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남도 바닷마을 어딘가. 소라 무침과 찹쌀막걸리
제주도 해녀셨던 시할머니는 우리가 내려갈 때마다 동네 바닷가에서 구입하신 보말, 소라 등을 사서 주신다. “이거 맛 좋아. 꼭 챙겨 먹어라 잉” 한번 먹을 양만큼 쪼개놓고 캐리어에 고이 담아놓는다. 올라오자마자 가장 먼저 챙겨서 저장해둔다. 냉동실의 보물, 긴박할 때 요긴하게 꺼내 먹는다. 어느 금요일, ‘오늘 저녁은 소라 초무침을 먹어야지’라는 다짐이 이유 없이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그렇다면 거기에 알맞은 술을 찾아야 한다. 국내산 찹쌀막걸리가 눈에 보인다. 4천 원대. 일반 막걸리가 1천 원대 초반인 것에 비하면 비싸다. 하지만 이정도야 아깝지 않다. 와인은 한 병에 1만 원이면 싸다고 느끼는 것을.
무침에 넣을 아삭한 야채들을 골라본다. 싸고 양 많고 맛있는 세발나물 발견! 집으로 으쌍으쌍 한 걸음에 걸어간다. 세발나물과 양파, 당근을 다듬고 고추장, 식초, 설탕, 다진 마늘로 만든 양념장을 준비한다. “띵동” 남편이 돌아왔다. 준비한 재료를 버무려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고 바로 앉아서 시작하는 주안상. 찹쌀막걸리는 달지 않고 순하다. 소라초무침을 씹으면서 봉지에 적힌 세발나물에 대해 읽어본다. 갯벌 근처에서 난다고 한다. 바다 향이 가득한 저녁이다.
소라 초무침과 찹쌀막걸리. 소면은 옵션.
좋은 무의 소중함. 어묵무국, 계란부침 그리고 맥주
벌써 3주째다. 냉장고 가장 밑바닥을 점령하고 있는 것. 아빠 텃밭 표 ‘무’다. 농구공만 한 크기로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도 무가 좋은 건 오래 보관할 수 있어서다. 겨울철 가장 만만한 야채. 그래 오늘은 어묵무국을 끓여보자. 퇴근길 남편에게 어묵을 부탁한다. 그가 오기 전 난 육수를 준비한다. 잘게 자른 다시마, 멸치를 넣고 끓인다. 그 사이 어묵과 함께 남편이 돌아왔다. 패스받은 어묵과 무를 넣는다. 국간장으로 간 맞추면 끝. 심심하니까 전에 남은 세발나물을 넣어 계란 부침을 부쳐본다. 식탁에 앉으니 남편이 와인을 제안했다. “아니야. 난 이건 맥주인 거 같아” 냉장고에서 출격을 준비 중이던 4개에 9800원 하는 마트 할인 수입맥주를 꺼낸다. 500ml를 둘이 나눠 따른다. 어묵 한 조각, 맥주 한 모금, 부침 한 조각, 맥주 한 모금. 그러다 말캉말캉 익은 무 한 조각을 입에 넣어본다. 역시 이 어묵탕이 맛있는 건 무가 맛있어서라는 확신이 드는 맛이다. 그동안 치워버리고 싶던 무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흔하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럴때 진가를 드러내는 무가 왠지 멋있어 보인다. 그리고 맥주 한 캔을 더 땄다.
맥주를 부르는 어묵무국과 계란부침. 이번에도 소라 성게젓은 옵션
트립 투 이탈리아. 토마토 야채 스튜 파스타와 치즈 그리고 와인
토요일 저녁. 남편은 연말 모임이 있다고 했다. 이것저것 깨작대다 뭐라도 볼까 (TV가 없는 관계로) 외장하드를 뒤적인다. 그러다 발견한 『트립 투 이탈리아』 영국인 두 남자의 이탈리아 맛기행인데 첫 장면을 보는 순간 ‘아 이걸 괜히 봤구나’ 싶다. 피에몬테 지역을 여행 중인 그들은 토마토 파스타와 그 지역에서 나는 치즈와 와인을 즐기고 있다. 마음이 요동친다. 마트 와인 할인행사에서 한 병밖에 사 오지 않은 어제의 내가 원망스럽다. 물론 그 한 병은 어제 다 마셨다. 괜찮은 와인을 사려면 어차피 가야 할 길. 잠시 망설이던 차에 오전에 읽었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 생각난다. 부인이 암에 걸린 남편의 와인창고를 조카에게 보여주면서 “인생이 이렇게 짧다. 한 사람이 태어나 이 정도 와인을 다 못 마시고 죽는다”라며 탄식하는 부분이다. ‘오늘 마실 와인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를 되뇌며 백팩을 메고 원정대 마냥 길을 나선다. 그리고 고른 5병을 어깨에 가득 메고 돌아왔다. 내일 또 후회하긴 싫으니까.
함께 사온 방울토마토와 샐러리, 집에 있던 감자, 양파, 마늘, 당근, 호박 남은 것들을 모조리 잘게 썰어 펜네와 같이 냄비에 넣는다. 토마토 페이스트를 조금 넣고 물을 자작하게 붓고 올리브유를 뿌리고 소금을 넣고 끓인다. 익는 사이 이태리 와인을 한 병 따 놓고 상차림을 한다. 다 익으면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 마음대로 떼어 넣는다. 자 준비 완료. 보다 만 트립 투 이탈리아를 다시 돌린다. 이제 부럽지 않다. 그렇게 밤 11시. 남편이 돌아와 한껏 커진 눈으로 비워진 와인 반 병과 나를 번갈아 본다.
홀로 이태리의 밤
연말, 술상을 마주하고 모인 모두에게 즐거움과 행복함만이 가득하길. 모두들 즐거운 성탄과 새해 맞이 하시길. 빌어본다.
(부록) 남편의 상 : 닭의 비상
안녕하세요. 어느덧 우리 부부의 신혼 생활도 반 년이 지났답니다. 그 시점에 발견한 놀라운 사실! 저희는 그 6개월 동안 집에서 배달 음식을 한 번도 시켜 먹지 않았다는 것이죠. 새삼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자 배달의 욕구가 마구마구 샘솟았습니다. 여편님도 추운 겨울에 손 얼어가며 밥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 하시고 하니, 풍부한 배달 경험을 지닌 동생의 추천을 받은 노란색 피자집에 주문을 걸었습니다. 영화 『카모메 식당』 을 안주삼아 맥주를 콜라삼아 피자 한 판을 해치웠습니다.
피자와 총각무김치
그리고 다음 주, 위대한 발자국을 내딛고 나니 배달의 꽃 치킨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배달은 아니었습니다. 동네에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내에 가성비 최고의 좋은 치킨집이 테이크 아웃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언덕길을 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을 집으로 배달했습니다
샐러드는 따로 여편님께 주문했습니다.
10년 전 기숙사 방에 둘러앉아 대학교 동기들과 기름 묻은 천 원짜리를 모아가며 마시던 때부터 치킨과 맥주는 늘 우리 곁에 있었습니다. 월드컵 예선 탈락을 닭들이 가장 기뻐하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 배달은 진화를 거듭해서 모바일 앱 하나로 각종 업체를 비교 분석해서 골라 먹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퇴근길 클릭 한 번으로 회 한 접시를 집에서 만날 날이 곧 다가올 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또 편년체식 서술이 나오고 말았네요. 아마 오늘부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팟캐스트를 개시해서 그런가 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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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저 | 문학동네
우리는 서로를, 타인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고 함께 걸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기대는 일이다. 그래야 기대는 쪽도 의지가 되는 쪽도 불편하지 않다. 이제, 그의 커다란 귀를 열어둔 소설에 마음을 기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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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곱
무리하지 않습니다.
감귤
2015.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