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드라마, 아니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여자 주인공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장혜성(이보영 분)을 꼽는다. 흔히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대다수의 여성 캐릭터와는 달리 혜성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이랴. 극의 진행과 로맨스에 있어 언제나 수동적인 위치에 서는 대다수의 여주인공과 달리 혜성은 드라마의 흐름에서도,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에서도 능동적인 자세로 극을 이끌어간다. 장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독립적인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가 완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배우 이보영의 훌륭한 연기도 한 몫을 했지만 박혜련 작가가 창조한 장혜성이라는 캐릭터 자체의 힘도 대단했다. 아무리 이보영이 완급조절을 완벽히 해냈다고 해도 혜성의 캐릭터에 내러티브가 없었다면 이 정도의 공감과 이해를 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캐릭터건 그 완성도는 제작진이 만들어주는 캐릭터 자체의 구성과 배우의 연기력을 모두 필요로 한다. 어느 한 쪽만 훌륭하다면 캐릭터는 결코 빛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최근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전지현 분)을 보며 같은 이유로 진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도둑들>에서 이미 그 시너지를 보여준 김수현ㆍ전지현에 <내조의 여왕>,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박지은 작가가 의기투합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기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미 수차례 자신의 흥행 파워를 증명한 작가와 두 스타의 조합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거니와, 작품은 독특한 소재와 탄탄한 구성으로 재미는 보장되어 있다고 이미 입소문을 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뚜껑을 연 후,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아쉬운 면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서사가 부족해도, 엉성한 구조가 계속 반복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 없이 시간만 흘러도 드라마가 갖춘 여타의 미덕을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점은 커져갔고 초반부 또 하나의 명품 드라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그라졌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드라마 대부분의 매력을 책임지고 있는 여자 주인공 캐릭터에서 그 구멍이 가장 크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 촘촘하게 짜인 남자 주인공 캐릭터에 비해 여주인공 캐릭터는 상당히 엉성한 구조를 갖고 있다. 큰 사회적 성취에 비해 사랑에 미숙하고 남자 주인공에게 의존적인 여주인공은 로맨스 장르에서 전형적이고 가장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 중 하나다. 로맨스의 장을 연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부터 그러하듯이, 백마 탄 왕자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창조된 이 장르에서 여성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평면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왔으니까.
이런 로맨스의 클리셰를 그대로 밟아가겠다는 데 달리 할 말은 없지만, 최근의 드라마들은 마냥 이런 빤한 캐릭터만을 재생산하는 데서 제 행보를 그치지 않는다. 히로인들은 더 이상 가련한 캔디가 아니다. 극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으로서 분명한 자신의 철학과 꿈을 가지고 있고 그를 완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남자 주인공의 도움을 받아야만 제대로 설 수 있는 캐릭터는 시청자들에게 야유를 당하고 오히려 제 직업적 성취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환호를 받는다. 로맨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사랑 앞에서 움츠러드는 남자 주인공에게 넌 겁쟁이라 당당히 말하고, 사랑의 완성을 위해 그의 손을 잡아 이끌기도 한다. 지난한 과정 끝 사랑을 이루는 장르 본연의 재미는 잃지 않은 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는 이런 캐릭터들은 시청자들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생각해 보라. 만일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김선아 분)가 자신과 희진 사이에서 흔들리는 진헌(현빈 분)을 두고 움츠러들며 눈물을 흘렸다면, 혹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혜성이 기억이 돌아온 수하를 끝끝내 밀어내고 자신의 마음을 부정했다면? 그녀들이 왕자가 자신을 구제하는 것을 기다리며 멀거니 서 있는 히로인이었다면 이 드라마들은 우리가 환호했던 그 결말을 맞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남자 주인공들이 얼마나 결핍된 인간인지 스스로 일깨우고 다 자라지 못한 그들을 성장시키는 캐릭터였기에 우리는 그 매력에 감탄과 환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이 캐릭터는 지나칠 정도로 수동적이다. 드라마가 완결까지 6회만을 남겨놓은 지금, 관계의 진전이나 서사의 흐름에 여자 주인공은 전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고백을 누가 먼저 했느냐 따위의 피상적인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전반에서 감정이 발생하고 흐르고 쌓이고, 주인공 양자 간의 관계를 건설하는 데 여주인공 캐릭터는 하는 바가 없다. 그녀는 그저 슈퍼 히어로처럼 묘사되는 남자 주인공에게 안겨 목숨을 구하고 위기를 뛰어넘을 뿐이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고민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에 비해 여주인공의 문제는 지나치게 가볍게 그려지고, 전반적인 이야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진정한 위협이 뭔지도 모르고 위험할 때마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외치는 데에 이르면 안타깝기까지 할 정도다.
게다가 여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온갖 설정과 연출로 제대로 엮어놓은 남자 주인공 캐릭터에 비해 여주인공 캐릭터는 다소 엉성하다. 어린 나이에 탑스타가 된 송이가 극성스럽지만 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엄마로부터 점차 메말라갔으며, 처음으로 자신을 탑스타도 돈 많은 사람도 아닌 그저 인간 천송이로 봐줬던 도민준에게 끌렸다고 설명했다면 캐릭터는 훨씬 더 인간미를 갖췄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하인드를 위해 단 몇 장면을 소비할 여력도 없어 보이고, 드라마는 개그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아무리 로맨스라고 해도 극 전체에서 지나치게 의존적인 캐릭터이다. 심지어 독립적인 에피소드였던 아버지와의 불화마저도 남자 주인공이 한 발을 보태야 해결된다. 15회까지 천송이 동기(動機)의 대부분이 도민준을 위한 것임에야 두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가 다름 아닌 전지현이다. <도둑들>,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필모그래피에서 보여줬듯이 전지현은 입체적이고 가변적인 캐릭터를 능숙히 연기할 수 있는 배우다. 자신의 존재감을 대중에게 강렬하게 인식시킨 <엽기적인 그녀> 이후, 전지현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하며 꾸준히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4인용 식탁>과 같은 호러물이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같은 휴먼 드라마 <도둑들>과 같이 액션을 넘나드는 작품을 보자면 전지현이 얼마나 자신의 한계를 깨기 위해 노력해왔는지 짐작 가능하다(<도둑들> 직후 선택한 <베를린>만 봐도 대중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보이지 않나). 약간의 서사만 주어져도 쉽게 그 이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배우에 비해 캐릭터는 지지부진 헤매고 있는 것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천송이가 매력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천송이는 매력적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하지만 문제는 그 매력이 대본이 아닌 배우 전지현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치킨과 맥주를 들고 즐겁게 춤을 추는 모습이나, 천연덕스레 자동차에 말을 걸고 자신의 미모를 뽐내며 잘난 척을 하는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천송이의 매력은 전지현 개인의 연기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막무가내에 무식하며 오만하고 경우를 모르는 캐릭터로 묘사된 초반부의 캐릭터를 보자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것이 솔직하고 당당한 자세와 귀여운 허영으로 포장되기까지 수 회가 흘렀는데, 아마 배우가 아니었다면 절대 사랑을 받지 못했을 캐릭터일 테다. 섬세한 연출이나 촘촘한 각본이 만들어줘야 했을 여주인공의 개성과 매력을 배우 스스로 고군분투해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안타깝지만 팬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장면들을 꼽아보자면 모두 전지현의 능력임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많은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의 끝에서 민준과 송이의 행복한 결말을 기대하리라.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것을 바란다. 결말까지 2주, 그동안 민준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했던 송이가 먼저 민준에게 손을 내밀길 바란다. 홀로 고민을 떠안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휘청대는 남자 주인공을 송이가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길, 존재 이상의 가치를 여자 주인공이 스스로 뽐내주길 말이다. 그리고 분명 제작진은 그를 보여주리라 믿는다. 천송이도, 전지현도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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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
서현
2014.06.09
하이얀별
2014.02.24
메롱
201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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