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의 <메시아>를 뛰어넘는 작품의 탄생 -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öpfung)>
하이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듣던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헨델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진정한 최고의 대가입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전기 작가인 주세페 카르파니에게 당시의 감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런던에서 헨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음악공부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네.”
201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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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이 영국 런던에 발을 디딘 것은 언제였던가요? <내 인생의 클래식 101>을 지금까지 계속 읽어온 분들은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1791년이었지요. 좀더 정확히 기술하자면, 하이든은 1790년 12월 15일에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서 다음해 1월 1일 영국에 상륙했고 2일에 런던으로 들어섭니다. 당연히 배를 타고 갔겠지요. 그때부터 이른바 하이든의 ‘런던 시절’, 12개의 교향곡으로 대표되는 시기가 막을 올립니다.
자, 그런데 당시 런던은 유럽 최고의 음악산업 중심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빈보다도 훨씬 더 음악산업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인데다 그 진행 속도도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빨랐습니다. 이른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출현해 경제권을 한창 장악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회의 전체적 부(富)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물론 그 부의 축적은 농업계층에 속해 있다가 노동자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형성된 것이겠지요. 한데 바로 그것, 빠른 속도로 늘어난 물적 토대야말로 음악산업을 융성시킨 절대적 요인이었습니다. 흥행업자들은 연주회를 기획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티켓을 팔았고, 런던의 상류사회에서는 아마추어 연주회가 빈번히 열렸습니다. 음악출판업자들도 악보 판매가 늘어나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음악가들이 런던으로 몰린 것은 당연합니다. 1789년에 일어나 1794년까지 이어졌던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역사적 진보임에 틀림없지만 혼란해 보이는 사회적 상황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파는 유럽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음악가들이 배를 타고 런던을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무엇보다 ‘인기’를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역사적 장면은 귀족에 예속돼 있던 음악가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들어서는 ‘음악사적 전환’을 보여줍니다.
자, 그렇게 하이든이 런던에 당도했던 1791년, 당시 그곳에서 가장 유명했던 음악적 스타는 누구였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헨델이었습니다. 물론 헨델은 1759년에 세상을 떴으니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히 시들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런던의 흥행업자들이 주최했던 그 어떤 음악회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던 헨델 추모 음악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합쳐 10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원됐던 그 거대한 음악제에 견줄 수는 없었습니다. ‘헨델 콘메모레이션’이라고 이름 붙은 그 음악제는 헨델 사후 25주년(1789)이 되던 해부터 계속해 치러졌는데, 하이든이 런던에 도착했던 1791년에도 어김없이 축제가 열렸습니다.
하이든은 그곳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듣고 커다란 감명을 받습니다. ‘오라토리오’(oratorio)란 ‘종교적 극음악’을 뜻합니다. 극음악(劇音樂)이긴 하지만 오페라처럼 연극적인 무대를 만들어놓고 성악가들이 연기를 하면서 노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적인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이 있긴 하지만 그냥 합창석에서 노래 속의 가사로만 극의 줄거리를 전달하는 음악이지요. 헨델의 <메시아>는 바로 이 장르를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합창 ‘할렐루야’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어쩌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하이든은 일종의 문화적 쇼크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음악의 규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 그러니까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종속된 음악가로 일하던 시절에 지휘했던 오케스트라는 고작 20명 남짓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자그마치 1000명에 달하는 규모에 정신이 아찔할 만큼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아울러 그것은 이후의 하이든이 음악의 규모를 확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하이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듣던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헨델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진정한 최고의 대가입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전기 작가인 주세페 카르파니에게 당시의 감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런던에서 헨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음악공부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네.”
하이든이 당시 받았던 충격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창작에 자극과 영감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하이든은 영국에서 12개의 교향곡으로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고 1795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귀환하는데요, <천지창조>는 그 이듬해부터 2년여에 걸쳐 작곡된 음악입니다. 이어서 작곡한 또 하나의 오라토리오 <사계>와 더불어 하이든의 말년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힙니다. 하이든 연구로 유명했던 독일의 음악학자 겸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칼 페르디난트 폴(Carl Ferdinand Pohl 1819~1887)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는 하이든 음악의 절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별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평가입니다.
<천지창조>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음악입니다. 하이든은 성경의 창세기와 밀턴의 <실낙원>을 저본으로 삼은 영어 대본을 들고 귀국했는데, 그것을 하이든의 음악적 조언자였던 반 슈비텐 남작(1733~1803)이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그 대본에 하이든이 곡을 붙인 것이지요. 전체가 3부분으로 나뉘고 모두 34곡이 담겨 있습니다. 1부와 2부에서는 세 천사가 등장해 신(God)이 천지를 창조하는 6일 동안의 과정을 노래하는데, 그 천사들의 이름은 가브리엘, 우리엘, 라파엘입니다. 3부에서는 에덴동산에 살았던 두 명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전체 연주시간은 1시간 50분 남짓입니다. 그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곡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곡은 천지창조의 첫날을 묘사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을 장중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으로 길게 연주하다가 천사 라파엘이 신이 천지를 창조하신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하지만 아직 땅은 형체 없이 공허하고 어둠이 표면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어서 합창이 곧바로 등장해 신이 빛을 창조했음을 노래합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그러다가 음량이 확연히 고조됩니다. 이어서 천사 우리엘이 “신이 그 빛을 어둠과 갈라 놓으셨다”고 노래합니다.
7곡 ‘거친 들이 푸른 초원으로 변했네’는 천사 가브리엘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1부를 마무리하는 13곡 ‘하늘도 신의 영광을 드러내네’는 세 천사의 3중창과 합창이 박력 있게 어울리는 곡입니다. 3부의 첫 곡인 29곡으로 들어서면 아주 느린 라르고(largo) 템포의 간주곡이 흘러나오다가 천사 우리엘이 아름다운 에덴을 산책하는 한 쌍의 인간을 노래합니다.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입니다. 30곡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아름다운 화음으로 신의 영광을 노래하다가 합창이 뒤따라 나오는데,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일 듯합니다. 32곡은 아담과 이브의 2중창만으로 펼쳐집니다. 두 남녀가 주고받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악적인 기교가 매우 화려합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34곡 ‘만민아 소리 높여 찬양하라’는 4중창이 딸린 합창입니다. 1시간 50분가량을 마무리하는 곡답게 웅장하고 힘찬 분위기가 넘칩니다. 마지막 방점은 ‘아멘!’입니다. 이 마지막 곡을 듣다보면 하이든이 헨델의 <메시아>, 그중에서도 ‘할렐루야’에서 받았을 감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하지요. 아마도 하이든은 자신이 받았던 감동을 훨씬 뛰어넘는 걸작을 쓰고 싶었을 겁니다.
[관련 기사]
-청중의 지루함을 단숨에 날려버리다 - <교향곡 94번 G장조 ‘놀람’>
-내 생애 마지막 협주곡 -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대학교수 연봉의 10배 작곡료 받은 ‘비싼 음악가’ - <현악4중주 78번 B플랫장조 Op.76-4>
-오스트리아 공식 국가(國歌)로 선포된 이유? - <현악4중주 제77번 C장조 op.76-3 ‘황제’>
-클래식계의 코스모폴리탄, 헨델을 아시나요 - <메시아>
하이든(Joseph Haydn) [출처: 위키피디아] |
자, 그런데 당시 런던은 유럽 최고의 음악산업 중심지였습니다. 오스트리아 빈보다도 훨씬 더 음악산업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인데다 그 진행 속도도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빨랐습니다. 이른바 신흥 부르주아지들이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출현해 경제권을 한창 장악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회의 전체적 부(富)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물론 그 부의 축적은 농업계층에 속해 있다가 노동자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의 희생을 담보로 형성된 것이겠지요. 한데 바로 그것, 빠른 속도로 늘어난 물적 토대야말로 음악산업을 융성시킨 절대적 요인이었습니다. 흥행업자들은 연주회를 기획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면서 티켓을 팔았고, 런던의 상류사회에서는 아마추어 연주회가 빈번히 열렸습니다. 음악출판업자들도 악보 판매가 늘어나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랬으니 음악가들이 런던으로 몰린 것은 당연합니다. 1789년에 일어나 1794년까지 이어졌던 프랑스의 시민혁명은 역사적 진보임에 틀림없지만 혼란해 보이는 사회적 상황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파는 유럽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음악가들이 배를 타고 런던을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무엇보다 ‘인기’를 얻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역사적 장면은 귀족에 예속돼 있던 음악가들이 자본주의적 시스템으로 들어서는 ‘음악사적 전환’을 보여줍니다.
자, 그렇게 하이든이 런던에 당도했던 1791년, 당시 그곳에서 가장 유명했던 음악적 스타는 누구였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헨델이었습니다. 물론 헨델은 1759년에 세상을 떴으니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기는 여전히 시들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런던의 흥행업자들이 주최했던 그 어떤 음악회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던 헨델 추모 음악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합쳐 10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동원됐던 그 거대한 음악제에 견줄 수는 없었습니다. ‘헨델 콘메모레이션’이라고 이름 붙은 그 음악제는 헨델 사후 25주년(1789)이 되던 해부터 계속해 치러졌는데, 하이든이 런던에 도착했던 1791년에도 어김없이 축제가 열렸습니다.
하이든은 그곳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듣고 커다란 감명을 받습니다. ‘오라토리오’(oratorio)란 ‘종교적 극음악’을 뜻합니다. 극음악(劇音樂)이긴 하지만 오페라처럼 연극적인 무대를 만들어놓고 성악가들이 연기를 하면서 노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적인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이 있긴 하지만 그냥 합창석에서 노래 속의 가사로만 극의 줄거리를 전달하는 음악이지요. 헨델의 <메시아>는 바로 이 장르를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부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합창 ‘할렐루야’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어쩌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하이든은 일종의 문화적 쇼크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음악의 규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영국으로 떠나오기 전, 그러니까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종속된 음악가로 일하던 시절에 지휘했던 오케스트라는 고작 20명 남짓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자그마치 1000명에 달하는 규모에 정신이 아찔할 만큼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아울러 그것은 이후의 하이든이 음악의 규모를 확장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하이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듣던 순간,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요. “헨델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진정한 최고의 대가입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전기 작가인 주세페 카르파니에게 당시의 감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런던에서 헨델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음악공부의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네.”
미켈란젤로 (michelagelo Buonarroti)의 천지창조 中 [출처: 위키피디아] |
하이든이 당시 받았던 충격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의 창작에 자극과 영감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하이든은 영국에서 12개의 교향곡으로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고 1795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귀환하는데요, <천지창조>는 그 이듬해부터 2년여에 걸쳐 작곡된 음악입니다. 이어서 작곡한 또 하나의 오라토리오 <사계>와 더불어 하이든의 말년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힙니다. 하이든 연구로 유명했던 독일의 음악학자 겸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칼 페르디난트 폴(Carl Ferdinand Pohl 1819~1887)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는 하이든 음악의 절정”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별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평가입니다.
<천지창조>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음악입니다. 하이든은 성경의 창세기와 밀턴의 <실낙원>을 저본으로 삼은 영어 대본을 들고 귀국했는데, 그것을 하이든의 음악적 조언자였던 반 슈비텐 남작(1733~1803)이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그 대본에 하이든이 곡을 붙인 것이지요. 전체가 3부분으로 나뉘고 모두 34곡이 담겨 있습니다. 1부와 2부에서는 세 천사가 등장해 신(God)이 천지를 창조하는 6일 동안의 과정을 노래하는데, 그 천사들의 이름은 가브리엘, 우리엘, 라파엘입니다. 3부에서는 에덴동산에 살았던 두 명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전체 연주시간은 1시간 50분 남짓입니다. 그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곡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곡은 천지창조의 첫날을 묘사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을 장중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으로 길게 연주하다가 천사 라파엘이 신이 천지를 창조하신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하지만 아직 땅은 형체 없이 공허하고 어둠이 표면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어서 합창이 곧바로 등장해 신이 빛을 창조했음을 노래합니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그러다가 음량이 확연히 고조됩니다. 이어서 천사 우리엘이 “신이 그 빛을 어둠과 갈라 놓으셨다”고 노래합니다.
7곡 ‘거친 들이 푸른 초원으로 변했네’는 천사 가브리엘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1부를 마무리하는 13곡 ‘하늘도 신의 영광을 드러내네’는 세 천사의 3중창과 합창이 박력 있게 어울리는 곡입니다. 3부의 첫 곡인 29곡으로 들어서면 아주 느린 라르고(largo) 템포의 간주곡이 흘러나오다가 천사 우리엘이 아름다운 에덴을 산책하는 한 쌍의 인간을 노래합니다.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입니다. 30곡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아름다운 화음으로 신의 영광을 노래하다가 합창이 뒤따라 나오는데, 아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일 듯합니다. 32곡은 아담과 이브의 2중창만으로 펼쳐집니다. 두 남녀가 주고받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악적인 기교가 매우 화려합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34곡 ‘만민아 소리 높여 찬양하라’는 4중창이 딸린 합창입니다. 1시간 50분가량을 마무리하는 곡답게 웅장하고 힘찬 분위기가 넘칩니다. 마지막 방점은 ‘아멘!’입니다. 이 마지막 곡을 듣다보면 하이든이 헨델의 <메시아>, 그중에서도 ‘할렐루야’에서 받았을 감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케 하지요. 아마도 하이든은 자신이 받았던 감동을 훨씬 뛰어넘는 걸작을 쓰고 싶었을 겁니다.
[관련 기사]
-청중의 지루함을 단숨에 날려버리다 - <교향곡 94번 G장조 ‘놀람’>
-내 생애 마지막 협주곡 -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대학교수 연봉의 10배 작곡료 받은 ‘비싼 음악가’ - <현악4중주 78번 B플랫장조 Op.76-4>
-오스트리아 공식 국가(國歌)로 선포된 이유? - <현악4중주 제77번 C장조 op.76-3 ‘황제’>
-클래식계의 코스모폴리탄, 헨델을 아시나요 - <메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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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햄돌이
2013.11.07
유익한 설명 감사합니다.
글쓴이
2013.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