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 저/김인경 역 | 꿈꾼문고
1833년 프랑스의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총체를 완벽하게 그려내려는 야심 찬 기획을 구상합니다. 그 기획의 산물이 바로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장·단편소설 91편을 유기적으로 엮어 묶은 총서 『인간희극』입니다. 발자크가 ‘사회의 자연사’로 정립하고자 했던 『인간희극』은 1부 풍속 연구, 2부 철학적 연구, 3부 분석적 연구라는 세 계열로 나뉩니다. 그중 풍속 연구만 사생활 장면, 지방 생활 장면, 파리 생활 장면, 정치 생활 장면, 군인 생활 장면, 시골 생활 장면으로 다시 분류되지요.
가장 널리 알려진 장편소설 『고리오 영감』―초반 보케르 하숙집과 고리오 영감을 포함한 그 하숙인들의 소개 부분을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 관건이나, 이후 술술 페이지가 넘어가는 가장 발자크다운 소설―은 “『인간희극』의 축도(縮圖)”라고 불리는 작품으로, 풍속 연구의 사생활 장면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고자 하는 중편소설 『곱세크』 역시 같은 사생활 장면에 들어가 있지요. 작품 세계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하 세월이군요.
『곱세크』는 1829년에서 1830년으로 넘어가는 파리의 겨울 새벽,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살롱에서 화자인 소송대리인 데르빌이 자작부인의 딸 카미유와 젊은 드 레스토 백작의 사랑을 돕고자 백작 가문의 영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고리대금업자 장에스테르 반 곱세크의 비밀스럽고 기이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요. 곱세크는 ‘수전노’이자 ‘인간-어음’이며 ‘황금의 화신’으로 묘사되면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더불어 서구의 가장 대표적인 고리대금업자의 소설적 인물이 됩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시작으로, 한 작품에서 주연급이었던 인물을 다른 작품에서 조연이나 주변 인물로 다시 나오게 하는 식으로 여러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데요. 이러한 ‘인물 재등장 수법’을 통해 자신의 소설들 사이에 상호 텍스트성을 구축합니다. 예를 들어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 라스티냐크 외젠은 『잃어버린 환상』에 재등장하고, 『사촌 퐁스』에 나오는 카뮈조 법원장 부부는 『창녀들의 영광과 비참』에 재등장합니다.
이 점에서 『고리오 영감』과 『곱세크』도 서로 연결되는데요. 『고리오 영감』에서 고리오 영감의 맏딸인 아나스타지 드 레스토 백작부인이 『곱세크』에서 젊은 드 레스토 백작의 어머니이자 곱세크의 고객으로 재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곱세크는 『곱세크』를 포함해 열네 편의 소설에 재등장한다고 합니다!)
“글쎄, 남편이 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 얼마 전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막심의 어음을 기억하고 계시죠? 그런데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어요. 저는 벌써 여러 번 어음을 갚아주었어요. (…) 그는 10만 프랑의 빚이 있다고 마침내 저에게 털어놓았어요! (…) 아버지는 그만한 돈이 없을 거예요, 제가 다 갉아먹었으니…….” (『고리오 영감』)
“나는 이 표정을 보고 백작부인의 앞날을 읽을 수 있었네. 금발에 냉정하고 인정 없는 노름꾼인 이 미남자는 머지않아 파산하고, 백작부인을 파산시킬 것이고, 그 여자의 남편을 파산시킬 것이며, 그 자식들을 파산시키고, 자식들의 몫도 먹어치울 거네.” (『곱세크』)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파멸을 이끈 금발 애인 막심 드 트라유도 『고리오 영감』과 『곱세크』에 모두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지요. 막심 드 트라유는 『세자르 비로토』에 재등장해서 사라 반 곱세크―우리의 주인공 곱세크의 종손녀랍니다―의 재산을 ‘다 집어삼키기’도 합니다.
“드 레스토 백작부인은 일가의 토지와 소유물, 심지어 자신이 거주하는 저택까지도 하나하나 곱세크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곱세크는 그들의 재산에 관해서 마치 식인귀라는 환상적인 인물을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곱세크』)
백작부인에게 ‘식인귀’―‘인간 상어’로 묘사되기도 하지요―로 보이는 곱세크는 금전에 관한 한 막강한 정보력과 예지 능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열 명의 고리대금업자들로 이루어진 비밀 조직의 일원이기도 하지요. 이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본을 통해 움직이고 조정합니다.
“저 사람들을 내 집으로 오게 하는 것이 바로 이거였군. 저 사람들에게 수백만의 돈을 모른 척 도적질하고 자기 조국을 배신하게 부추기는 것이 바로 이거였어.” (『곱세크』)
소설 초반의 곱세크는 초연하고 무감동한 시선으로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기계적인 엄정함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가지만, 말미에 가서는 결국 비논리적인 탐욕의 본능, 축적과 저장 강박의 욕망에 완전히 잠식당해 어떤 재산도 실제 손에 쥐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곱세크는 결국 이런 큰 사업의 만족할 줄 모르는 보아 뱀이 된 겁니다. (…) 연로한 고리대금업자한테 온 이러한 선물이 어찌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의 집으로 모든 것이 들어왔지만, 거기서 나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곱세크』)
이러한 곱세크의 모습은 후일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오염되지 않은 젊은이의 표상’인 데르빌의 성공과 대비를 이루는데요. 이때 데르빌이 작가의 세계관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사실 발자크 본인도 그 유명한 낭비벽 때문에 평생 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텐데 말이에요.
한 비평가는 ‘이 소설은 장차 발자크 세계의 독창성을 만들 모든 것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일종의 중대한 농축물’이라 평했다고 하는데요. 다루고 있는 주제 면에서 볼 때 『곱세크』 또한 『고리오 영감』처럼 발자크 세계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짧은 분량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 엑기스 소설을 한번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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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은 (출판 편집자)
은행나무 해외 문학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