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한낮, 종로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저기, 혹시...?” 어쩌다 보니, 기획사 담당 직원 없이 대면한 상황. 그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노랗게 탈색한 머리카락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의 이 남자를 누가 파리넬리를 연기하고 있는 카운터테너 루이스 초이 씨로 생각하겠습니까? 18세기를 풍미했던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 그러니까 거세된 성악가입니다. 변성기 전 남성호르몬이 생성되는 고환을 없애면 어린아이의 맑은 음색과 음역대를 유지할 수 있는데요. 성당에서 남자만 노래할 수 있었던 중세 유럽에서는 꽤나 자행됐다고 합니다. 반면 변성기를 거친 평범한 남자가 성악적인 발성과 호흡을 통해 가성으로 여성의 음역대를 노래할 경우 카운터테너라고 하는데요. 루이스 초이 씨는 그 중에서도 높은 음역대를 소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파리넬리 역에 제격이죠. 그런데 요즘 그가 화제인 이유는 오페라가 아니라 뮤지컬 <파리넬리> 무대에 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오페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뮤지컬이더라고요. 음악만 봤을 때는 저와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감사히 참여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오페라와는 완전히 다른 무대예요. 거의 개인 레슨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웃음).”
객석에서 보기에 의상이며 신발, 머리 장식도 힘들어 보입니다(웃음).
“정말 힘들어요. 캐릭터에 맞는 의상 때문에 살을 빼야 했고, 그 의상의 실루엣을 살리기 위해 10센티미터 높이의 굽 있는 신발을 신어야 하거든요. 머리 장식도 무게가 엄청나요. 성악 하는 사람은 하악을 많이 쓰는데, 밴딩 처리가 돼 있으니까 불편하기도 하고요.”
함께 작업하는 배우들이나 제작진도 낯선 사람들이었을 텐데요.
“그렇죠. 정말 어색했고, 저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도 있었지만, 처음 뮤지컬에 발을 들여놓은 거라서 다 내려놓고 시작했어요. 90도 인사하고요(웃음). 오히려 전혀 모르니까 처음부터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편견이겠지만 성악가들은 왠지 근엄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으세요(웃음).
“제가 많이 변했어요(웃음). 연출님이나 배우 분들이 처음에는 근접할 수가 없었대요. ‘과연 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을까? 확실히 클래식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셨대요. 그런데 연습하면서 바뀌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성격이 좋아요, 말도 무척 많고요(웃음). 클래식은 아무래도 컨디션이나 발성을 생각하면서 자기 세계에 빠져있게 되는데, 뮤지컬은 함께 하는 작업이잖아요.”
지금은 뮤지컬 무대는 물론 작업 자체를 무척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맞아요(웃음). 함께 하고, 함께 즐기는 게 좋아요. 클래식은 본인의 컨디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안으로 쑥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뮤지컬은 개인도 중요하지만 배우들과의 하모니, 전체적인 연기의 컨디션이 중요하더라고요. 그래야 노래도 살아 숨 쉬게 되고요. 똑같은 ‘울게하소서’를 부르더라도 클래식 무대와 뮤지컬 무대는 완전히 달라요. 제가 쓰는 발성이나 감정도 다르고요. 음반을 듣는다면 클래식 쪽이 훨씬 정확한 발성에 정확한 피치, 실수 없는 양질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죠. 그런데 뮤지컬 무대에서 드라마와 함께 살아 있는 넘버는 배우와 관객 모두의 마음속으로 그냥 쑥 들어가는 것 같아요. 무대에서 앞쪽에 계신 관객들은 보이잖아요. 다들 우세요. 그걸 보면서, 또 제 뒤에서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중에 노래하니까 저도 소름이 돋는 거예요.”
파리넬리 역에 함께 캐스팅된 고유진 씨는 어떤가요? 고유진 씨도 성악을 전공하셨고, 가성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아무래도 카운터테너와 더블 캐스팅돼서 부담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저와 정말 친해요.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어요(웃음). 사실 ‘울게하소서’는 유진 형의 레퍼토리고 음반에도 수록된 곡이에요. 본인이 가성을 잘 내고, 뮤지컬 넘버들이 좋아서 작품에 참여하게 됐는데 카운터테너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해요. 처음 연습실에서 노래를 맞추고 있는 저를 보고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진성이 잘 안 돼서 형한테 배우고, 가성의 조금 어려운 부분은 서로 보완해서 풀어가고 있죠. 요즘은 제가 진성 욕심을 내고, 형은 가성 욕심을 내는 것 같아요(웃음).”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성악가는 진성, 가성 다 잘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웃음). 객석에서 볼 때도 진성 부분, 그리고 진성에서 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이 좀 불안해서 전체적으로 루이스 초이 씨 음역대에 맞춘 노래들이 따로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예리하시네요(웃음). 실제로도 유진 형과 저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해서 두 곡은 아예 따로 작곡됐어요. 그래서 등장할 때 노래와 1막 엔딩 곡은 서로 달라요. 음악 감독님이 무척 고생했죠. 곡을 수정하는 작업이 처음 만드는 것만큼이나 오래 걸렸거든요. 보통 뮤지컬은 작품에 맞게 작곡을 하고 배우들에게 주면되는데, 저와는 안 맞았던 거예요. 처음 노래를 봤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오페라를 하면서 진성을 써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은 연극적인 요소가 반이라서 대사처리도 음악으로 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진성이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진성, 진짜 많이 좋아진 거예요(웃음).”
초등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다 20대 후반 독일 유학길에 올라 뒤셀도르프 슈만국립음악대학에서 오페라와 최고연주자 과정으로 각각 석사와 박사를 마쳤는데요. 귀국해서는 다양한 무대에 서고 계세요. 클래식 쪽에서는 일탈을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잖아요.
“그런 건 한국 들어와서 1~2년 동안 다 겪었거든요(웃음). 카운터테너는 오페라, 중세, 교회음악을 주로 하게 되는데 저는 귀국할 때 마음을 열고 뭐든 시도하고 개척해 보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우려의 목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이번에 뮤지컬 한다니까 ‘그래, 물 만났구나!’ 하시더라고요(웃음).”
많이 시도했다고는 하지만 국내 클래식 레퍼토리는 한정적이라서, 대중들이 원하는 건 결국 ‘울게하소서’ 아닌가요? 루이스 초이 씨에게는 아무리 헨델이라도 지겹지 않을까 싶은데요.
“맞아요, 제가 얼마나 많이 불렀겠어요. 어느 인터뷰에서 ‘울게하소서’를 천 번 이상 불렀다고 했는데, 정말 많이 불렀어요. 독일에서 수백 곡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공부해왔는데, 한국에 오니까 부르는 노래는 두세 곡, 계속 그 노래만 부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게 이 노래들이 지루할 즈음에 뮤지컬 <파리넬리>를 만난 거죠. 같은 ‘울게하소서’를 클래식 무대에서 부르는 것과 드라마가 있는 뮤지컬 무대에서 부르는 건 완전히 다르거든요.”
성악을 전공하다 음악교사로 일했고, 다시 독일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해 뮤지컬 무대에 서고... 획을 크게 틀어 살아오셨고, 또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스스로는 그리고 있는 길이 있겠죠?
“네, 재밌게, 그리고 다양하게 그리고 싶어요. 성악을 전공했지만, 드라마나 영화, 광고 등에 제 목소리가 쑥쑥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음악만 전공했을 때는 거기까지였어요. 내 음악으로, 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파리넬리>를 통해서 배우고 도전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이 생겼죠. 오페라에서는 연기적인 부분이 음표 안에 들어가 있고, 그것만 잘하면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뮤지컬에서의 연기는 엄연히 다르더라고요. 파리넬리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고, 그래서 연기도 배우고 싶어요. <파리넬리>가 저한테는 아주 역사적이고 드라마틱한 작품인 것 같아요(웃음).
여느 성악도와 달리 목소리가 우렁차지도 않고, 연신 방긋방긋 웃고, 특히 말씀을 어찌나 재밌게 하는지 인터뷰가 한 시간을 훌쩍 넘겼네요. 저녁 공연을 위해 기자가 알아서 끝맺음을 했습니다. 햇볕 좋은 날은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때가 생각난다는데, 초등학교 선생님 시절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지죠? 하지만 무대 위 루이스 초이 씨의 모습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네요. 5월 10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직접 듣고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진성 부분이 아쉽고, 가성에서 가사 전달력이 떨어지지만, 그가 천 번도 넘게 불렀다는 ‘울게하소서’를 들으면 아쉬움을 넘어선 큰 감동이 몰려옵니다. 물론 그 아쉬움을 해결해야 성악도 출신 배우들이 이미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뮤지컬 무대에서 앞으로 루이스 초이 씨만의 캐릭터를 잡아갈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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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