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집은 나의 집, 나의 집은 너의 집
이 책은 공간을 짓는 건축가가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집에 기거하며, 거기서 발견한 다채로운 삶의 풍경과 삶의 방식에 대해 아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주인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인 집만큼 사람을 닮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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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남의 집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으신지요. 낯설면서도 따뜻한 그 특유의 공기에는 집이라는 공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안온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행지의 어떤 고급 호텔도 결코 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한편으로 집이라는 것은 그 주인의 향기를 고스란히 담은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기에 집만큼 그 사람을 잘 말해주는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 머문 타인의 집은 아마도 조반나의 집이었던 듯합니다. 2006년, 일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와 맺었던 약속대로 저는 낯선 땅으로 1년간의 상주 여행을 떠났고,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이탈리아의 소도시 페루자Perugia에 정착해 연극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전을 열며 그 땅과 세상 구석구석에서 온 사람들을 살았습니다.

당시 극단의 동료였던 조반나는 어느 날 불쑥 대학 동료 교수들과 떠나는 고고학 여행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했고, 새벽 일찍 떠나야 하는 일정 탓에 자신의 집에서 자고 함께 출발하기를 권했지요. 엔지니어임에도 인문학자에 가까운 독서 편력을 지녔던 아버지의 서가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녀의 집은 제 싸구려 월세방에 비해 어찌나 안온하던지요. 생활의 향기가 배어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날 조반나는 내게 자신의 푹신한 침대를 내어주고, 자신은 비좁은 창고 방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그날 밤의 깊고도 달콤했던 잠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 경험이 나로 하여금 낯선 누군가의 집에 머무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아니 실은 사랑해 마지않게 만들었을 겁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동양의 여자아이에게 베풀어준 작은 호의가 스스로 타인을 향해 쌓아두었던 보이지 않는 장벽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선을 무너뜨렸습니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 좋은 집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단칸방에서 시작해 오랜 시간 전셋집을 여럿 거쳤고, 중학생 시절 도시 외곽에 부모님이 처음으로 분양받은 14층 아파트가 우리 가족이 소유해본 유일한 집입니다. 그리고 스무 살 이후로는 그 집을 떠나 4인실 기숙사와 반지하의 자취방을 전전했고, 타국 생활을 하면서도 늘 방 한 칸을 빌어 사는 신세였지요. 좋은 공간을 많이 살아봐야 하는, 집 짓는 내가 살아온 공간의 가난한 역사입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낸 풍요로운 공간은 길 위에 있었습니다. 세상 곳곳을 떠돌며 만난 크고 위대한 건축물도 작은 골목길의 소소함도 두 발에, 가슴에 차곡차곡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길 위를 헤매었던 내게 어느 날, 타인의 집이라는 더없이 풍요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낯선 타국의 한 도시에 떨어져 그 설은 언어와 공간들을 살 때, 그곳에서 알게 된 벗이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해 깨끗한 이불을 덮어주고 뜨거운 국물을 먹여주었습니다. 여행자에서 유학생이 되고 다시 여행자로 돌아가는 시간의 간극들로 갈 곳 없어진 내게 기꺼이 자기 집의 방 한 칸을 내어주었습니다. 세상 곳곳으로 흩어진 친구들이 나를 불러주었고, 놀랍게도 길 위에서 만난 낯선 타인들이 자신의 집의 문을 열고 나를 가족으로 품어주었습니다.

친구의 집이, 또 그 친구의 친구 집이 내 집이 되고, 마침내는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이의 집에도 두려움 없이 머무를 수 있는 경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집 여행이 이어졌습니다. 때론 머물 곳이 없어서, 때로는 가난한 여행자의 경비 걱정에 누군가의 집에 잠시 신세를 지던 것이 어느덧 유명한 도시, 화려한 건축물을 보는 것보다 더 흥미로워졌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이, 삶의 방식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 사는 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명한 관광지 대신 그들의 삶과 그 삶의 터를 여행해보기로 했습니다. 한두 시간 머무는 객이 아닌 생의 한 장을 함께 써나가는 벗의 자리에서요.

내가 가진 것이라곤 좋은 귀와 길 위에서 주워 올린 이야기밖에 없었습니다. 저 먼 옛날, 마을 사람들이 순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듯 나는 내가 보고 듣고 걸어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고, 한편으로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했을 그들 삶의 청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집에 머물 때 나는 또 한 명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일상을 함께합니다. 같이 요리하고 청소하고 동물과 아이를 돌봅니다. 그림을 그려주고, 메뉴판을 만들어주고, 사진을 찍어주고,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렇게 작은 재능들이, 서로를 향한 소소한 마음들이 나누어졌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운은 길 위에 널려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운을 발견하는 열린 마음과 그것을 집어들 한 줌의 용기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맹목적인 이상주의자도 하릴없는 비관주의자도 못 됩니다.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딘 채 앞을 바라보고, 그저 한발 한발 내딛을 뿐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지평을 조금씩 넓혔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들을 만난 과정을 소상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들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폐가 되지나 않을까 하여 택한 작은 배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사적인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길 위에서 만난 이들과 나눈 충만함을 당신과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와 함께 여행하길, 그들과 함께 머물길, 그리고 함께 웃고 울고 사랑하길. 그래서 마침내 당신의 집이 나의 집이 되고, 나의 집이 당신의 집이 되길.

우리 모두가 80억 개의 집을 가지길.

2013년 가을의 길목에서
전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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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여행하다 전연재 저 | 리더스북
누군가의 인생을 책으로 만난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다. 누군가의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그의 눈을 통해 풍경을 보고, 그의 마음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에 더없이 짜릿한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다. 건축가 전연재 씨가 쓴 《집을. 여행하다》는 구경꾼의 시선으로 낯선 곳을 여행하는 데서 나아가, 그들 삶속으로 들어가 청자가 되고 가족이 되는 아주 특별한 여행의 기록이기도 하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동경하면서도 몸소 떠나는 여행을 무한 연장하는 게으르고 안전한 여행자들, 타인의 시선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삶을 만나길 좋아하는 이들이 더욱 반길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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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재 #집을. 여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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