상의 모든 간극을 가로지르는 부정형성, 이를 통해 소설은 허스트베트가 매혹된 또 하나의 예술 장르, 미술과 만난다.
이제까지 소설의 전통이 쏟아낸 그 어떤 전형에도 귀속되지 않는 해리/해리엇은 허스트베트의 가로지르기 작업을 대변하는 완벽한 마우스피스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다른 인물들이 중첩되며 얽히는 관계성을 중시했던 『내가 사랑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불타는 세계』는 해리/해리엇이라는 인물, 그녀의 의식과 본질적 정체성에 대한 탐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이 인물의 다면성과 복합성, 그리하여 아이러니컬하게도 ‘궁극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본질이 이 소설의 중추를 차지한다. 해리라고 불리고 싶어하는 해리엇은 이제까지 그 어떤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틈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상에 가난한 천재를 다룬 소설은 많지만, 해리/해리엇은 유대계 교수의 집안에서 태어나 뉴욕 최고의 미술상과 결혼했고 엄청난 유산으로 젊은 뜨내기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특권층 중년 부인이다. 수많은 소설에서 그려졌던 전형적인 여성성을 지닌 여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 들어 많이 보게 되는 남성적/중성적 매력으로 무장하고 동성애적 감수성에 어필하는 인물도 아니다. 거인처럼 크고 우아하지 못한 소년 같은 몸매를 지녔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치명적으로 이성에게 어필하는 섹슈얼한 매력을 품고 있다. 그렇다고 전통적 가족 관계에 반기를 드는 페미니즘의 투사도 아니다. 공격적인 페미니즘 성향을 품고 있으면서도 전통적 가족 관계와 그에 수반되는 전통적 성역할의 의무에 철저히 순응하는 측면도 있으며, 이런 점에서 테리 캐슬 같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예컨대, 해리/해리엇은 엄청난 지성과 천재적인 미적 감각을 겸비한 예술가이면서도 뉴욕의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부 미술상 남편과 사랑에 빠진 뒤로는 재능과 욕망을 철저히 억누르고 미술계 인사들의 파티를 주최하는 안주인 노릇만 하면서 남매의 완벽한 어머니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댈러웨이 부인처럼 삶의 무의미함과 권태에 지친, 그러나 완벽하게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년 부인의 전형에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해리/해리엇은 그간의 어떤 소설에서도 포착하거나 재현하지 않은 틈새의 존재, 틈새의 욕망, 그것도 온 세계를 활활 불타오르게 만들 정도로 파괴적인 자기 재현의 욕망을 구현한다.
무엇보다 여성의 지성에 대한 가혹하다싶은 적개심이 해리/해리엇과 ‘세상’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낸다. (이 구도는 소설에서의 지성에 대한 세상의 적개심을 투영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미술계의 거물들은 해리/해리엇이 안방마님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그것은 바로 치열한 지성과 공격적인 자기주장의 성향이다. ‘갈등’을 지독하게 혐오하는 남편 때문에 늘 진압당하는 그녀의 지성과 자기주장은 중간적이거나 타협적이거나 우회적인 표현의 방식을 모조리 차단당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주제인 미술에 대해 끝도 없이 떠들어대는 (그녀가 주관하는) 파티에서 그녀의 생각과 그녀의 마음, 그녀의 주장은 결연하게 침묵하거나, 아니면 가끔씩 자제심의 균열을 통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거나 하는 양 극단으로 드러날 뿐이다. 따라서 평생 동안 가차 없이 진압당해 침묵을 강요당한 해리/해리엇의 지성과 예술적 재능은, 남편의 죽음 이후로 그녀의 자기 재현을 철저하게 진압해온 세계에 대한 쿠데타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불가능했던 가장 우회적이고 상징적인, 따라서 예술적인 방식으로.
말 그대로 실제 살아 있는 인간을 허구적 페르소나로 내세우는 해리/해리엇의 시도와 그 시도가 일으킨 의도했던 대로의, 혹은 의도 밖의 충격과 나비효과 들이 이 소설의 서사적 뼈대를 구성하므로 이 글에서 자세하게 서술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해리/해리엇이 자신의 페르소나로 내세운 세 남자와의 관계와, 그 관계가 잉태하는 예술작품들의 효과는 여러 모로 생각해볼 거리를 남긴다. 해리/해리엇의 첫 번째 가면이었던 앤턴 티시는 예술가로서의 자아가 부재하는 텅 빈 그릇이었기에 어찌 보면 세 작품들 중에서 가장 해리답다고 할 수 있는 <서양 미술의 역사>를 남기게 되는데, ‘금발 머리의 청년 천재’에 굶주려 있는 미국 미술계가 예술가와 작품의 명백한 괴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반응하는 양식, 그 명성에 중독되어 앤턴 티시에게 스스로는 결코 충족할 수 없는 예술가로서의 욕망이 자라나는 과정, 그 속에서 사라져가는 앤턴 티시의 젊은 자아는 해리/해리엇의 반란/프로젝트가 원하는 결과를 가장 순수하게 성취한 성공사례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반면 어느 정도 예술적 자아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고 있는 피니어스와 룬은 해리/해리엇과의 협업에 명백한 목표의식을 갖고 뛰어들며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퍼포먼스 예술가인 피니어스와 존재 자체가 가면인 룬은 둘 다 예술에서 ‘가면’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들이다. 젠더와 인종을 가로지르는 흑인 동성애자 피니어스는 해리/해리엇의 ‘가면’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가장 훌륭한 협조자 역할을 해주었으며 해리/해리엇의 역할을 유일하게 공공연히 인정하는 인물이었지만, 그 예술적 협업의 결과가 대중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가장 적은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이 내게는 허스트베트의 의중을 읽게 해주는 대단히 흥미로운 디테일로 보였다. 거대 미술상인 해리의 남편이 그토록 싫어하던 ‘갈등’은 타인의 자아/정체성마저 자신의 것으로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블랙홀 같은 룬과 해리/해리엇의 협업/전쟁을 통해 극대화되어 재현되는데, 그 예술적 결과가 가장 흥미진진한 서사적ㆍ예술적 재현을 구현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룬의 최후가 지독한 죽음에의 의지를 구현한다고 볼 때, 암과 지독할 정도로 투쟁하는 해리엇의 최후는 끝까지 매달리는 삶의 의지를 구현하기에 두 사람의 ‘협업/전쟁’은 이 소설에서, 아니 예술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가장 본질적으로 예술적 창조의 원점을 보여주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의가 없이 표류하는 무상의 기표라는 점에서 룬은 전작인 『내가 사랑했던 것』에 나오는 마크와 많이 닮았고, 그 파괴성에서도 마크에 못지않아서 허스트베트가 현대미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좀 더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런 점에서, 허스트베트의 작품 세계에서는 성실한 해석자가 결국은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춘다는 점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해리/해리엇의 자기 재현은 예술작품뿐 아니라 투서와 일기, 어찌 보면 궁극적인 인간의 자기 재현인 자식들을 총동원해 그녀의 존재를 제 몸에 각인하기를 거부하는 세계에 흔적을 남기는 작업으로 진행되는데, 흥미로운 건 이것이 해리/해리엇의 시점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해리/해리엇의 이런 노력이 궁극적으로 결실을 맺고 의미를 새기게 되는 것은, 그녀가 남긴 재현의 단서들을 따라 추리에 가까운 해석의 노력을 하는 이 소설의 화자이자 이 책의 편집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화가인 빌 웩슬러의 삶과 작품이 결국은 비평가인 레오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리/해리엇의 삶과 작품은 그녀가 남긴 흔적들의 점을 연결해 맥락 속에 집어넣는 편집자의 노고를 통해 의미를 갖게 되고, 최종적으로는 그 편집의 결과물인 이 소설을 읽는 우리들, 독자들의 해석을 통해 완성된다. 허스트베트의 『불타는 세계』에서는 전작들에 비해 여백과 단절, 파편과 분절이 훨씬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건 그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비틀거리면서도 열심히 따라오고 있는 우리 독자들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웠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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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세계시리 허스트베트 저/김선형 역 | 뮤진트리
‘소설’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제까지 소설의 전통이 쏟아낸 그 어떤 전형에도 귀속되지 않는, 문학?인문?예술?신경정신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시리 허스트베트만의 지적인 사유와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저자는 주인공 해리엇과 소통했던 18명의 화자를 내세워 해리엇의 내면, 그녀의 의식과 본질적 정체성을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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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형(번역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내가 사랑했던것』, 『어바웃 어 보이』,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재즈』, 『파라다이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등이 있다. 2010년 유영번역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