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은 보즈 스캑스의
쇼펜하우어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인생이라는 섬에 유배를 온 존재’들이다. 인간은 군도(群島)와 같은 이 사회에서 하나의 섬으로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결말은 “모든 인간은 섬이지만, 그 섬과 섬은 보이지 않게 연결 돼 있다”고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어떤 이에겐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나 역시 작가라는 직업상 일을 하는 시간엔 철저히 혼자다. 내 생각의 우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불순물을 걸러낸 뒤 소재가 될 생각을 한 바가지 들어 올리는 시간은 온전히 내가 나 자신만을 대면하는 시간이다. 물리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시간 역시 혼자이어야 가능하고, 뇌와 감성을 운동시키는 시간 역시 혼자이어야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화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다. 당연히 글을 쓰는 시간 동안 그 역시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외로움이 더욱 깊은 건, 그가 타인을 위해 사랑과 행복의 속삭임을 가공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랑과 행복의 속삭임을 상상하며 그가 써낸 수많은 연서(戀書) 속에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담아낸 진짜 연서는 없을 것이다. 그가 보내야할 참된 연서의 대상은 아쉽게도 별거중인 아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연애의 감정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타인을 위해 사랑의 감정을 생산해낸다. 자본이라는 고단한 열매를 따기 위해, 그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타인의 기념일 축사와 눈물의 재회에 필요한 수사와 일생을 동거 동락한 아내에게 바치는 감정의 언어를 지어낸다.
영화
나 역시 글을 쓰다보면, 두서없이 떠오르는 온갖 언어들로 정신은 폭풍을 맞이하지만, 정작 외부로는 내부의 그 어떤 언어도 나오지 않는다. 들어줄 이가 없기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아무런 말도 않고 쓰는 게 싫어서인지, 손으로 쓰는 대신 편지 내용을 말로 하고 그걸 컴퓨터 OS가 받아 적도록 한다. 타인의 기쁨을 위해 대리 연서를 쓰는 동안, 즉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고독과 싸우는 동안, 그는 얼마나 아내에게 진실한 감정을 실은 진짜 연서를 쓰고 싶었을까. 그리고 그 감정의 언어를 자신의 입술을 직접 움직이며 말하고 싶었을까.
그렇기에 나는 다소 장황해보이지만, 다른 어떤 것 보다 이 대사가 슬프게 들렸다.
“우린 함께 성장했어. 그 사람 석사며 박사학위 따는 동안 쓴 글을 다 읽었고, 그 사람도 내 글을 다 읽었고. 서로 큰 영향을 줬지.”
누군가 쓴 글을 온전히 다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여러분 감사합니다). 나는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이는 때로 읽는 것을 수반하는 일이기에 그 노동 속에 담긴 감정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충분히 절감하고 있다. 흔하디흔한 대사로 둘 사이의 고유한 감정을 공산품처럼 취급하지 않으려는 인물의 애틋함이 내게 닿았다. 이 애련은 내게 몇 가지 질문을 이식했다. 과연 ‘다 읽었다는 그 글들’ 속에 테오도르가 헤어진 아내에게 썼던 진정한 연서는 있었을까? ‘서로에게 끼쳤다는 그 영향’의 역사 속에서 아쉽지 않을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하게 품었던 그 감정은 온전히 전달되었을까? 지금은 그것이 비록 부서져버렸더라도 그 때만큼은 오해 없이 완벽히 받아들여졌을까?
고백하자면, 내 감정의 소요(騷擾)를 기다려주지 않는 화면을 앞에 두고, 여전히 이 의문들에 사로잡혀있느라 나는 많은 것들을 놓쳐 버렸다. 애석하게도 영화는 이 생각들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적막한 방과, 그 방구석에 쌓여 있는 책과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 그리고 주인공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큰 창에 비치는 쓸쓸한 도시의 정경만 보여주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마침내 언제나 말할 수 있고, 언제나 자신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 그것은, 아니 영화 제목처럼 ‘그녀’는 인공지능 OS다. 그녀는 테오도르에 대해 궁금해 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말을 들어주며, 반응해주며, 웃어주며, 어디든지 함께 간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토록 내가 궁금해 했던,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결코 보인 적이 없는 헤어진 아내에 대한 감정의 표현을 ‘그녀’에게 한다. “사랑해", "사랑해" 라고, 수차례에 걸쳐 입술을 움직인다. 그러나 외로움의 정서를 안고 있는 이 영화는 애석하게도 예고된 고독을 향해 걸어갔다(이건 직접 상영관에서 확인해보시길).
여하튼, 제목을 다시 보니 ‘She’가 아니라, ‘Her’였다. 그러니까, 번역은 <그녀>로 되어 있지만, 실은 <그녀를>인 것이다. 나는 그것이 다름 아닌, I loved Her의 축약형이라 이해했다. 영화에서 가장 아꼈었고, 가장 뒤늦게 한 말 ‘I love’가 포스터에 적혀 길거리에 흔하게 떠돌지 않게 하기 위한 생략형이라 여겼다. 이 영화는 제목마저도 시적으로 이토록 많은 것을 꾹꾹 누르고, 감추고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영화 포스터를 보니 테오도르가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사랑했습니다, ‘그녀를.’
- 과잉의 매혹, 결핍의 자유 <탐 엣 더 팜>
- B급 예술의 완벽한 승리 <바스터즈>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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