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오후, 숲의 새벽이 되다 - 장필순
자신만의 세상을 구현해내며 완숙한 음악을 들려주고 있는 장필순의 일곱 번째 앨범을 소개합니다.
2013.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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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비례한다고들 말한다. 1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필순 7집은 단번에 이목을 사로잡기보다는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스며드는 앨범이다. 두 장의 전작들을 처음 마주할 때 들었던 산뜻한 파격감은 당장에는 덜하지만, 자각 없이 자연스레 물들여져 더욱 강력하다. 그 유장한 에너지는 이번 앨범이 획득한,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경지다. 무의식을 흡수하는 음악은 의식의 영역 안에서 교류하는 음악보다 위력적이다.
7집에 깃든 이 같은 힘은 앨범 곳곳에 내재된 비움의 철학에서 기인된 것이 아닐까. 채움으로 채우는 음악이 아닌, 비움으로써 채우는 음악의 완결. 그래서 어느 사상가의 전언처럼 퍼내어도 다함이 없다. 노래들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가도 풍향의 방향이 바뀐 듯 다시금 불어들고, 일시에 나고 죽는 소리의 즉각성에 따라 저만치 흩어졌다가도 끝끝내 마음에 고인다. ‘늘 살아 있기를, 늘 깨어 있기를,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나지막한 주문처럼 읊조리는 노랫말에서 이 부단한 재생력의 비결을 예측할 수 있을까. 노래처럼, 7집은 살아 있고 깨어 있으며 비움으로 한껏 충만하다.
앨범이 품고 있는 것은 비단 노래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세상이 영글어져 있다. 음악이라는 표현술로 세상의 단면, 심정의 일부를 은유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음악 자체로 자신만의 세상을 설계해낸 셈이다. 그 세상은 환상할 수 있는 화려한 무언가는 분명 아니다. 넋 놓고 구경할 만한 황홀도 없다. 그보다는 점점 희소해져가는 가치들, 지켜야 할 가치들의 세상. 여백의 세상. 그래서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손잡을 수 있고 자신을 밀착할 수 있는, 리얼의 세상이다. 앨범 초입에 걸린 안내 명패처럼, 그렇기에 더더욱 「눈부신 세상」 이다.
또 하나, 하나 음악의 세상이다. 이제 확실히 장필순의 음악이 반갑다는 말 속에는 조동익에 대한 반가움과 하나음악에 대한 애틋한 인사가 함께 담긴다. 이번 앨범도 어김없다. 4집부터 함께 작업한 조동익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여기에 조동진의 옛 노래와 이규호, 고찬용, 박용진의 곡들이 보태어졌다. 이 음악 동지들은 제주도에 있는 장필순의 집을 오가며 그들만의 서정이 반짝이는 공동체의 음악을 빚어냈다. ‘제주 외딴집’에서 녹음되어 장필순이라는 대표명의를 통해 세상에 나온 이들의 작품은 소박한 외장에 세련된 사운드, 빼어난 만듦새로 무장하고 있다.
첫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거대한 자연과 일상의 순환을 닮았다. 조동진의 곡을 재해석한 첫 곡 「눈부신 세상」 의 광대한 울림이 원시적인 생명력을 틔우며 시작을 연다면, 고찬용이 만든 끝 곡 「난 항상 혼자 있어요」 는 이에 대비되는 거룩한 저묾이다. 그 가운데의 수록곡들은 어느 곡 하나 지나침이 없다. 우리 삶을 수놓는 시간들처럼 모든 트랙이 존재적 필연성을 지니고서 서로 굴곡을 만들어 낸다.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1동 303호」 의 음악적 서사도 그렇고, ‘외로이 쓰러져도 부러져도 아름답더라’는 노랫말만큼이나 청신한 기운을 풍기는 「빛바랜 시간 거슬러」 도 그렇다. 삶에 치이고, 때론 술에 취해 「휘어진 길」 따라 비틀대고, 곧잘 외로운, 장삼이사의 이야기들. 그 고단한 생을 보듬는 노래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긍정으로 따스하다. 마치 그런 흔한 사연이기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거란 듯이, 앨범 전체에 웅숭깊은 관조가 흐른다.
개별 노래들도 각각의 세계를 품은 듯 상당한 공간감을 지니고 있다. 악기의 질감이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덕분이다. 소리들은 저마다의 원근으로 노래의 부피를 확장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빼곡하게 채우기 위한 확대가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넓혀 여백을 마련하기 위한 팽창이다. 한올 한올 투명하게 피어오르는 소리들을 부드럽게 포개는 허스키 보컬의 사운드 조화력은 여전히 일품이다. 거기다 곳곳에서 생동하는 전자음은 곡의 화룡점정이다. 일렉 사운드의 적절한 가미는 「1동 303호」 에서 도시의 청각적 풍경을 부드럽게 살렸고, 「맴맴」 의 한가로운 정서에 신비감을 덧입혀 곡의 매력을 끌어올렸다.
장필순은 자신의 자리에서 더욱 깊어짐으로써 완숙의 음악을 구현했다. 전과 다른 면모가 없는 건 아니다. 「눈부신 세상」 코러스에서의 압도적인 육성은 첫귀에 놀라움을 때린다. 「휘어진 길」 에서 랩을 가미한 것도 그간 장필순의 음악을 떠올릴 때 생경하다. 대곡 지향적인 구성과 한곡 안에 사운드 변화가 다채롭게 진행되는 것도 조금은 색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낯섦에 실험이나 시도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어색한 건 앨범 전반에서 느껴지는 ‘무위에 대한 의지’ 때문이다. 노래에는 오직 건강한 생의 에너지와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음악적 지향만이 그윽하고, 군데군데의 새로운 지점들은 그 지향에 더 가닿기 위한 장치로 존재한다.
제주도에서 빚어진 음악이라 해서 노래에 배인 정서를 꼭 제주도의 풍경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이 앨범에 담긴 대지의 향기는 어느 곳의 우리도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의 공기다. 건물들과 아스팔트 도로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저 아래 잠복해 있는 본래의 대지, 그 텅 빈 처음의 공간을 앨범은 싱그럽게 되살린다. 그리고는 마치 비너스의 탄생을 도운 서풍의 신 제피로스처럼 온화한 숨결을 불어 넣어 생명력을 틔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살아나고 깨어나며 가슴 텅 비우게 만든다. 노래를 따라 평안해진 마음에는 어느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너’라는 응원만이 들어찬다. 「눈부신 세상」 의 등장은 그래서 더 반갑고 고맙고 가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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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비례한다고들 말한다. 11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장필순 7집은 단번에 이목을 사로잡기보다는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스며드는 앨범이다. 두 장의 전작들을 처음 마주할 때 들었던 산뜻한 파격감은 당장에는 덜하지만, 자각 없이 자연스레 물들여져 더욱 강력하다. 그 유장한 에너지는 이번 앨범이 획득한,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경지다. 무의식을 흡수하는 음악은 의식의 영역 안에서 교류하는 음악보다 위력적이다.
앨범이 품고 있는 것은 비단 노래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세상이 영글어져 있다. 음악이라는 표현술로 세상의 단면, 심정의 일부를 은유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음악 자체로 자신만의 세상을 설계해낸 셈이다. 그 세상은 환상할 수 있는 화려한 무언가는 분명 아니다. 넋 놓고 구경할 만한 황홀도 없다. 그보다는 점점 희소해져가는 가치들, 지켜야 할 가치들의 세상. 여백의 세상. 그래서 노래를 듣는 사람들도 손잡을 수 있고 자신을 밀착할 수 있는, 리얼의 세상이다. 앨범 초입에 걸린 안내 명패처럼, 그렇기에 더더욱 「눈부신 세상」 이다.
또 하나, 하나 음악의 세상이다. 이제 확실히 장필순의 음악이 반갑다는 말 속에는 조동익에 대한 반가움과 하나음악에 대한 애틋한 인사가 함께 담긴다. 이번 앨범도 어김없다. 4집부터 함께 작업한 조동익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여기에 조동진의 옛 노래와 이규호, 고찬용, 박용진의 곡들이 보태어졌다. 이 음악 동지들은 제주도에 있는 장필순의 집을 오가며 그들만의 서정이 반짝이는 공동체의 음악을 빚어냈다. ‘제주 외딴집’에서 녹음되어 장필순이라는 대표명의를 통해 세상에 나온 이들의 작품은 소박한 외장에 세련된 사운드, 빼어난 만듦새로 무장하고 있다.
첫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거대한 자연과 일상의 순환을 닮았다. 조동진의 곡을 재해석한 첫 곡 「눈부신 세상」 의 광대한 울림이 원시적인 생명력을 틔우며 시작을 연다면, 고찬용이 만든 끝 곡 「난 항상 혼자 있어요」 는 이에 대비되는 거룩한 저묾이다. 그 가운데의 수록곡들은 어느 곡 하나 지나침이 없다. 우리 삶을 수놓는 시간들처럼 모든 트랙이 존재적 필연성을 지니고서 서로 굴곡을 만들어 낸다.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1동 303호」 의 음악적 서사도 그렇고, ‘외로이 쓰러져도 부러져도 아름답더라’는 노랫말만큼이나 청신한 기운을 풍기는 「빛바랜 시간 거슬러」 도 그렇다. 삶에 치이고, 때론 술에 취해 「휘어진 길」 따라 비틀대고, 곧잘 외로운, 장삼이사의 이야기들. 그 고단한 생을 보듬는 노래의 시선은 어느 때보다 긍정으로 따스하다. 마치 그런 흔한 사연이기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거란 듯이, 앨범 전체에 웅숭깊은 관조가 흐른다.
개별 노래들도 각각의 세계를 품은 듯 상당한 공간감을 지니고 있다. 악기의 질감이 입체적으로 살아있는 덕분이다. 소리들은 저마다의 원근으로 노래의 부피를 확장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빼곡하게 채우기 위한 확대가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넓혀 여백을 마련하기 위한 팽창이다. 한올 한올 투명하게 피어오르는 소리들을 부드럽게 포개는 허스키 보컬의 사운드 조화력은 여전히 일품이다. 거기다 곳곳에서 생동하는 전자음은 곡의 화룡점정이다. 일렉 사운드의 적절한 가미는 「1동 303호」 에서 도시의 청각적 풍경을 부드럽게 살렸고, 「맴맴」 의 한가로운 정서에 신비감을 덧입혀 곡의 매력을 끌어올렸다.
장필순은 자신의 자리에서 더욱 깊어짐으로써 완숙의 음악을 구현했다. 전과 다른 면모가 없는 건 아니다. 「눈부신 세상」 코러스에서의 압도적인 육성은 첫귀에 놀라움을 때린다. 「휘어진 길」 에서 랩을 가미한 것도 그간 장필순의 음악을 떠올릴 때 생경하다. 대곡 지향적인 구성과 한곡 안에 사운드 변화가 다채롭게 진행되는 것도 조금은 색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낯섦에 실험이나 시도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어색한 건 앨범 전반에서 느껴지는 ‘무위에 대한 의지’ 때문이다. 노래에는 오직 건강한 생의 에너지와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음악적 지향만이 그윽하고, 군데군데의 새로운 지점들은 그 지향에 더 가닿기 위한 장치로 존재한다.
제주도에서 빚어진 음악이라 해서 노래에 배인 정서를 꼭 제주도의 풍경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이 앨범에 담긴 대지의 향기는 어느 곳의 우리도 딛고 서 있는 바로 그곳의 공기다. 건물들과 아스팔트 도로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저 아래 잠복해 있는 본래의 대지, 그 텅 빈 처음의 공간을 앨범은 싱그럽게 되살린다. 그리고는 마치 비너스의 탄생을 도운 서풍의 신 제피로스처럼 온화한 숨결을 불어 넣어 생명력을 틔운다. 듣는 이로 하여금 살아나고 깨어나며 가슴 텅 비우게 만든다. 노래를 따라 평안해진 마음에는 어느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너’라는 응원만이 들어찬다. 「눈부신 세상」 의 등장은 그래서 더 반갑고 고맙고 가슴 벅차다.
글/ 윤은지 (theother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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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