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딛을 때마다 아픈 기억의 편린들이 길 위에 차곡차곡 쌓이고, 단편적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순간, 길은 마음의 지도가 된다. 압도적인 자연의 풍광과 그 아름다움을 기대한다면, 솔직히 실망할 수도 있다. 사실 거대한 자연의 풍광을 제대로 담아내기만 했다면, 관객들은 훨씬 더 쉽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와일드> 속 자연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렇게 무심한 자연의 표정은 한 여인의 고통스러운 내면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카메라가 향하는 시선은 물기 없이 갈라진 한 여인의 마음이다. 거친 자연은 그 동안 한 여인이 살아온 그 길 자체가 되어, 걸음걸음 마음을 따른다.
영화 <와일드>는 절망과 방탕 속에 내 인생의 길이 끝났다고 느끼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미국 서부 4,200km를 도보로 종단한다.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는 더 큰 배낭을 짊어지고, 남자들도 완주하기 어렵다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걷고 또 걷는다. PCT란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도보여행 코스이다. 거친 등산로와 눈 덮인 고산지대, 9개의 사막과 산맥, 평원과 화산지대까지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연 환경을 거쳐야 하기에 일명 ‘악마의 코스’로 불린다. 대체 왜 그녀는 수행과 같은 이 여정 속으로 자신을 투척한 것일까? 셰릴 스트레이드(리즈 위더스푼)는 가정 폭력으로 일그러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던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실감에 젖은 그녀는 섹스와 마약으로 스스로의 삶을 후벼 판다. 한없이 너그러운 남편이 옆에 있고 여전히 돌봐야 할 어린 동생도 있지만 한번 휘청대기 시작한 걸음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을 잊는다. 나락의 끝에 서서 문득 정신을 차린 셰릴은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극한의 도보여행인 PCT를 선택한다. 주술처럼 엄마가 이야기했던 ‘자랑스러운 딸’로 돌아가기 위해 연간 125명만이 평균 152일에 걸쳐서 완주에 성공한다는 그 코스를 그녀는 94일 만에 걸어낸다.
영화 <와일드>는 실제로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인이 PCT의 경험을 녹여 발간한 동명 자서전 『와일드』를 바탕으로 한다. 2012년 출간된 저서 『와일드』는 발간과 동시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원작에 크게 감동한 리즈 위더스푼은 자신이 직접 차린 영화제작사에서 제작하기 위해 셰릴 스트레이드로부터 직접 판권을 구매하였고, 자서전『와일드』에 감동한 『어바웃 어 보이』의 원작가 닉 혼비는 직접 각본을 쓰겠다고 연락했다. 여기에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연출을 맡으면서 영화 <와일드>는 날개를 달았다. 사실 극한의 자연환경 속 혼자 떠나는 트래킹 여행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영화가 과연 관객을 매혹시킬 수 있을지 우려했지만, 영화의 제작자이자 주인공인 리즈 위더스푼은 스스로를 영화에 던지면서 그 우려를 잠재웠다. 셰릴 스트레이드가 겪었을 여정을 가급적 그대로 겪고 재현하면서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될 정도의 투혼을 발휘한 리즈 위더스푼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그 동안 로맨틱 코미디에서 보여주었던 화사한 발랄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영화 속 셰릴 스트레이드는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격언을 방명록 위에,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에 새긴다. 신체적 고통을 훨씬 더 웃도는 마음의 소동을 겪으며 그녀는 앙상하게 남은 자신의 마음과 대화한다. 그리고 그 거친 길 위에서 발톱까지 빠지는 고통을 겪으며 체현하는 것은 슬픔을 초월하는 방법이 아니라, 고통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다.
어떤 시점에서 보자면, 엄마의 죽음이 자신의 삶을 방탕하게 내던질 만큼 대단한 걸까라는 의문은 생긴다. 하지만 <와일드>는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한 여인의 일탈과 슬픔의 무게 자체에 동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그녀의 삶 그 자체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객이라도, 영화 <와일드>가 주는 메시지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와일드>는 한 여인의 삶을 보여주고, 그녀를 응원하는 영화라기보다 묵직한 삶을 받아들여야 하는 여정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도움에 앞서 우리 두 발로 무거운 짐을 진 체 꿋꿋이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단단한 목소리로 주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여인은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지만, 여행이 끝난 후에 그녀가 발견한 것은 힘들더라도 내 두 발로 딛고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이다. 영화에는 줄곧 엄마 바비(로라 던)이 생전에 좋아했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가 흐르는데, 영화가 끝난 뒤엔 자연스럽게 그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그리고 마치 주술처럼 그 노래를 부르면 왠지 용감해질 것 같다.
[추천 기사]
- 나쁜 예술의 관능, <킬 유어 달링>
- <허삼관> 그렇게 아버지가 된 아버지의 어떤 것
- 그렇게 훌쩍 자란 시간의 선물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tongkyung
2015.01.30
rkem
2015.01.29
앙ㅋ
2015.01.29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