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꽃보다 아름다워
1층에는 오래된 재봉틀이 쌓여 있었고 양복점과 직물 소매상, 오버로크 전문점이 차례로 이어져 있었다. 아직도 이런 예스러운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의아했고 이런 곳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향기를 좇아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놀랍게도 꽃시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글ㆍ사진 이희준
201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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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스토크Stoke, 비단향꽃무라고도 불린다.를 좋아하는 한 남자가 있다. 바로 나다. 오래된 상가 건물 1층에서 스토크 향기를 맡고 조금은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었다. 1층에는 오래된 재봉틀이 쌓여 있었고 양복점과 직물 소매상, 오버로크 전문점이 차례로 이어져 있었다. 아직도 이런 예스러운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의아했고 이런 곳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향기를 좇아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놀랍게도 꽃시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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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겉모습만 봐서는 영등포 전통시장에 꽃시장이 있다는 상상을 하기 힘들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내려 영등포시장 사거리까지 걸어가면 영등포 전통시장을 만나게 된다. 영등포 전통시장은 몇 개의 상가 건물이 포함된 대형 시장으로 백화점과 마트, 쇼핑몰이 영등포 지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전까지 해도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시장이었다. 지금도 의류와 그릇을 취급하는 동남상가와 문구와 장난감을 취급하는 남서울상가가 여전히 영등포 전통시장의 건재함을 알리고 있다. 꽃시장이 형성된 영등포 로타리 상가는 영등포 전통시장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시계가 1970년대 어디쯤에서 멈춘 듯한 모습인데 1층에는 양장점과 수선집, 재봉틀 수리점 몇 개가 영업 중이다. 1층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포기한다면 지하에 펼쳐진 꽃시장을 만날 수 없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면 유리문 너머로 꽃시장이 마치 비밀의 화원처럼 숨어 있다.

 

어렵사리 지하로 통하는 입구를 찾았지만 나는 또 한 번 난관에 봉착했다. 꽃상가에 발을 디디는 순간 모든 상인의 시선이 내게 집중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평일 낮에 홀로 꽃시장을 찾은 청년은 그리 흔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사장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경 왔어요? 들어와야 구경을 하지.”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얼떨결에 영등포 로타리 꽃상가라고 적힌 낡은 유리문을 힘껏 밀었다. 역시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자연스럽게 걸으려 했지만 자꾸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시장을 밥 먹듯이 다니고 있는데도 여전히 상인 분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때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인 보라색 스토크를 취급하는 화원을 발견했다. 용기를 내서 인사를 했다.

 

“스토크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장사한 이후 처음인 것 같아요. 스토크를 알아보는 남자는.”
“제가 꽃을 좋아해요.”
“사실 아까 입구에서부터 보고 있었어요. 젊은 분이 들어오는 것은 오랜만이라서 반가웠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꽃 한 다발을 사야겠다 싶었다. 사장님께서는 웃으시며 스토크에 다른 꽃도 좀 섞어서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다. 사장님이 꽃다발 만들기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나는 다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나의 당혹스러움을 눈치채셨는지 사장님은 꽃다발을 만들다 말고 간이 의자를 주셨다.

 

“잠깐이지만 앉아서 꽃 구경 좀 해요.”

 

자리가 편해서였을까? 나는 본격적으로 사장님께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꽃 가게를 시장 안에서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취업이 안 됐어요. 하하하. 그리고 가업을 이은 셈이죠. 어머니께서 꽃 도매를 하셨거든요. 조금씩 도와드리다가 이렇게 일이 되었네요. 저도 아직 젊으니까 요즘 말로 시장에서 창업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사장님은 30분이 넘도록 꽃다발에 정성을 쏟았다. 솜씨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만드는 중간중간 내게 좋아하는 색깔을 물어보고 꽃을 바꾸기도 하면서 몇 번이나 다시 만드셨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분홍 장미와 노란 프리지어, 보라색 스토크가 섞인 꽃다발을 손에 들게 되었다. 아마도 사장님은 나뿐 아니라 다른 손님들에게도 이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꽃다발을 만들어 주셨을 것이었다. 내가 앉아 있던 간이 의자에서 꽃다발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을 많은 사람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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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만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져봐야 한다. 이것은 내가 꽃시장에서 배운 교훈이다.

 

묵직한 꽃다발을 손에 들고 나는 이 기회에 꽃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 더 풀기로 마음먹었다.

 

“저, 그럼 궁금한 거 하나 더 여쭐게요. 꽃을 좋아하는데 꽃에 대해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야 많죠. 그런데 보는 것만으로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진짜 꽃을 좋아한다면 만져봐야 해요.”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 좋아한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내게 잔잔한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책에서 읽은 문장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들은 말이기에 더 울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지금껏 손에 든 꽃다발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묵직한 꽃다발을 손에 들고 무엇이든 좋아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직접 만져 보고 겪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까운 꽃시장을 찾아서 계절에 맞는 꽃은 무엇인지 수시로 묻고 만지고 있다. 라넌큘러스, 천일홍, 작약 등 이제는 제법 많은 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 곳곳에 숨겨져 있는 꽃시장도 많이 알게 되었다. 1960년대부터 문을 연 남대문 대도 꽃 도매상가와 1991년 6월, 국내 최대 꽃 도매시장으로 시작한 양재동 꽃시장은 물론 강남 고속터미널 꽃 도매상가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충무로역 8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진양 꽃상가도 한 달에 한 번은 방문하고 있다. 꽃을 보기 위해 지하철 몇 정거장만 움직이면 된다는 사실에 나는 꽃시장을 찾을 때마다 흥분하곤 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주는 꽃 한 다발을 사는 재미를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서울에 있는 꽃시장 정리]

 

1. 영등포 로타리 꽃상가


주소: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5가 20 로타리 꽃상가(지하 1층)
찾아가는 법: 서울 지하철 5호선 영등포시장역 3번 출구에서 영등포시장 사거리 방향으로 250m 직진, 영등포 로타리 상가 지하 1층

 

2. 남대문 대도 꽃 도매상가

 

주소: 서울 중구 남창동 33 대도 꽃 도매상가(지상 3층)
찾아가는 법: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 5번 출구에서 우측 남대문 시장 골목으로 150m 직진, 남대문 대도상가 E동 3층

 

3. 양재동 꽃시장

 

주소: 서울 서초구 양재동 232
찾아가는 법: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 4번 출구에서 50m 직진, aT센터 옆 화훼공판장

 

4. 고속터미널 꽃 도매상가


주소: 서울 서초구 반포동 19-4 서울고속터미널(지상 3층)
찾아가는 법: 서울 지하철 3, 7, 9호선 고속터미널역 8번 출구에서 150m 직진, 강남 꽃 도매상가 3층

 

5. 충무로 진양 꽃상가


주소: 서울 중구 충무로4가 진양프라자(지상 3층)
찾아가는 법: 서울 지하철 3, 4호선 충무로역 8번 출구에서 40m 직진, 진양프라자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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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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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루트

2015.06.10

남자가 어떻게 스토크를 알죠 ?!?!
멋있다.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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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준

『시장이 두근두근』의 작가. 전통시장 도슨트를 자처하며 2013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시장을 직접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