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노는 친구들 무리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되겠다고, 그러니까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봐야겠다는 절박함에서였다.
하지만 수업에 귀를 기울여봐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초등학교 때 그것도 잠깐을 빼고는 공부라는 것을 해본 기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초등학교 고학년과중학교 참고서를 구해서 보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차마 교실에서는 꺼낼 수가 없었다. 공부 좀 한다는 녀석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볼 것 같았다. 같이 놀던 친구들 역시 그에게 몰려와 시비를 걸어댈 게 뻔했다.
“공부하는 거야?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애쓴다?”
쉬는 시간마다 중학교 영어 단어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몇 개씩 외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실에서 단어장을 들춰보고 나오다가 생활지도부 선생님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그의 표정을 보고 선생님이 추궁했다.
“거기서 뭐했어? 너, 피웠지?”
그는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귀찮아서 포기해버렸다. 학교에서는 이제 그런 짓 안 한다고 얘기한들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자식, 어쩐지 그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여기서 이런 짓이나 하고…….”
선생님이 그의 바지 주머니를 뒤지려 했다. 그는 엉덩이 부분을 가리면서 몸을 뒤로 뺐다.
“너, 그거 이리 안 내놔?”
뒷주머니에 담배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의심을 받는 게 억울하고 서글펐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동안 저지른 잘못이 있는데다 빈 음악실에서 혼자 나왔으니 의심을 살 만도 했다.
결국 선생님은 그를 돌려세워 뒷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중학생 영어 필수 단어』를 꺼내고야 말았다. 단어장이 나오자 선생님도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너…… 이거…….”
선생님이 단어장을 돌려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뒷주머니에 꽂고는 웅얼거렸다.
“아이 씨, 쪽팔리게.”
그가 복도를 뛰어가는데 뒤에서 선생님이 큰소리로 외쳤다.
“공부하는 건 창피한 게 아니야. 자랑스러운 거야.”
그날 이후로는 어디서든 누가 뭐라든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약말 - 창피하다
실제와는 관계없이 남들이 나를 우습게 볼 거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한 발 물러나 돌이켜보면 다른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창피하다고 생각한 그 순간을 다른 이는 기억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딴생각에 빠진 채 관심 있는 듯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창피를 당해 누군가가 나를 우습게 보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창피한 생각이었다. 스스로를 위해 선택한 일이라면,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창피해할 이유가 없다.
* 이 글은 『오늘 나에게 약이 되는 말』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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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에게 약이 되는 말한설 저 | 위즈덤하우스
『오늘, 나에게 약이 되는 말』은 스테디셀러 『배려』의 저자 한설이 지칠 때마다 힘이 된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릴 때, 괜한 분노에 마음이 괴로울 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었듯, 이 책이 당신에게도 순한 처방전이 되기를 바라며 약이 되는 이야기와 낱말들을 엮어 담았다. 일상에 치여 중요한 것을 놓치는 현대인에게,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다시금 따뜻한 마음을 일깨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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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
우리 삶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은, 우리가 자주 쓰는 언어의 영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행동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니까. 신문기자를 하다가 전업작가로 돌아섰으며, 사람들이 스스로와 주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에 늘 관심을 기울인다. 『지금 외롭다면 잘되고 있는 것이다』 『배려』 『스물아홉, 늦었다고 하기엔 미안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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