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의 첫 문장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글ㆍ사진 윤성근
201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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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은 좋았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조금은 고지식한 면이 있었던 내게 이 첫 문장은 너무나도 멋있게 들렸다. 그렇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좋은 사람이라고, 혹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 할 때가 있다. 그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 사람이 몇 번 좋은 일을 한 것을 봤거나 전해 들었을 때,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단지 몇 번 좋은 일을 했다고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혹은 나쁜 일 몇 번 했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장 지오노의 말 대로 그 사람을 최대한 오랫동안 관찰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말 그대로 그건 ‘행운’의 범주에 속한다.


특히, 나는 장 지오노가 ‘좋은 인격’ 혹은 ‘좋은 사람’이라고 쓰지 않고 보기 드문 인격이라고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든다. 정말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다면 이해한다. 그를 단지 ‘좋은 사람’이나 ‘착한 사람’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좋다-나쁘다’,‘착하다-밉다’ 따위는 지극히 주관적인,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처음부터 섣불리 무어라 단정 짓지 않고 ‘보기 드문 인격’이라고 쓴 것은 알맞은 첫 시작이다. 만약 ‘좋은 사람’처럼 단정적인 표현을 썼더라면 독자 입장에서는 들어가는 문 앞에서부터 이미 맥이 빠진다. 주인공임에 틀림이 없는 ‘나무를 심은 남자’가 ‘좋은 사람’이니까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읽어봐야 빤하다. ‘나무를심은 것 = 좋은 일’이라는 건 굳이 읽어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보기 드문 인격이라고 썼기 때문에 비로소 독자는 궁금증이 생긴다. 당연히 나무를 심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한데, 과연 어떤 인격이기에 보기 드문 인격이라고 하는 것일까?

 

작가는 뒤이어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한다. 그런 인격이란 우선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론 그가 가진 생각이 더 없이 고결해야 하는데, 이 문장은 내가 원서로 읽었을 때 처음으로 막힌 부분이다


시간이 한참 흘러, 우연한 기회에 장 지오노의 작품에 대한 한 평론 기사를 보고 나는 그 문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단어는 ‘고결함’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인 부피에의 성품을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로 본문에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품이 곧 고결한 인격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소설을 다시 읽으니 부피에 노인이 전에 알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처럼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에는 내가 미처 몰랐던 다른 면을 보게 됐다고 하는 게 옳다.


고결한 성품 뒤에 나오는 문장 역시 꽤나 현실적이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게 세 번째 조건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성품을 다 지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 지오노가 말하는 마지막 단서는 좀 더 단호하다. 오랫동안 실천한 이런 고결한 생각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이 남아야 한다. 아무것도 남겨놓은 것이 없는 인격은 그저 바람처럼 흩어져 사람들 사이에서 무용담 정도로 남을 뿐이다.


소설이 시작되면 먼저 ‘관찰자’인 ‘나’가 등장하고 ‘나’는 정확히 이 첫 문장에 기록한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냉정하고 차분한 감정으로 그 황폐한 마을의 첫인상을 말한다. 관찰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인 1913년에 처음으로 그 마을을 방문했고 거기서 운명처럼 ?그러나 첫 문장에 쓴 것을 생각해본다면 ‘행운’처럼 ‘나무를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났다. 그리고 부피에가 편안히 눈을 감은 1947년까지 30년 넘도록 때때로 마을에 다시 방문하여 그가 한 일, 그가 보여준 행동,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부피에가 세 가지 조건 즉, ‘이기심이 없고’, ‘자기가 한 행동으로 인한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을 확인했다. 이야기는 이처럼 짧고 간결하게 마무리된다.


소설을 다 읽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너무도 단순한 이야기라서 당시엔 그저 프랑스 어느 산골마을에서 있었던 한 편의 아름다운 일화라는 느낌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십수 년이 지나 다시 부피에를 만났을 때는 확실히 다른 것을 깨달았다. 왜 그때는 미처 그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이제 부피에는 단순히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처럼 고결한 인품을 가질 수 있었던 힘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 힘은 팔다리의 근육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배워 머릿속에 들은 지식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하며 얻은 철저한 고독이 그 중심에 있었다.


장 지오노는 “이런 뛰어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홀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일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48쪽)고 말한다. 부피에는 말년에 이르러서는 말하는 습관을 잊어버릴 정도로 고독한 생활을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반드시 옳은 것인가, 라는 궁금증이 생길만도 하다. 그래서 관찰자는 다시 말한다. 부피에는 외부적인 원인 때문에 고독해진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부피에는 당시에 이미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상태였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자연 속에서 살면서 나무와 이야기하고, 바람과 이야기하고,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밝아오는 아우로라의 여명과 대화하며 그 안에 조용히 숨어 있는 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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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근

서울 정릉. 작가 박경리가 살던 집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따라 강원도 태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다시 정릉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헌책방 주인이 되는 것을 꿈꿨지만 대학에선 컴퓨터를 전공했고 오랫동안 IT회사에서 일했다. 서른 즈음에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사와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다 2007년에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열어 지금까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활자중독이다 싶을 정도로 책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책 읽기 기준은 까다롭지 않아서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첫 문장과 깔끔한 마지막 문장을 발견하면 그것도 절반의 성공이라 믿는다. 헌책방 일을 하는 틈틈이 여러 곳에 글을 쓰고 강연도 다닌다. 지은 책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심야책방》,《침대 밑의 책》,《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책이 좀 많습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