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의 한 장면. 필자가 이렇게까지 늙지는 않았다.
박범신의 소설 『은교』에서 예순 아홉의 이적요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이를 영화로 만든 정지우 감독은 배우 박해일의 입을 통해 이렇게 압축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에 의해 얻어진 상(賞)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얻은 벌(罰)이 아니다.”
이적요 시인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지만, 중년이 되면서 가끔 억울할 때가 있다. 내가 뭘 잘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아저씨라는 이유로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도매 급으로 받을 때이다.
원투쓰리로 예를 든다면,
원,
나는 80년대에 선거권이 생긴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위해 구호를 외쳤고 이후 (번번이 패배의 소주를 더 많이 마셨음에도) 모든 선거에는 다 내 투표권을 행사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나, 가끔 취한 옆자리 젊은이들의 이런 푸념을 들을 때이다. “ 이 나라는 오십 넘으면 다 죽어야 해. 그래야 뭐가 돼도 돼.” 그들 말대로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콕하고 죽어야 한다.
투,
회사에서 여직원과 웬만하면 농담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재밌다고 한 농담이 상대에게는 썰렁함이거나 때로 성희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회식 자리에서도 1차까지만 하고 빠져주려고 한다. 그런데도 가끔 신문이나 잡지는 이런 타이틀을 뽑아낸다. “ 눈치도 없고 주책도 없고 대책도 없는 대한민국 아저씨들.” 도대체 내 노력은 무엇인가?
쓰리,
밤길을 걷다 만난 아가씨의 화들짝 놀라는 움츠림이거나 전철의 옆자리 처자가 우연한 나의 팔 스침에 소름 돋는 듯 한 액션을 보여주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여자가 보이는 경계감은, 오죽 세상이 흉흉하면 저럴까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개저씨” 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아아, 개저씨라니. 그저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보니 중년이 됐고, 중년이 되고 나서는 더 눈치를 보며 살고 있는데, 개저씨라니.
하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리 없고, 님을 보지 않았는데 애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리니, 불가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의 법칙은 사회현상에서도 예외일 리 없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영감’ 하고 부르니 ‘왜 불러’가 나오는 것이다. 회사에서 부하 직원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도,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반말을 하는 것도, 전철 안에서 자리 양보 안 한다고 고함과 욕설을 지르는 것도, 가스통을 들고 민주적인 시위 현장에 나타나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지역감정이라는 역사적 폐해를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이념과 철학 없는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경제적 기득권은 양 손에 꼭 움켜쥔 채 젊은이들에게 열정이라는 영혼 없는 설교를 하는 것도 모두 조선시대도 아닌 이 시대의, 딴 나라도 아닌 한국 아저씨들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아하게’ 나이 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본 칼럼의 열쇠말도 ‘우아함’이다. 그렇다면 ‘우아함’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그 모호한 관념어를 서재의 책 속 문장에서 꺼내와 구체화하는 것이 본 칼럼의 목표가 될 것이다. 도대체 우아한 늙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개저씨’말고 ‘꽃저씨’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책 속 문장의 도움으로 세부적인 실천의 매뉴얼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그렇다고 꽃중년 행동 교본집으로만 본 칼럼을 의도하지는 않을 것을 것이다.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이라는 칼럼 제목에 주목한다면 남,녀,노,소,게이,레즈비언,유,불,선,이슬람교 등의 개인적 좌표와 상관없이 삶의 지혜와 성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같은 문장을 보더라도 그것을 스무 살에 봤을 때와 쉰 살에 봤을 때가 완전히 다르더라. 젊어서는 밑줄 친 것이 나이 들어 보니 전혀 감흥이 없기도 하고, 어떤 것은 반대로 젊어서 지나친 것에 밑줄을 긋고 있더라. 노안의 시기에 그은 밑줄은 이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깊고 짙고 진하다. 삶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연륜의 나이테가 문장들과 제대로 교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야말로 나이가 (속된 말로 짠밥이) 만들어 내는 훈장이자 성취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은 이미 노안이거나 언젠가 노안이 될 모든 이에게 위로와 희망이 될 것이다. 늙음을 과오나 벌이라고 생각해봐야, 결국 유한한 인간들 모두가 제 얼굴에 침 뱉기 하는 것 외에 무슨 득이 있을 텐가.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의 서재. 필자의 서재가 이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이 칼럼을 통해 나는 책의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은 없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의 독자가 온전히 만나는 것이어야지, 요약 정리 혹은 부분적 인용은 재미도 없고 유익함도 없다. 그저 나는 내 삶 속에서의 나의 에피소드, 특히 아저씨의 경험을 이야기 할 것이고 그 에피소드에 선정된 책과 문장은 중년의 우아함을 구체화 하는 도구로만 작용할 것이다. 때때로 책을 요약하더라도 내 방식대로 주인공의 이름을 지을 것이고, 내 방식대로 압축할 것이다. ‘스테판 아르카지치 오블론스키’는 갑돌이가 되고 ‘다리야 알렉산드리로브나’는 갑순이로 만들 것이다. 나처럼 나이든 사람은 사람 이름 읽다가 헷갈려서 책장을 덮을 것이 뻔하므로, 차라리 갑돌이와 갑순이로 불러주는 것이 오히려 책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요령이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안다.
시작의 글은 여기까지다. 이제 여정은 시작되었다.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줄여서 ‘노비문장’과 함께 중년의 독서, 그리고 우아한 중년의 여행을 함께 해보자.
* <윤용인의 노비 문장>은 격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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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a50044
2016.04.28
rosemaryd
2016.03.03
ldj1999
2016.03.03
아주 읽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졀로 고개가 끄덕이도록
공감이 가는 문체입니다.
기대가 많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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