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없는 세대
어렸을 때 나에겐 사랑은 쉬웠고 이별이 어려웠다.
글ㆍ사진 김소연(시인)
201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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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월요일, 시인 김소연이 읽은 책 이야기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이 연재됩니다.

 

 

 

 

어렸을 때 나에겐 사랑은 쉬웠고 이별이 어려웠다. 사랑을 할 때엔 그저 내가 나에게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여러 헤아림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에 반해 이별을 할 때엔 내가 나에게 시키는 그 반대대로 하여야 했다. 내 자신의 명령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일은 아무리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앙다물어도 켤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더 어른이 되어선 사랑도 쉬웠고 이별도 쉬웠다. 널린 게 사랑 같았기에 사랑을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사랑이 소중하지 않으니 이별도 시시할 따름이었다. 그 누구도 심장 속에 각인되지 않았기에 사랑이나 이별은 오래된 습마만도 못한 것이었다. 그 시절에,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를 만났다. 누가 번역한, 어디서 출간된 단행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이 소설의 어떤 점을 그렇게나 좋아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과 좋아했다는 사실만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느낌으로 좋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좋아했다는 것은 기억이 생생하다는 점에서, 그 시절 나에게 찾아온 사랑들 - 이별들과 많이 닮았다.

 

우리는 서로 만남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깊이는 나락과도 같다. 우리는 행복도 모르고, 고향도 잃은, 이별마저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우리의 사랑은 비정하고, 우리의 청춘은 젊지 않다.
 

어쩌면 그 시절은 일찍이 노인이 되어버린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조로의 증상이 나뿐만 아니라 꽤 많은 이들에게 만연해 있었다. 노인처럼 세상을 다 산듯 살았으나 노쇠하지는 않아서, 몸과 마음을 아무데나 두는 것을 기꺼워 했다. 희망을 희구하지 않았고, 너절한 삶을 용서하지도 않은 채로, 환멸의 에너지로 숨을 쉬었던 것 같다. 그런 시절을 오래오래 천천히 천천히 통과한 후에, 원하지 않았지만 철도 조금 들게 되었을 때에는 사랑이 어려웠고 이별은 쉬웠다.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시키는 그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게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잡는 일은 그래서 병적인 상태에 돌입하는 일처럼 꺼려졌다. 그러니 이별 역시 쉬울 수밖에 없었다. 엉뚱한 자리에서 헤매다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 안락함이 곧 이별의 증상이었다. 그 시절엔 살려고 이별을 감행했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간신히 풀었을 때의 명쾌함, 죽어도 하기 싫은 대청소를 먼지 한 톨 없이 해냈을 때의 쾌적함, 켜켜이 쌓인 숙제를 하나하나 해치웠을 때의 홀가분함 같은 것이 이별의 자리에서 나를 반겼다. 경박에 가까울 만큼 경쾌해지는 이별의 자리가 오히려 사랑의 자리보다 안락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만나, 서로 함께 지낸 다음 --- 그러고 난 다음 각자 몸을 감춘다. 우리는 아무 만남도 없고, 오래 머물지도 않고, 이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별을 모르고, 제 가슴에서 나는 소리를 두려워하며, 도둑처럼 그 자리에서 몸을 숨기는 세대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향이라고 할 만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져줄 만한 사람이 우리에게는 없다. ---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가 되었고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부터는 사랑도 어렵고 이별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사랑의 치기어림과 이별의 비정함 모두를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세계는 사랑과 이별이 동시에 멸종된 세계 이후의 세계 같다. 사랑 없는 세대의 연애질과 이별 없는 세대의 엄살만이 횡행하는 세계 같다. 연애질과 엄살이 표상하는 청춘의 초상이 깊이는 잃었지만, 다른 면모에서의 삶의 방식을 정비하는 듯해 보인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이 커다래진 시대. 연민의 시혜도 자기자신에게 우선권을 주고, 물질적 정서적 풍요도 자기자신의 것을 가장 우위에 둔다. 배려도 스스로에게 하고, 돌봄과 아낌과 희생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다. 우리는 식당에서 물만 셀프로 따라먹는 게 아니라, 주유소에서 주유만 셀프로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인생에서 스스로에게 그렇게 한다. 사랑의 근처도 못가본 청춘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청춘으로 산다. 쉽게 변질되는 사랑과 쉽게 인성을 망가뜨리는 이별을 겪는 일을 굳이 하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뒷전이 되었다기보다는 자기자신만을 사랑하는 두 개체가 서로 연맹을 하듯 사랑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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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없는 세대 볼프강 보르헤르트 저/ 김주연 역 | 문학과지성사
이 책에 담겨있는 보르헤르트의 단편과 시편들은 그의 삶을 닮아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현실에 대한 냉소로 일관되어 있다. 도시라는 환경과 전쟁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짧은 생의 대부분을 소비해야 했던 보르헤르트는 예의 작품을 통해 그것들이 담고 있는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우연과 필연에 대해 묵시하는 자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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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이별 없는 세대
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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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em

2015.01.28

깊이도 없는 세대라는 것... 슬프지만 공감됩니다. 없어도 너무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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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5.01.27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가 되었고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것이다라는 문장속에 슬픈 울림이 있네요.
절망과 희망, 죽음과 삶, 우연과 필연에 대해 묵시하는 자의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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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시인)

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