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 가운데 사흘쯤 면바지에 부츠 차림으로 대도시를 떠돌며 일하는 시골 유목민 하나가 다음 날 일정을 챙기다 말고 깜짝 놀란다.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며 구두 일습을 챙겨 베르나 낙타에 실어뒀다고 생각했는데, 가방을 열어보니 신부에게 건넬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의 『신데렐라』 그림책뿐이다. 이 그림책은 예식장에서 주고받을 형편이 안 되면 조용히 되가져왔다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차 한잔 하며 건넬 신부 전용 결혼 축하 선물이다.
일과를 끝내고 보니 밤 열한 시, 취향도 체형도 비슷한 근거리 친구가 사정을 알고 집에 들르라고 당부했으니 지친 낙타를 몰고 달려간다. 마침 바깥 주인장이 출타중, 문간에서 쇼핑백만 주고받기로 했던 약속은 밀쳐두고 한밤중 ‘신데렐라 놀이’가 벌어진다. 옷장을 활짝 열어젖힌 채 이 옷 저 옷 꺼내어 전신거울 앞에 선 먼지투성이에게 입혀보고 입어보다가 문득 이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아하, 재투성이와 요정 대모!
다음날 아침, 외지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뜨거운 물 한 잔 마시며 『신데렐라』를 펼쳐본다. 어제 밤 일을 떠올리며 시간 맞춰 친구 옷을 차려입고 친구 구두를 신고 예식장으로 간다. 숱한 우연과 망설임 끝에 부부가 되기로 하는 결혼 서약식은 비장하다거나 엄숙하다기보다 오직 화려할 따름이다. 이 또한 신부에게 하얀 드레스를 입히고 즐기는 일종의 ‘신데렐라 놀이’일까. 과연 신부가 신데렐라처럼 아름답다.
세상에 신데렐라 그림책은 많고도 많다. 1697년 샤를 페로의 『옛이야기와 교훈』을 시작으로 ‘신데렐라’ ‘상드리옹(신데렐라의 프랑스어 표기)’ ‘재투성이 소녀’는 전 세계 각지에서 출간된 그림책으로만 백여 권도 넘는다. 샤를 페로의 재화본에 이탈리아 화가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이 그림책은 여러 면에서 최근 50년간에 출간된 ‘신데렐라’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판본으로 손꼽힌다.
이 이탈리아 작가는 샤를 페로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아르누보풍이 유행하던 192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펼쳐놓는다. 사치스럽고 허영심 많은 새엄마와 언니들을 통해서는 런던 패션을, 흑발의 신데렐라가 거처하고 일하는 초라한 다락방과 빨래터를 통해서는 당시의 건축물과 기물을 사진보다 더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집안일에 내몰린 신데렐라가 애써 빨아 넌 침대보를 당기고 휘젓는 언니들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잘 차려입은 새엄마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새엄마 곁에 술병이 놓여있는 것이며, 나중에 신데렐라에게 모든 것을 갖춰주는 대모의 존재도 놓치지 말자.
빨래를 망치는 언니들과 신데렐라
언니들이 왕궁 무도회에 초대받아 떠난 뒤 마침내 울음을 터트린 신데렐라 앞에 나타난 대모가 사실은 요정이었으며, 이 요정이 호박과 생쥐 여섯 마리와 시궁쥐에게 마법 지팡이를 휘둘러 훌륭한 마차며 마부며 시종을 만들어내는 장면에서도 인노첸티는 전체 줄거리에 어긋나지 않는 재미난 볼거리를 그려놓았다. 대모가 호박에 마법 지팡이를 대기 전에 어떤 모양의 황금마차를 만들 것인지 그려보며 디자인하는 모습, 이것은 숱한 신데렐라 이야기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황금마차 디자인하는 대모, 호박을 들고 오는 신데렐라
이제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목, ‘요정은 마법 지팡이로 신데렐라를 건드렸어요. 그 순간 신데렐라의 누더기는 온갖 보석 장식이 달리고 금실 은실로 짜연진 옷으로 바뀌었답니다. 그런 다음 요정은 신데렐라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리구두 한 켤레를 주었지요.’에 의해 신데렐라가 왕궁에 등장한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신데렐라와 환영하는 왕자
『위대한 개츠비』에서 피츠제럴드가 묘사한 데이지, 꼭 그렇게 사랑스러운 신데렐라에 모두들 넋이 나간 장면 또한 온갖 흥미 요소를 담고 있다. 샤를 페로가 ‘바이올린도 연주를 멈’춘다고 묘사한 신데렐라의 아름다움에 대구를 이루듯, 인노첸티는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이사벨라 여왕의 시선을 신데렐라에게 향하게 했다.
신데렐라 결혼식 장면
온 세상 축복 속에 결혼식을 치르고 난 마지막 장면을 인토첸티는 컬러를 배제한 갈색 모노톤으로 완성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오래 전에 있었던 옛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의 앨범에 간직되어 있다는 뜻일까. 어쨌든 이 장면의 행복은 샤를 페로가 보증한 바 누대에 걸쳐 계승되고 있으니, 그것이 내가 이 그림책을 신부에게 드리는 뜻이다. (인노첸티는 고약한 새엄마가 술병을 늘어놓고 담배 피우고 있는 장면 하나를 더해 ‘악’을 조롱하고 있다.)
*진취적인 신데렐라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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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룰라엘렌 잭슨 글/케빈 오말리 그림/이옥용 역 | 보물창고
『신데룰라』는 아이들에게 스스로 찾아내고 선택한 삶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제 명작동화 『신데렐라』대신, 어린 딸의 손에 『신데룰라』를 쥐어 줘 보자. 내 딸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좌절하거나 움츠러들지 않기를 바란다면, 멋진 남자와 결혼만 하면 평생 행복하게 살 거라는 환상을 가지게 하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세상 속에서 씩씩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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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시인ㆍ그림책 작가, 그림책 번역가로 그림책 전문 어린이 도서관 '패랭이꽃 그림책 버스'와 그림책작가 양성코스‘이상희의 그림책워크샵’을 운영하면서, 그림책 전문 도서관 건립과 그림책도시 건설을 꿈꾸고 있다. 『소 찾는 아이』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은혜 갚은 꿩이야기』『봄의 여신 수로부인』등에 글을 썼고, 『심프』『바구니 달』『작은 기차』『마법 침대』등을 번역했으며, 그림책 이론서 『그림책쓰기』,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공저)를 펴냈다.
청개구리
201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