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스파이에게 바치는 진혼곡
스마일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끼는 후배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스파이로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정의도, 명분도 희미해져갔다. 임무를 위해서 친구를 저버리기도 하고, 가족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적절하게 타협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스마일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스마일리는 철두철미한 정보요원, 스파이였다.
글ㆍ사진 김봉석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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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중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의 주인공 조지 스마일리는 늙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서 스마일리는 후배들에게 밀려났고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났다. 언제나 날이 서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스파이가 현역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될까?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는 게리 올드먼이 연기하는 스마일리의 느슨한 일상을 보여준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조용한 식당에서 차분하게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날이 바뀌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것이 요동치고 있는지.

존 르 카레의 『스마일리의 사람들』 은 스마일리가 등장한 7번째 소설이고, 은퇴한 스마일리가 카를라와 대결하는 3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에서 은퇴한 스마일리는 정보국 내의 ‘두더지’를 잡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내부의 공식적인 인력이나 절차를 이용할 수 없다. 스마일리는 알게 된다. 오래 전 만나 망명을 요구했지만 거절하고 소련으로 돌아간, 훗날 KGB의 수장이 된 카를라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스마일리가 일생을 바쳐 헌신했던 모든 것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The Honourable Schoolboy』 에 이어지는 『스마일리의 사람들』 에서 스마일리는 한때 그가 담당했던 소련 망명자의 죽음을 알게 된다. 에스토니아 출신이었던 블라디미르는 소련의 장군이었을 때 스마일리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망명한 후에는 망명자들의 조직을 만들어 이끌어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블라디미르의 가치는 사라졌고 망명자 조직도 지리멸렬했다. 살해당하기 전 블라디미르는 스마일리와 접촉하기를 원했고,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전했다. 정보국에서는 스마일리에게 사건을 맡긴다. 가급적이면 조용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워버리고 싶어서. 하지만 스마일리는 블라디미르의 정보가 모스크바 센터라 부르는 KGB의 수장 카를라에 관련된 것임을 알아낸다.

『스마일리의 사람들』 의 배경은 1970년대다. 지금 생각하면 냉전이 한창인 때였고, 치열한 첩보전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미 그 때에도 모든 것은 썩어 들어갔다. 총성은 이제 끝났어, 조지. 그게 문제야. 모두가 회색이라고. 짝퉁 천사들이 짝퉁 악마와 싸우는 격이잖아. 전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총성도 들리지 않는 전쟁이라니. 존 르 카레는 두 경제 강국의 강박관념은 자체의 정체성과 의도, 세력과 약점을 드러내면서, 1970년대에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상호 감시와 과대망상에 빠진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아니 그렇기에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반면 외부에서는 그들의 초월적인 권력을 두려워했다. ‘불법’적인 작전을 금지하고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 그 결과 진짜 스파이는 사라지고 관료들과 기회주의자들만이 남았다.

시스템은 언제나 그랬듯 말잔치의 쓰레기만 남기고 눈물을 흘리며 사라졌다.....그는 얍삽한 자들이 무대를 장악할 때 뒷방에서 혼자 분투했건만 여전히 무대를 차지한 자들은 그들이다......오늘날 조용히 자신의 가슴을 들여다보니 처음부터 지도자는 없었으며, 지도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사실만 깨닫고 말았다. 그를 향한 유일한 제약은 자신의 이성과 양심뿐이었다. 결혼과 공공에 대한 봉사 정신도 빼놓을 수는 없다. 사회에 평생을 이바지했건만 남은 거라곤 나 자신뿐이군. 스마일리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존 르 카레의 스파이 소설은 007과 본 시리즈의 스파이 액션이 아니라 인간들이 벌이는 야비하고 추잡한 첩보전을 보여준다. 당연히 사람이 죽고 싸움도 벌어지지만 중요한 건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존 르 카레는 『스마일리의 사람들』늙은 스파이에게 바치는 진혼곡이라고 말한다. 스마일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끼는 후배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스파이로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정의도, 명분도 희미해져갔다. 임무를 위해서 친구를 저버리기도 하고, 가족을 멀리 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이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적절하게 타협하고,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서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스마일리의 선택이 아니었다. 스마일리는 철두철미한 정보요원, 스파이였다.

지금껏 스마일리가 죽어라 추적했던 야수도 광인도 로봇도 아니었다. 그도 분명한 인간이었다. 스마일리가 손을 조금만 내밀어도 절박한 사랑 따위에 무너지고 말 그런 인간.....그건 스마일리 자신이 실타래처럼 꼬인 삶을 통해 터득한, 누구보다 잘 아는 약점이기도 했다.

스마일리는 자신이 쫓는 것이 카를라인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결이라는 것도 감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자신이 카를라의 쌍둥이 같은 존재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카를라와 스마일리를 비슷한 인간, 비슷한 이미지로 바라본다. 스마일리가 카를라를 잡으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구원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 조지. 카를라는 당신 과거를 돌려주지 않아. 존 르 카레는 (스마일리와 카를라) 둘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결국 서로가 무인도의 유령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만다. 카를라는 자신의 정치 신념을 희생하고 스마일리는 인간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스마일리의 사람들』 은 냉전이라는 시대, 첩보전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희극’을 만들어냈는가를 보여준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가. 체제를 위하여, 라는 대의명분은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위안조차 주지 못한다. 거대한 환상일 뿐이다.

스마일리는 그런 점에서 결국 과거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불안해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언제나 마음을 다잡고 임무를 수행했다. 양심을 문밖에 남겨두어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마일리는 틀을 부수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때로 양심을 버리면서도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뒷전으로 사라질 뿐이다.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시대는 변했고, 존 르 카레는 스마일리의 시대를 이미 오래 전에 끝냈으니 이제는 새로운 첩보소설을 읽을 때이다. 존 르 카레의 근작들의 번역을 고대하는 이유다.


[관련 기사]

-실제 전직 영국 첩보원이 쓴 소설, 엄청난 인기
-‘마음속에 있는 것들은 다함이 없다’ - 『로스트 라이트』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어느 매력적인 여탐정 이야기
-미국으로 향한 핵폭탄을 막아라! - 『전몰자의 날』
-돈만 알던 속물 변호사 할러의 정의 찾기 - 『탄환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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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존 르 카레 저/조영학 역 | 알에이치코리아(RHK)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총 8편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중 일곱 번째 작품으로 영국 정보부의 조지 스마일리와 KGB의 스파이 마스터 ‘카를라’와의 마지막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은퇴한 늙은 스파이를 다시 첩보전의 중심으로 끌고 온 이 이야기는 ‘카를라 삼부작’의 시작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함께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자 ‘궁극의 스파이 소설’로 평가받는 존 르 카레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자신의 삶 대부분을 국가에 헌신하고 거대한 이념의 충돌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스파이, 냉전이 낳은 사생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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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조지 스마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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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fati2

2014.01.31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소설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소개해주신 스마일리의 사람들 역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고요. 팅커, 테일러.. 의 경우 원작과 다른 영화만의 설정이 담긴 장면을 보면서 첩보원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더 부각되어 있다는 것을 그 장면이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거든요. 본문 중에 나온 "스파이는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라는 표현에서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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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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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

영국 첩보원 출신인 스파이 소설의 거장이다. 존 르 카레는 1931년 영국 도싯 주의 항구 도시 풀에서 태어났다. 르카레는 그의 필명으로,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웰이며, 여동생인 살럿 콘웰은 영국의 유명배우이기도 하다. 스위스 베른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옥스퍼드 대학에서 근대 유럽어학을 수학했고, 1956년 졸업 후 이튼 칼리지에서 2년간 독일어를 가르쳤다. 1959년부터 1964년까지 영국 외무부에서 일했다. 이 당시 그는 영국 대사관 제2 서기관, 함부르크 정치영사, 그리고 영국 정보부인 MI6에서 일하며 냉전 시대 실제로 첩보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61년 요원의 신분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그해 첫 번째 장편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동서 냉전기의 독일을 무대로 이중간첩을 소재로 한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르카레는 시대를 반영한 걸출한 스파이 소설들을 발표하며 오늘날 스파이 스릴러를 쓰면서도 본격 작가로 대우받는 유일한 작가로 평가될 만큼 그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또한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냉전기의 시대 상황을 묘사한 작가로서, 그리고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명성을 현재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의 책은 40여 개 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존 르 카레의 대표작이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라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 속 주인공은 조지 스마일리로,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스파이로 유명하다. 총 8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는 조직에 헌신하고 맡은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끊임없이 고뇌하고 번민하며 독자들이 쉽게 잊을 수 없는 고독한 첩보원의 이미지를 구축해냈다. 현역에서 은퇴한 스마일리는『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서 KGB의 스파이 마스터 카를라가 영국 정보부에 심어 놓은 첩자를 색출하기 위해 일선에 복귀하고,『The Honourable Schoolboy』, 『스마일리의 사람들』에서 서로의 모든 것을 건 대결을 펼친다. 각자 이념과 진영은 다르지만 서로 닮은 두 남자의 싸움은 ‘카를라 삼부작’이란 이름으로 스파이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르 카레의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인기가 높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1979년 알렉 기네스 주연의 BBC드라마로 제작되었고, 1981년에는 『스마일리의 사람들』이 후속으로 방영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11년에는 토머스 알프레드슨 감독에 의해 게리 올드먼이 조지 스마일리의 역으로 분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개봉했다. 영국 추리 작가 협회가 수여하는 골드 대거상을 비롯하여 CWA 다이아몬드 대거상,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상, 에드거 그랜드 마스터, 말라파르테상, 니코스 카잔차키스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냉전 종식 후에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권 관련 문제에 천착해 왔으며 2019년에는 인권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로프 팔메상을 받았다. 2020년 12월 12일 왕립 콘월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르카레는 2000년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실제 르카레는 스파이 출신이다’라는,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그리고 그가 ‘나는 제임스 본드가 아니다’라며 극구 부인해 왔던 과거를 밝혔는데, 실제 그는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으며 당시의 경험은 일부 작품의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르카레는 2003년 같은 매체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며 블레어 총리와 부시 대통령을 강력히 비판하는 칼럼을 발표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저서로는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Call for the Dead』(1961; 최용준, 열린책들, 2007), 『고귀한 살인A Murder of Quality』(1962),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1963; 김석희, 열린책들, 2005), 『거울 나라의 전쟁The Looking-Glass War』(1965), 『독일 어느 소도시A Small Town in Germany』(1968), 『순진하고 감상적인 애인The Naive and Sentimental Lover』(1971),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1974; 이종인, 열린책들, 2005), 『오너러블 스쿨보이The Honourable Schoolboy』(1977), 『스마일리의 사람들Smiley's People』(1980)(이상 세 작품은 [카를라 3부작]에 속한다.), 『북치는 소녀The Little Drummer Girl』(1983), 『완벽한 스파이A Perfect Spy』(1986), 『러시아 하우스The Russia House』(1989), 『은밀한 순례자The Secret Pilgrim』(1990), 『나이트 매니저The Night Manager』(1993), 『우리의 게임Our Game』(1995), 『파나마의 재단사The Tailor of Panama』(1996), 『싱글 앤드 싱글Single & Single』(1999), 『콘스탄트 가드너The Constant Gardener』(2001), 『영원한 친구Absolute Friends』(2003; 박현주, 열린책들, 2010), 『미션 송The Mission Song』(2006), 『원티드 맨A Most Wanted Man』(2008), 『우리 배신자의 종류Our Kind of Traitor』(2010) , 『리틀 드러머 걸The Little Drummer Girl』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