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청춘 필독 작가
이쯤에서 생각해볼 것은 공부의 수레바퀴에 대해서 누구는 참고 견디라고 하고 누구는 그만두라고 합니다. 누가 참말이고 누가 거짓말인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자연 상태로 길들여진 학생들의 욕망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글ㆍ사진 임재청(서평가)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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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 근처에서 다시 새로운 싹이 움터 나온다. 이처럼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 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지만,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 지는 생명에 불과할 뿐, 결코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 헤르만 헤세,『수레바퀴 아래서』

 

 

자유롭고 거친 즐거움


베테랑 낚시꾼으로 불리는 폴 퀸네트는『인생의 어느 순간에 반드시 낚시를 할 때가 온다』에서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은 낚시를 즐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든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수레바퀴 아래서』에서 한스 기벤라트는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자유롭고 거친 즐거움이었던 낚시질에 빼앗겼습니다. 물 위에 어른거리는 불빛과 길게 늘어진 낚싯대의 잔잔한 흔들림, 미끼를 문 고기를 잡아당길 때의 흥분, 차갑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살이 오른 물고기를 손에 잡아들 때의 형용할 수 없는 기쁨!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런 기쁨을 알지 못했습니다. 속물근성인 아버지 입장에서는 공부해야 할 아들이 낚시를 한다는 것은 안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속물근성이 뭔가요? 상대적으로 돈과 물질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에 먼지가 켜켜이 쌓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아들을 저당 잡는 것입니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만큼 확실한 보증 수표는 없습니다. 다행히 아들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모범생이었으며 영리한 두뇌를 가진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특별한 존재에게 인생의 정답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면 인생의 어느 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낚시를 할 수 있다고 듣기 좋게 말합니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


정해진 운명에 따르면 좁은 문을 통과한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그가 일차적으로 주(州) 시험에 합격하여 신학교에 입학하는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신학교에서도 다른 학우들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인내심으로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빼놓으면 정작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자신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승리에 대한 조급함과 주위에서 기대하는 눈길에 자극받을수록 외로움이 소용돌이쳤습니다.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억제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그는 정체불명의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어땠나요? 내 인생이 아니듯 공부를 다독이면서 말합니다.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쯤에서 생각해볼 것은 공부의 수레바퀴에 대해서 누구는 참고 견디라고 하고 누구는 그만두라고 합니다. 누가 참말이고 누가 거짓말인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학교가 해야 할 일은 자연 상태로 길들여진 학생들의 욕망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자연이 만든 인간은 불투명하며 위험스러운 존재입니다. 작가 말대로 길도 없는 원시림입니다. 그래서 원시림의 나무를 베고 깨끗하게 치워야 합니다. 문제는 학생들을 정해진 원칙에 따라 줄기를 잘라낸 나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아무런 개성도 없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런 나무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분한 위선자

 

학교에서의 공부는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수학 문제를 잘 풀면 훌륭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학의 세계에서는 미로를 헤매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제 영역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서성거릴 가능성도 없습니다. 수학 문제를 잘 풀면 가고자 하는 곳에 남들보다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서 수학은 누구나 꼭 해야 합니다. 비록 얼마간의 고통이야 있겠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기만 하면 많은 학생들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공부에만 매달리는 따분한 위선자, 가엾은 존재이겠지요.


반면에 그와 같이 호머의 시를 좋아하는 학생에게 수학은 이해하기가 힘든 고통입니다. 딱딱한 수학의 법칙이나 공식을 외우기에는 그의 가슴은 허구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학교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뿐입니다. 물론 수학을 하는 사람도 호머의 시를 공부합니다. 하지만 호머의 시마저도 수학 문제를 다루듯 하다 보니 마치 요리책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호머의 시에 담긴 내용보다는 단어의 쓰임새에 대한 이런저런 궁리만을 생각합니다. 성적만을 최고로 하는 학교에서 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게 슬픈 현실입니다.

 

우아한 시(詩)

 

이런 고민은 역사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사실, 혹은 영웅의 이름만을 달달 외우는 암기식 공부로는 살아 있는 영웅을 눈앞에서 만날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클라인바움은『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학에는 우아함이 있다. 그 우아함이 바로 시적 요소다. 만약 모든 사람이 시만 쓰고 산다면 이 지구는 굶어 죽게 된다. 그렇지만 시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아주 단순하게 살면서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시를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수학 속에서도 우아한 시(詩)가 있다는 것은 허구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계산만 잘하면 되는데 굳이 딴생각을 해서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펙만 채우는 치명적인 공부를 하면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부라면 허구를 뒤집어 진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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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저/김이섭 역 | 민음사
헤르만 헤세가 세계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아를 발견하여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예술로 승화시킨 반면 한스는 엄격하고 딱딱한 집안 분위기, 그에 버금가는 학교 교육 및 사회의 전통과 권위에 눌려 파멸하고 만다는 점이다. 그랬을 때 "수레바퀴 아래서"란 비유적 표현에서 우리는 한 개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세계의 톱니에 짓눌린 여린 영혼을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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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4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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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5.01.13

왕성한 시기에 병들어 상처 입은 영혼 또한 꿈으로 가득 찬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마치 거기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어 끊어진 생명의 끈을 다시금 이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영원히 새겨두고 싶은 구절이네요.
삶의 교훈으로 가득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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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5.01.10

헤르만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예전에 읽었는데 내용이 가물가물하네요. 한번 더 읽어볼만한 책인것 같아요. 그 때 읽은 느낌과 지금에 와서 다시 느끼는 감정은 많이 다를듯 합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식들을 위해 공부를 강요한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 자신을 대신해 아이를 희생시키는것 같아요.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것이 진정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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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em

2015.01.08

제대로된 공부라... 어렵네요. 암기가 아닌 살아있는 영웅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데... 현실은 정말 어려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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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청(서평가)

책만 보는 바보. 그래서 내가 나의 벗이 되어 오우아(吾友我)을 마주하게 되지만 읽은 책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때만큼은 진짜 외롭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