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뇌 구조’ 만들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인터넷 밈으로, 특정 인물이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 머리 안에 중요도 순으로 다양한 크기의 말풍선을 그리고 글자를 적어 넣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무대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신인 아이돌이라면 퍼포먼스, 빌보드, 팬 같은 단어가 큰 비중을 차지할 테고, 밴드형 아이돌이라면 기타나 페스티벌이 쓰인 말풍선이 한가운데를 차지한 가운데 콩알만 한 크기로 ‘가죽 재킷에 대한 집착’ 같은 클리셰가 살짝 추가될 테다.
만약 그룹 세븐틴의 유닛 부석순의 뇌 구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힘, 기꺼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친구, ‘웃는 자가 일류’라는 신조. 여기에 허락된다면 ‘덤벼라, 세상아!’가 쓰인 작은 말풍선을 추가하고 싶다. 2018년 발표한 데뷔곡 ‘거침없이’부터 최근작 ‘청바지’까지, 부석순은 ‘어떻게 저렇게까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터질듯한 에너지로 충만한 노래와 무대를 선보였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치자면 등장할 때마다 요란하기 이를 데 없는, 하지만 그와 함께라면 무슨 사건이든 어느새 해결된 얼렁뚱땅 해결사 같은 역할이었다. 뭐든 조금씩 서툴지만 패기만큼은 타고난 에이스 말이다.
이 좀처럼 밉지 않은 면모는 어쩌면 부석순의 탄생부터 운명처럼 새겨진 이름표일지도 모른다. 그룹이나 노래 하나가 세상에 나오는데 A부터 Z까지 집약적으로 기획되기 마련인 케이팝 세상에서, 부석순은 드물게도 자생적으로 결성된 자연발생 유닛이다. 정식 데뷔 전 2년여 간 스트리밍으로 진행된 ‘세븐틴TV’는 소속사 플레디스 사옥의 지하 연습실에서 매일 펼쳐진 한 없이 날 것에 가까운 아이돌 연습생의 일상 그 자체였다. 부석순은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속속들이 중계된 레슨과 연습 및 각종 게임과 놀이가 난무하는 가운데 태어났다. 노상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틈만 나면 콩트에 돌입하던 도겸(이석민)과 호시(권순영)이 서로를 석순이라 부르는 사이를 매끄러운 진행 능력과 입담을 갖춘 승관(부승관)이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케이팝 최강 유닛 부석순은 그렇게 탄생했다. 뛰어난 예능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예능 유닛으로 자리 잡으려는 찰나, ‘거침없이’가 등장했다. 2018년 2월 팬 미팅을 통해 처음 공개된 노래는 한 달 뒤 정식 음원으로 발표되었다. 새로 데뷔하는 신인 아이돌을 콘셉트로 잡은 이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부석순!’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딱 떨어지는 멋들어진 스리피스 슈트를 챙겨 입어도 어딘가 사회 초년생 느낌이 빠지지 않는 이들의 무대는 ‘거침없이’의 노랫말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빡 세게’ 가는 ‘한다면 하는 놈’들 그 자체였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굳이 절도 있는 춤 선으로 풀고,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가창력으로 ‘후라이드 양념치킨 고민고민 하지 않지’를 굳이 굳이 뽑아냈다.
혈기 넘치는 신입이 한 바탕 휩쓸고 간 회식 2차 노래방이 남기고 간 여운이 겨우 가실 때쯤, 부석순은 ‘파이팅 해야지’로 다시 출발선에 섰다. ‘거침없이’ 이후 5년 만이었다. 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세븐틴의 위상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데뷔 9년 차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이들의 행보는 팬데믹 기간 가장 수혜를 받은 케이팝 그룹이라는 평가와 함께 앞으로도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기세로 겅중겅중 계속해 다음 단계를 밟아 가고 있었다.
사회의 때가 아직 덜 묻었던 열정 신입 부석순도 그에 맞게 변했다. 타이틀 곡 하나만 담았던 싱글은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아침, 낮, 밤을 그리는 세 곡으로 확대되었다. 젠지를 대표하는 래퍼 이영지와 팝 스타 페더 엘리아스(Peder Elias)도 국경을 넘어 힘을 보탰다. ‘거침없이 달려가겠다’는 뜨거운 초심은 그대로, 지금을 함께 힘차게 살자는 몸쪽 꽉 찬 권유가 더해졌다. 흔한 위로의 토닥임이 아닌 ‘가보자고!’하는 외침과 더불어 벼락처럼 등을 떠민 기세는 결국 ‘파이팅 해야지’를 한국의 지금을 대표하는 응원곡으로 자리까지 이끌었다. 더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이 파이브를 권하는 이들의 음악에 멱살 잡혀 올라온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동년배에서 지금의 한국으로 응원 대상의 폭을 넓힌 이들이 2025년 새롭게 겨냥한 건 바로 ‘세대’다. 세대 통합의 아이콘으로 청바지를 꺼내든 이들은 노래가 이어지는 3분여 내내 청바지를 입고 춤을 추고 급기야는 사람들에게 청바지를 냅다 던져버린다. 사실 청바지는 뮤직비디오에 줄곧 등장하는 의류이기도 하지만 ‘청춘은 바로 지금’이라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유행한 건배사기도 하다. ‘지화자(지금부터 화끈하게 놀자)’, 통통통(의사소통, 만사형통, 운수대통)’처럼 ‘엄마 아빠 단체 카톡’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을 법한 단어는 청춘을 두 가지 의미로 소화한다. 이들이 ‘바로 지금’ 통과하고 있는 청춘의 한 시절, 그리고 남녀노소 누구나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마법처럼 돌아갈 수 있는 나만의 청춘. 부석순의 청바지는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얼마든지 입어도 되는 흥을 바탕으로 한 범용 청바지다.
심지어 그 건강한 흥의 바늘이 최근 발표된 그 어떤 케이팝보다 정확히 ‘한국’을 가리키고 있다는 게 더없이 흥미롭다. 2020년대 이후 케이팝은 K, 즉 한국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운드도, 감성도, 가사도 세계 기준에 맞추는 게 당연했고, 그 기준은 언제나 미국 팝 시장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청바지를 입은 부석순이 한 손에 비읍으로 시작하는 자양강장제를 든 채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70년대에도 2020년대에도 청춘의 상징인 청바지를 맵시 있게 갖춰 입고 한국에서 제일 긴 역사를 가진 ‘전국 노래자랑’을 콘셉트로 ‘어머님~ 아버님~’을 천연덕스럽게 부르며 음악 방송을 녹화한다. 케이팝에서 오랜만에 맡아보는, 버리지 않고 애써 다시 쓰고 싶은 한국의 익숙한 향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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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