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국내 초연될 뮤지컬 <오케피>를 비롯해 연극 <너와 함께라면>,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 등을 언급하면 대학로에 자주 드나드는 관객들에게는 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있을 겁니다. 바로 기발한 웃음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극작가 미타니 코키인데요. 국내에서는 지난 2008년 초연된 연극 <웃음의 대학>을 통해 그 이름을 확실히 알렸죠.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모두가 웃음을 잃어버린 비극의 시대에 극단 ‘웃음의 대학’ 전속 작가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엄격한 검열관은 이런 시대에 희극 따위는 필요 없다며 무리한 수정과 삭제를 강요하는데요. 하지만 검열관의 지시에 따라 대본을 수정할 때마다 극은 오히려 재미를 더하고,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두 사람 역시 어느 지점에서 색다른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웃음의 대학>은 정교한 스토리 사이로 자연스럽게 새어 나오는 유머와 위트 덕분에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만큼 쟁쟁한 배우들이 참여해 왔는데요. 2년 만에 다시 공연되는 <웃음의 대학>에 유독 미타니 코키 작품과 인연이 깊은 배우 이시훈 씨가 열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그를 직접 만나봤습니다.
“이분 작품은 27살 때 <웃음의 대학>으로 처음 접했거든요. 보면서도 ‘어떻게 이런 대본을 쓰지? 언제쯤이면 나는 이런 작가의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그 ‘언제쯤’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2011년 <너와 함께라면>으로 미타니 코키 작품과 인연을 맺은 이시훈 씨는 올해 <술과 눈물과 지킬앤하이드>에 이어 5년 전 관객으로 접했던 <웃음의 대학>을 이번에는 배우로 만나고 있습니다.
“정의신 작가님 작품도 그렇고, 신기한 게 공연을 하다 보니까 일본 작품을 많이 했더라고요. 코미디의 경우 일본 작품은 대놓고 웃기기보다는 웃기는 걸 참게 만드는 대본이 많아요. 흔히 생각하는 일본 정서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가 표출하는 편이라면 일본 사람들은 누르고, 한 번은 가리고, 뒤에서 웃는 편인데, 그래서 대놓고 못 웃기고 소소하게 웃기는데, 웃기는데 참아야 하니까 더 웃기는 상황이 되는 것 같아요.”
이시훈. 이름만 들으면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배우 같지만, 연극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경숙이, 경숙아버지>, <월남스키부대>, <미스 프랑스>, <가을 반딧불이> 등 특색 있는 작품에서 꾸준히 만나왔던 배우입니다.
“최근에 개명했어요. 원래 이름이 몸에 안 좋다고 해서 부모님이 바꾸자고 하시더라고요.”
20대에는 전공도 바꿨던 그. 그러고 보니 제법 굵직한 변화들을 겪어왔군요.
“그런 편이죠. 원래 어렸을 때는 수영을 해서 선수 생활을 좀 했는데, 대학은 영문학과에 진학했고, 그러다 군대 다녀와서 연극영화과로 옮겼어요. 그때는 어려서 전후 사정 따지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던 것 같아요. 연영과 합격했을 때는 연예인 되는 줄 알았죠. 1년 정도 연기가 뭔지 이론을 배우고, 그 뒤에 데뷔해서 한 3년 후에는 TV에 나오지 않을까,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었죠(웃음).”
줄곧 인기 작품들에 참여했고, <웃음의 대학>을 통해 2인극까지 하게 됐으니 재능은 입증된 게 아닐까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얻어 걸렸다’고 하죠. 제작진들이 ‘누구로 하지?’ 고민하기보다는 ‘누굴 뽑기는 해야 하는데’ 하는 상황에서 지나가던 제가 걸린 것 같아요(웃음).”
2인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로서의 부담을 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닌가요(웃음)?
“부담은 많이 되죠. 한번 흐름이 땅으로 떨어지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 악몽 같은 상황이 되니까요.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대사를 씹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나 왜 이러지? 뇌가 안 돌아가나?’ 싶을 정도로 대사 실수를 하더라고요. 대사량이 많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는 것 같으면 말을 빨리 붙이기 시작하거든요. 그런 부담은 있어요.”
2인극은 상대와의 호흡에 따라 색깔이 무척 달라지는데, 검열관 역을 맡은 서현철, 남성진 씨는 많이 다른가요?
“확실히 달라요. 현철 선배님은 서글서글하고 둥근 인상이고, 성진 선배님은 날카로운 이미지잖아요. 그 외형만큼 현철 선배님은 융통성은 있지만 뱀처럼 구슬리는 편이고, 성진 선배님은 정말 무서운 FM 검열관 같아요. 주시는 호흡도 다르니까 어떤 분이랑 할 때는 템포를 더 빨리 붙여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인물 대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춰서, 갑을 관계에 더 집중해서 갈 수 있고요. 그리고 두 분 모두 아리송할 때가 있어요. 대사를 까먹은 건지 호흡을 늦추고 싶어서 대사를 늦게 치는 건지, 그 간극이 애매해요. ‘대사를 잊으셨구나!’ 싶어서 제가 대사를 하는데 선배님도 들어오면 대사가 겹쳐요. 그럼 마치 제가 실수한 것처럼 되거든요(웃음). 그런 것도 긴장이 되죠.”
그 상황을 상상만 해도 아찔하네요. 그래서 2인극이 어려운 거겠죠.
“욕심은 나요. 무대에 두 사람 밖에 없으니까 좀 다르게 해볼까 생각을 많은데, 가끔 무서운 관객들이 계세요. ‘이렇게 좋은 작품에 왜 자꾸 첨가물을 얹느냐? 굳이 웃기려고 안 해도 충분히 재밌으니까 그렇게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라는 피드백을 주시거든요. 사실 계산해서 대놓고 뭘 한 것도 아니고, 흐름상 즉흥적으로 살짝 틀었다 원래대로 갔는데도 그 순간을 아는 관객들이 계시더라고요. ‘조금이라도 안일한 생각으로 했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싶죠.”
작가 츠바키는 어떤 인물이고 이시훈 씨와는 얼마나 비슷한가요?
“유기견 보호소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법률상 안락사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개들을 지키려고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사람 같아요. 츠바키에게는 대본 자체가 작품이라기보다는 생명, 내 새끼 같은, 이걸 죽이느냐 살리느냐 고민하는 그런 느낌이 더 들더라고요. 저와는 사실 다른 부분이 많죠. 저는 검열관이 이렇게 나오면 받아버리는 스타일이에요. 다혈질이 아니라 신중한 편인데, 신중한 만큼 제가 감정을 드러냈을 때는 확실히 전달을 하는 편이에요.”
츠바키는 작가로서 나름의 사명감이 있는 건데, 배우로서 이시훈 씨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세요?
“예전에는 내 역할이 확실하고 자신감이 있으면 밀어붙였는데, 요새는 뭔가 하나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전에는 끝나고 나면 ‘오케이, 나 오늘 수고했다!’ 이랬는데, 이제는 ‘그동안 너무 쉽게 했구나...’ 생각이 들면서 연기하는 게 좀 두렵기도 하고 긴장도 더 하게 돼요. 긍정적으로 보면 한 단계 올라가는 시기인 것 같고, 나쁘게 보면 혼란스러운 시기죠. 선배들이 뭔가 포인트가 하나 더 필요할 때라고 하는데, 그 포인트가 뭐냐고요(웃음).”
뮤지컬이나 영화 등 연극무대에서 조금 더 확장된 연기에 대한 고민은 없나요? 특히 욕심나는 작품 있으면 밑줄 그어 드릴게요(웃음).
“그런 고민은 작년, 재작년에 많이 했는데, 작품을 하면서 ‘이제 뭔가 다른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자만했을 때인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처럼 공연하기 전에 생각하고, 공연 뒤에 또 생각하고 고민하면 다른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더라고요. 뮤지컬은 연극만 하다 보니까 아예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수현재씨어터에서 <경숙이, 경숙아버지> 공연하는데 지하 공연장에서 하던 뮤지컬과 끝나는 시간이 같았나 봐요. 뮤지컬 팬들이 길게 줄 서 있는데 선배님들이 ‘시훈이 너는 저렇게 줄 서서 기다리는 팬 없어?’ ‘죄송합니다. 뮤지컬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라며 그 줄을 비집고 나왔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언젠가 뮤지컬을 하게 된다면 특히 <라이온 킹>의 심바를 정말 해보고 싶어요!”
지금 생각이 많다고 하셨는데, 앞으로 배우로서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다른 배우들과 비교를 하게 돼요. 그걸 털어내려고 더 밝은 척 하게 되고, 매진하려고도 하고.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면서 ‘저 친구는 나보다 뭐가 낫고, 그러니까 어떻게 보완해야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런 생각 자체도 안 하고 싶어요. 그런 기준을 만드는 사람도 저이고, 소모적인 것 같거든요. 어디서든 그때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중요하겠죠. 스스로 불행하게 만들지 않아야 연기를 더 할 수 있을 테고요. 지금은 벗어날 수 없는 나이인 것 같은데, 이 시기가 지나면 좀 여유롭게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무대 위 다른 사람의 삶을 보며 나를 돌아보고, 공감을 통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얻곤 합니다. 인터뷰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요.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다 보면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비단 배우들뿐이겠습니까? 어떤 일에서든 이 시기를 겪어봤던 사람이라면 이시훈 씨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감할 수 있을 테죠. 극중 츠바키 역시 자신을 둘러싼 시대와 상황 속에서 숱한 고민 끝에 자신 만의 작가상과 글로써 세상을 만나는 방식을 정립해간 게 아닐까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듯하지만 검열관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요. 이렇게나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쓴 미타니 코키 씨도 아마 비슷한 과정을 겪어왔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모두의 고민이 어우러진 탄탄한 무대, 그 안에서 치열하게 서 있는 배우 이시훈 씨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대학로 예술마당 1관에서 공연되는 연극 <웃음의 대학>을 관람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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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