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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마지막 협주곡 -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트럼펫 협주곡의 대표적 걸작, 그런데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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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은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됐던 MBC TV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이었습니다. 방송 시작과 동시에 ‘빰빰 바밤~ 빰빰 바밤~’ 하면서 알레그로 템포의 3악장 주제가 시원하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곡은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음악으로 자리매김했지요.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을 지금의 30대들부터 197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녔을 60대들까지, 그러니까 자식과 부모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음악입니다.

시원한 음악이 필요한 때입니다. 뭐가 있을까요? 일단 떠오르는 곡이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입니다. ‘신세계로부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교향곡 9번보다 유명세는 덜하지만, 4악장에서 터져 나오는 트럼펫 연주가 분수의 물줄기처럼 시원합니다. 하지만 이 곡은 다음에 듣겠습니다. 당분간 바흐에서 베토벤까지의 음악에 주로 집중할 계획입니다.

하이든(Joseph Haydn) [출처: 위키피디아]

오늘 고른 음악은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입니다. 역시 트럼펫 음악입니다. 이 곡은 하이든의 다음 세대 작곡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Hummel, 1778~1837년)의 곡과 더불어 트럼펫 협주곡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하이든의 곡이 독주 파트에서 고음역이 활약이 두드러지는 것에 비해, 훔멜의 곡은 저음역 쪽이 좀더 강조돼 있습니다. 한 장의 CD에 두 곡이 동시에 수록돼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은 1973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됐던 MBC TV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이었습니다. 방송 시작과 동시에 ‘빰빰 바밤~ 빰빰 바밤~’ 하면서 알레그로 템포의 3악장 주제가 시원하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곡은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음악으로 자리매김했지요.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을 지금의 30대들부터 197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녔을 60대들까지, 그러니까 자식과 부모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음악입니다.

하이든은 이 곡을 64세였던 1796년에 작곡했습니다. 그가 남긴 협주곡은 주로 건반악기 쪽에 치중돼 있는 편이고, 그밖에는 바이올린 협주곡과 첼로 협주곡들, 그리고 아주 약간의 관악기들을 위한 협주곡들이 있습니다. 한데 자필 악보나 신빙성 높은 필사악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정확하게 몇 곡인지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는 자필악보로 작곡 연대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하이든의 모든 협주곡 중에서 마지막으로 작곡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음악이 바로 이 곡입니다. 하이든은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 이후에는 더 이상 협주곡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년의 하이든, 그러니까 영국에서 흥행음악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굳힌 뒤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온 하이든은 주로 현악4중주와 종교음악에 매진했습니다.

하이든은 서른 살 무렵부터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종속된 음악가’로 30년 가까이를 살았고, 좀더 나이 들어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흥행 음악가로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보다 개인적인 예술 세계, 혹은 종교적인 세계로 접근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1795년에 런던에서 돌아온 하이든은 더 이상 아쉬울 것 없는 원로급 문화 인사였지요. 재산도 많이 모았을 뿐 아니라 음악적 명성은 유럽 사회를 통틀어 거의 최고였습니다. 예전처럼 귀족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부르주아 청중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었습니다. 물론 빈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악장을 맡아 달라”는 에스테르하지 가문(니콜라우스 2세)의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거처럼 전적으로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1년에 단지 2~3개월만 일을 해주고 나머지 기간은 빈에 머물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음악들을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18세기 후반부터 번져가던 유럽의 사회변동 속에서, 귀족의 권력은 점차 약해지고 하이든의 힘은 반대로 커졌던 것이지요.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는 빈 궁정악단의 트럼펫 연주자였던 안톤 바이딩거(Anton Weidinger, 1766-1852)를 위해 작곡됐다고 전해집니다. 애초에 트럼펫은 오늘날처럼 키와 밸브가 있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음역이 넓지 못했고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한데 당대의 트럼펫 비르투오소였던 바이딩거는 5개의 키가 달린 트럼펫, 반음계를 표현할 수 있는 트럼펫을 직접 고안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자면 그는 1801년에 이 반음계 유건(有鍵) 트럼펫(Key Trumpet)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1790년대 후반부터 미완의 형태로나마 사용했으리라고 짐작됩니다. 그가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를 초연한 것은 1800년 3월 28일이었으니까요. 이 곡은 반음계를 표현할 수 없는 ‘옛날 트럼펫’으로는 연주가 불가능합니다.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플랫장조’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쉽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곡입니다. 1악장은 바이올린이 첫번째 주제를 제시하고 잠시 후 관현악이 그것을 힘차게 이어받으면서 시작하지요. 곧 이어 하강형의 선율이 역시 현악기들을 중심으로 연주되고 다시 한번 관현악 합주가 그것을 이어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트럼펫이 등장해 바이올린이 앞에서 선보였던 첫번째 주제를 산뜻하게 연주합니다. 이어서 다시 관현악 합주가 펼쳐지다가 트럼펫이 두 번째 주제를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고전적 형식의 음악을 들으면서 악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두 개의 주제를 기억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그 주제 선율은 여러 차례 반복해 나타나는데, 자꾸 듣다보면 주제가 변화하는 과정(발전부, 재현부)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주 트럼펫의 화려한 기교가 펼쳐지는 인상적인 카덴차, 이어서 관현악이 짧고 힘찬 마침표를 찍으면서 1악장이 막을 내립니다.


2악장은 느린 안단테 악장입니다. 현악기들이 시칠리아풍의 춤곡 주제를 우아하게 연주하면서 문을 엽니다. 왠지 찬송가 분위기가 감도는 그 주제 선율을 곧바로 트럼펫이 이어받습니다. 그렇게 트럼펫과 관현악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트럼펫이 처음에 등장했던 선율을 다시 한번 연주하면서 고즈넉하게 마무리합니다.


3악장은 <장학퀴즈>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악장이지요. 서두에서 현악기들이 제시하는 주제가 바로 그 유명한 <장학퀴즈>의 시그널입니다. 그것을 관현악 합주가 이어받으면 현악기들이 짧고 빠른 음형으로 따라붙으면서 관현악이 두번째 주제를 제시하지요. 이어서 트럼펫이 등장해 첫번째 주제를, 잠시 후에는 두번째 주제를 반복해 연주합니다. 그렇게 트럼펫과 관현악이 주거니 받거니 주제를 발전시키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것처럼 음악이 살짝 잦아듭니다. 이어서 트럼펫이 첫번째 주제를 다시 힘차게 연주하면서 마지막 코다(종결)로 들어섭니다. 시원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올해 더위도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p.s. ‘트럼펫의 파가니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러시아 태생의 트럼펫 연주자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36)가 국내에서도 몇해 전부터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데 그의 레코딩을 미처 모니터링하지 못해 추천음반 목록에서 제외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모리스 앙드레(Maurice Andre), 리카르도 무티ㆍ필하모니아 관현악단/1985년/EMI

모리스 앙드레(1933~)와 구슐바우어가 지휘하는 밤베르크 심포니의 협연(1971년/Erato)은 아쉽게도 국내에서 품절 상태다. 대신 오늘 추천목록에는 1985년 리카르도 무티와의 협연을 올려놓는다. 이 역시 앞의 녹음에 별로 뒤지지 않는 수연이다. 프랑스 태생의 앙드레는 그 이전의 누구에게서도 보기 힘들었던 현란한 기교, 커다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원한 블로윙으로 트럼펫 연주의 역사를 새로 썼다. 특히 바로크 시대의 트럼펫 레퍼토리를 부활시킨 공적은 지대하다고 할 만하다. 이 녹음도 특유의 기교와 박력을 맛보기에 부족하지 않다. 헨델, 텔레만, 훔멜 등의 곡을 커플링했다.



하칸 하르덴베르거(Hakan Hardenberger), 네빌 마리너ㆍ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The Academy of St. Martin-in-the-Fields)/1986년/PHILIPS

스웨덴 태생의 트럼펫 연주자 하칸 하르덴베르거는 2007년 한국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앞 시대가 모리스 앙드레의 독주로 흘러온 것과 달리,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트럼펫 분야는 춘추전국의 양상을 띤다. 그중에서도 하칸 하르덴베르크는 북유럽적인 차가움을 겸비한 독특한 서정성으로 주목받는다. 모리스 앙드레의 연주가 어딘지 과시적인 느낌을 풍긴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음반을 추천한다. 하르덴베르거는 주로 현대음악에서 강점을 보여 왔지만, 하이든과 훔멜의 협주곡을 녹음한 이 음반에도 호평이 쏟아졌다. <그라모폰>과 <스테레오 리뷰> 등의 음반비평지들이 별 다섯 개를 아낌없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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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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