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17] 홀로 걷고 있는 사람을 위로해주는 노래 -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사랑은 방황을 좋아하네/ 신은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네/ 내 사랑 이제는 안녕.” 독일어로 된 가사를 토대로 내용을 살펴봤다. 한 젊은 남자가 실연을 당해, 그녀의 집 근처를 애처롭게 서성이다 드디어 이별을 고하고 길을 나선다. “넌 또다시 솟구치는구나/ 내 가슴, 뜨겁게 불타오르는/ 마치 모두 녹여버릴 듯이/ 이 겨울의 얼음을 모두 다!” 사내의 불타듯 절절한 마음과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 날씨가 대비되면서, 그의 슬픔과 절망이 깊어져 간다.
201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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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차 하기 싫은, 원치 않는 이별을 했네
한 해가 저무는 겨울, 춥고 쌀쌀한 날, 어딘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객을 떠올리게 하는 ‘겨울 나그네’는 쓸쓸함과 고독의 상징이다. PC 통신, 혹은 인터넷 아이디로 종종 만나게 되는 아이디 ‘겨울 나그네’님들은 남자였는데, 그 아이디를 택한 이유를 물어보면, ‘고독, 쓸쓸, 방황’을 연상시킨다거나, ‘있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대와 앉았던 그 날 그 자리는/ 기쁨과 슬픔 모두 버리고/ 사랑 이루지 못한 채 /하얀 겨울 속으로 음음~” 사랑의 슬픔을 구성진 목소리로 뽑아 올리는 가수 심수봉의 노래 제목도, “우린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이별을 했어/ 원치 않은 그런 이별을/ 하지만 그땐 붙잡을 순 없었지.”라고 흐느끼던 터보의 노래 제목도 <겨울 나그네>다.
세 남녀의 ‘예상치 못한 사랑과 원치 않는 이별 이야기’인 최인호의 소설도 동명의 제목이다. 모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사랑, 그로 인한 쓸쓸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쯤 되면, 겨울 나그네의 원조인 슈베르트 가곡의 내용이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열여섯 장의 클래식 앨범을 사귀고 나니, 이제야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조금은 감이 생긴다. 물론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 노래를 쭉 들었다. 단순히 노래의 분위기만으로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일단,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가사가 있는 가곡이다 보니, 곡의 분위기 이전에 성악가의 목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온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처럼 이탈리아어도 아니고, 코스모폴리탄 헨델이 국제적인 관객까지 염두에 두고 배려했던 것처럼 영어도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독일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음악을 붙인 곡이야. 가곡은 기본적으로 시에 음악을 붙였다고 보면 돼. 우리나라에서도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 <향수>, 윤해영의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 <선구자> 등이 있지?”
실연당한 남자의 정처 없는 방황, <겨울 나그네>
독일출신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부르는 <겨울 나그네> 1. Gute Nacht (안녕히)
슈베르트가 음악가로서 피아노조차 살 수 없는 가난에 시달렸다는 건 지난번 <아르페지오 소나타>를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 시간 만에 가곡을 뚝딱 써낼 만큼 대단한 창작열에 불타는 음악가였고, 슬픔도 삶의 힘으로 삼을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기억한다. 그런 슈베르트를 완전히 감동하게 한 뮐러 역시 슈베르트만큼 곤궁하고 어려운 삶을 살다 요절한 시인이었다.
“당시 뮐러도 마음 저린 짝사랑을 하고 있었어. 사교 모임에서 만난 루이제 헨젤이라는 여자를 사모하게 되지만, 짝사랑이 결실을 보지 못했지. 결국, 루이제 헨젤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난 뒤에야 실연의 마음을 안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어. 이 여행을 다녀온 후 ‘물방앗간 이야기’와 ‘겨울 여행’이라는 민요시를 써서 발표했는데, 이 시를 보고 슈베르트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를 작곡한 거지.”
“사랑은 방황을 좋아하네/ 신은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네/ 내 사랑 이제는 안녕.” 독일어로 된 가사를 토대로 내용을 살펴봤다. 한 젊은 남자가 실연을 당해, 그녀의 집 근처를 애처롭게 서성이다 드디어 이별을 고하고 길을 나선다. “넌 또다시 솟구치는구나/ 내 가슴, 뜨겁게 불타오르는/ 마치 모두 녹여버릴 듯이/ 이 겨울의 얼음을 모두 다!” 사내의 불타듯 절절한 마음과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 날씨가 대비되면서, 그의 슬픔과 절망이 깊어져 간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다섯 번째 곡은 ‘보리수(Der Lindenbaum)’라는 이름으로 귀에 익은 노래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부르는 <보리수>
한국어 가사로 된 가곡 <보리수>를 들을 때도 잘 몰랐는데, 잔잔하게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가사를 하나씩 뜯어보니 느낌이 사뭇 다르다. 생의 기쁨도 아름다움도 상실하고, 그리움과 슬픔만 등에 이고 걷는 나그네가 잠시 보리수에서 쉬는 풍경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고요하게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모든 장면이 ‘안식’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실연의 상처뿐 아니라, 삶에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곡이다. 그래서 이 곡이 유난히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처음에는 눈앞에 닥친 슬픔, 절망만을 노래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사랑은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다. 사랑의 즐거움이 삶에 있어 가장 크고, 사랑의 고통이 죽음에 비견할 만큼 크기 때문에 사랑은 삶의 본능(에로스)와 죽음의 본능(타나토스)를 유발한다.
<겨울 나그네> 역시 초반의 시들은 이별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지만, ‘휴식’ ‘봄꿈’ ‘고독’ ‘백발’ ‘까마귀’ ‘이정표’ 등 뒤로 가면, 사랑의 고통은 삶의 고단함과 허무, 안식에 관한 이야기로 흐른다. 뮐러의 시가 노래하는 사랑이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있기에, 오스트리아 사람 슈베르트의 마음을 울리고, 이제까지 불리는 시로 명맥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일 테다.
삶에서 가장 애착하고 아끼던 것, 안주하던 곳에서 떨어져 나와 현실의 풍파에 맞서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곡이다. 안식을 노래하는 따뜻한 곡, 슬픈 마음을 담아 비장미가 흐르는 곡, 단호한 결단이 느껴지는 곡 등 ‘겨울 나그네’라는 테마 안에서 다양한 선율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분위기에 맞게 성악가 역시 목소리 톤으로 연기하듯 노래한다.
가곡을 부흥시킨 다작왕, 슈베르트
슈베르트의 대표적인 가곡 <마왕>을 곡 이야기에 맞춰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슈베르트의 진정한 본진에 들어왔으니, 가곡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가장 처음으로 음악에 사용된 악기가 뭘까? 인간의 목소리겠지? 가곡은 인간의 목소리를 사용한 음악, 보컬 장르의 대표적인 주자야. 독일어로 Gesang, Lied, 영어로는 Lieder라고 표기되는데,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가곡들이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어.
프랑스, 영국 등 클래식 음악에 한가닥하는 다른 나라들도 가곡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 가곡이 이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오늘 다룰 슈베르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고, 또 슈만 등 다른 빼어난 가곡 작곡가들이 활약 덕분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여기서도 이탈리아를 빼놓을 수 없지. 오페라가 워낙 발달해서 상대적으로 가곡이라는 장르가 이탈리아에서 빛을 못 본 경향이 있지만, 민요, 칸초네 등으로 발달한 그들의 노래 실력이 어디에 갈 리 없잖아. 오페라도 보컬 예술의 최고봉에 가까우니까 말이야.”
선배 얘기를 들어보니, 이탈리아의 가곡 중에 우리가 (제목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음악 시간에 배웠던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 미오> <카로 미오 벤> 등이 바로 이탈리아 가곡이다.
“가곡이 시에 음악을 붙인 노래라고 했지? 그래서 독일 가곡의 중심에는 괴테가 있어. 이런 기본적인 정의에 해당하는 걸 ‘예술가곡’이라고 불러. 이탈리아 가곡 중에는 시가 아니라 민요나 칸초네를 바탕으로 한 곡이 많은데, 이런 곡을 포함해서 대중적인 곡은 아니지만, 성악가를 위해 작곡되거나 불리는 곡도 폭넓게 가곡으로 보고 있어.”
슈베르트가 ‘가곡의 왕’으로 불린 것은 삼십 년이라는 짧은 생에 속에서 다작을 했기도 했지만, 그가 예술가곡 전성기의 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란다. 장르를 부흥시켰으니, 왕으로 불릴 법도 하다.
“<겨울 나그네>는 연가곡집이야. 같은 주제로 지어진 시들을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얘긴데, 예를 들자면,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속의 시 여러 편에 곡을 부쳐 하나의 앨범으로 만들면 연가곡집이라고 할 수 있지.
슈베르트는 세 개의 연가곡집을 만들었어. 지금 듣고 있는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그리고 유작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조의 노래>, 모두 아름다운 곡이지.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서정적이며 담백한 매력이 있어. 특히 유작들을 모아놓은 <백조의 노래>(백조는 죽기직전에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는 꼭 한번 들어봐.”
뮐러의 원작 시 제목은 ‘겨울 여행’(winter journey)인데, 슈베르트의 노래는 <겨울 나그네>로 번역되어 오고 있다. “번역상으로는 ‘겨울 여행’이 정확하지만, 아무래도 ‘겨울 나그네’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성이 더 강렬했던 거지.
이 곡은 실연한 연인의 집 밖에서 안녕을 고하며 시작하여 겨울 들판을 떠돌며 차례차례 보고 느끼는 것을 묘사했어. 마지막에는 ‘들어줄 이 없고, 거들떠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멈추지 않고 연주하는 거리의 늙은 악사를 만나 함께 길을 가면서 끝나.”
<겨울 나그네>의 진짜 느낌 살리는 바리톤 음색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안 보스트리치의 <겨울 나그네>
“성악가는 목소리의 음역별로 남녀 각각 세 가지로 분류해. 여자는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알토로, 남자는 테너/ 바리톤/ 베이스로 나뉘어. 남자건 여자건 아무래도 고음을 화려하게 뽐내는 성악가가 주목받기 마련이라, 대부분 남녀 주연은 소프라노와 테너가 맡아.
목소리가 한 단계 낮은 메조소프라노와 바리톤은 보통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악역을 맡는데, 이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만큼은 테너가 아닌 바리톤이 불러야 제맛이 나. 묵직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은 바리톤의 음색으로 불러야 외롭고 쓸쓸하지만, 낭만적인 겨울 나그네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거든.”
가곡의 왕이 만든 노래답게 많은 성악가가 <겨울 나그네>를 녹음했다. 그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음반은 독일 출신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의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이다.
“지적이고 명료하고 맑으면서도 기품있는 저음의 피셔-디스카우의 목소리는 슈베르트의 가곡들의 주는 느낌과 그대로 맞아 떨어지며 자기 옷을 입은양 자연스러워. 보통은 영어나 프랑스어에 비해 격한 된소리로 취급받는 독일어 발음이 아름답게까지 들리게 만드는 힘이 있어. 슈베르트의 작품 말고도 많은 독일 가곡의 녹음을 남겼으며, 여러 오페라에 출연했어. 가히 20세기의 최고의 바리톤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성악가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지.”
슈베르트, 좀더 친해지고 싶다면
선배는 <겨울 나그네> 다음으로 들어볼 슈베르트 음반을 읊기 시작했고, 나는 열심히 받아 적었다. “<겨울 나그네>나 <백조의 노래> 말고도 듣지 않고 넘어가기 아쉬운 좋은 가곡들이 많아. 학교에서도 많이 배우는 <들장미>나 <송어>도 친숙하고, 세 명의 캐릭터를 소화해야 해서, 성악가는 물론 피아노 반주자도 절대 신공을 발휘해야 하는 <마왕>도 정말 매력적인 곡이야. 그리고 가곡은 아니지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와 <아베 마리아>도 빼놓을 수 없지.”
“디스카우의 슈베르트 가곡집도 괜찮고, 한스 호터, 분덜리히, 페터 슈라이어의 슈베르트 가곡도 일품이야. 비교적 최근의 성악가들이라면, 아름다운 미성의 이안 보스트리지나 굵직한 매력의 마티아스 괴르네가 있지. 특히나 마티아스 괴르네의 겨울 나그네는 열렬한 호평과 찬사를 받은 베스트셀러 음반중 하나야. 슈베르트를 포함한 여러 독일 가곡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면, 유니버설에서 출시한 <독일 가곡집>을 추천해.”
여름이 저무는 무렵,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젠가 정말로 발이 폭폭 잠길 만큼 눈이 내리는 날, 가만히 집에 앉아 이 곡을 꼭 한번 들어봐야겠다. 오페라처럼 이해할 수 없는 가사가 나온다고 지레 겁먹었는데, 바리톤 성악가가 목소리로 내는 다양한 표정의 소리를 떠올리며 슬픔에 젖었다가, 안도했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여정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혼자 길을 걷고 있을 때, ‘친구여, 여기 와서 쉬어라’ 하는 보리수의 소리가, ‘지상에 신이 없다면, 우리들이 바로 신이야’ 하던 용기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을까. 이번 한주도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
한 해가 저무는 겨울, 춥고 쌀쌀한 날, 어딘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객을 떠올리게 하는 ‘겨울 나그네’는 쓸쓸함과 고독의 상징이다. PC 통신, 혹은 인터넷 아이디로 종종 만나게 되는 아이디 ‘겨울 나그네’님들은 남자였는데, 그 아이디를 택한 이유를 물어보면, ‘고독, 쓸쓸, 방황’을 연상시킨다거나, ‘있어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대와 앉았던 그 날 그 자리는/ 기쁨과 슬픔 모두 버리고/ 사랑 이루지 못한 채 /하얀 겨울 속으로 음음~” 사랑의 슬픔을 구성진 목소리로 뽑아 올리는 가수 심수봉의 노래 제목도, “우린 기억조차 하기 싫은 이별을 했어/ 원치 않은 그런 이별을/ 하지만 그땐 붙잡을 순 없었지.”라고 흐느끼던 터보의 노래 제목도 <겨울 나그네>다.
세 남녀의 ‘예상치 못한 사랑과 원치 않는 이별 이야기’인 최인호의 소설도 동명의 제목이다. 모두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사랑, 그로 인한 쓸쓸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쯤 되면, 겨울 나그네의 원조인 슈베르트 가곡의 내용이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열여섯 장의 클래식 앨범을 사귀고 나니, 이제야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조금은 감이 생긴다. 물론 처음에는 가만히 앉아 노래를 쭉 들었다. 단순히 노래의 분위기만으로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일단,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가사가 있는 가곡이다 보니, 곡의 분위기 이전에 성악가의 목소리가 먼저 귀에 들어온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처럼 이탈리아어도 아니고, 코스모폴리탄 헨델이 국제적인 관객까지 염두에 두고 배려했던 것처럼 영어도 아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독일어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음악을 붙인 곡이야. 가곡은 기본적으로 시에 음악을 붙였다고 보면 돼. 우리나라에서도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 <향수>, 윤해영의 시에 노래를 붙인 가곡 <선구자> 등이 있지?”
실연당한 남자의 정처 없는 방황, <겨울 나그네>
독일출신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부르는 <겨울 나그네> 1. Gute Nacht (안녕히)
슈베르트가 음악가로서 피아노조차 살 수 없는 가난에 시달렸다는 건 지난번 <아르페지오 소나타>를 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한 시간 만에 가곡을 뚝딱 써낼 만큼 대단한 창작열에 불타는 음악가였고, 슬픔도 삶의 힘으로 삼을 만큼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기억한다. 그런 슈베르트를 완전히 감동하게 한 뮐러 역시 슈베르트만큼 곤궁하고 어려운 삶을 살다 요절한 시인이었다.
“당시 뮐러도 마음 저린 짝사랑을 하고 있었어. 사교 모임에서 만난 루이제 헨젤이라는 여자를 사모하게 되지만, 짝사랑이 결실을 보지 못했지. 결국, 루이제 헨젤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난 뒤에야 실연의 마음을 안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어. 이 여행을 다녀온 후 ‘물방앗간 이야기’와 ‘겨울 여행’이라는 민요시를 써서 발표했는데, 이 시를 보고 슈베르트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겨울 나그네>를 작곡한 거지.”
“사랑은 방황을 좋아하네/ 신은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네/ 내 사랑 이제는 안녕.” 독일어로 된 가사를 토대로 내용을 살펴봤다. 한 젊은 남자가 실연을 당해, 그녀의 집 근처를 애처롭게 서성이다 드디어 이별을 고하고 길을 나선다. “넌 또다시 솟구치는구나/ 내 가슴, 뜨겁게 불타오르는/ 마치 모두 녹여버릴 듯이/ 이 겨울의 얼음을 모두 다!” 사내의 불타듯 절절한 마음과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 날씨가 대비되면서, 그의 슬픔과 절망이 깊어져 간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다섯 번째 곡은 ‘보리수(Der Lindenbaum)’라는 이름으로 귀에 익은 노래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수많은 단꿈을 꾸었네. 보리수 껍질에다 사랑의 말 새겨 넣고 기쁠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그곳을 찾았네 나 오늘 이 깊은 밤에도 그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네. 나뭇가지들이 살랑거리면서, 꼭 나를 부르는 것 같았네. “친구여, 내게로 오라. 여기서 안식을 찾아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세차게 때렸네. 모자가 바람에 날려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네. 이제 그곳에서 멀어진 지 벌써 한참이 되었네. 그래도 여전히 속삭이는 소리 들리네. “친구여, 여기서 안식을 찾으라!” -<겨울 나그네>, 빌헬름 뮐러, 김재혁 옮김,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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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부르는 <보리수>
한국어 가사로 된 가곡 <보리수>를 들을 때도 잘 몰랐는데, 잔잔하게 흐르는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가사를 하나씩 뜯어보니 느낌이 사뭇 다르다. 생의 기쁨도 아름다움도 상실하고, 그리움과 슬픔만 등에 이고 걷는 나그네가 잠시 보리수에서 쉬는 풍경이 보인다.
나뭇가지들이 고요하게 살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 모든 장면이 ‘안식’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실연의 상처뿐 아니라, 삶에 고단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곡이다. 그래서 이 곡이 유난히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처음에는 눈앞에 닥친 슬픔, 절망만을 노래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사랑은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되기 마련이다. 사랑의 즐거움이 삶에 있어 가장 크고, 사랑의 고통이 죽음에 비견할 만큼 크기 때문에 사랑은 삶의 본능(에로스)와 죽음의 본능(타나토스)를 유발한다.
<겨울 나그네> 역시 초반의 시들은 이별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지만, ‘휴식’ ‘봄꿈’ ‘고독’ ‘백발’ ‘까마귀’ ‘이정표’ 등 뒤로 가면, 사랑의 고통은 삶의 고단함과 허무, 안식에 관한 이야기로 흐른다. 뮐러의 시가 노래하는 사랑이 삶과 죽음을 관통하고 있기에, 오스트리아 사람 슈베르트의 마음을 울리고, 이제까지 불리는 시로 명맥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일 테다.
“눈송이가 얼굴에 떨어지면, 흔들어 떨어뜨리리. 내 마음 속 슬픈 울음이 터져 나오면, 난 밝고 명랑히 노래 부르리. 그것이 말하는 것을 난 듣지 않으리, 난 귀가 없어. 그것이 슬퍼하는 것을 느끼지 않으리.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지. 쾌활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가리. 바람과 거친 날씨를 헤치고! 신이 지상에 없다면, 우리들이 바로 신이야!” -<겨울 나그네> 중 22.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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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을 부흥시킨 다작왕, 슈베르트
슈베르트의 대표적인 가곡 <마왕>을 곡 이야기에 맞춰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슈베르트의 진정한 본진에 들어왔으니, 가곡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가장 처음으로 음악에 사용된 악기가 뭘까? 인간의 목소리겠지? 가곡은 인간의 목소리를 사용한 음악, 보컬 장르의 대표적인 주자야. 독일어로 Gesang, Lied, 영어로는 Lieder라고 표기되는데,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가곡들이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어.
프랑스, 영국 등 클래식 음악에 한가닥하는 다른 나라들도 가곡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 가곡이 이렇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오늘 다룰 슈베르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고, 또 슈만 등 다른 빼어난 가곡 작곡가들이 활약 덕분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여기서도 이탈리아를 빼놓을 수 없지. 오페라가 워낙 발달해서 상대적으로 가곡이라는 장르가 이탈리아에서 빛을 못 본 경향이 있지만, 민요, 칸초네 등으로 발달한 그들의 노래 실력이 어디에 갈 리 없잖아. 오페라도 보컬 예술의 최고봉에 가까우니까 말이야.”
선배 얘기를 들어보니, 이탈리아의 가곡 중에 우리가 (제목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음악 시간에 배웠던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 미오> <카로 미오 벤> 등이 바로 이탈리아 가곡이다.
“가곡이 시에 음악을 붙인 노래라고 했지? 그래서 독일 가곡의 중심에는 괴테가 있어. 이런 기본적인 정의에 해당하는 걸 ‘예술가곡’이라고 불러. 이탈리아 가곡 중에는 시가 아니라 민요나 칸초네를 바탕으로 한 곡이 많은데, 이런 곡을 포함해서 대중적인 곡은 아니지만, 성악가를 위해 작곡되거나 불리는 곡도 폭넓게 가곡으로 보고 있어.”
슈베르트가 ‘가곡의 왕’으로 불린 것은 삼십 년이라는 짧은 생에 속에서 다작을 했기도 했지만, 그가 예술가곡 전성기의 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란다. 장르를 부흥시켰으니, 왕으로 불릴 법도 하다.
“<겨울 나그네>는 연가곡집이야. 같은 주제로 지어진 시들을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얘긴데, 예를 들자면,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 속의 시 여러 편에 곡을 부쳐 하나의 앨범으로 만들면 연가곡집이라고 할 수 있지.
슈베르트는 세 개의 연가곡집을 만들었어. 지금 듣고 있는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그리고 유작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조의 노래>, 모두 아름다운 곡이지.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서정적이며 담백한 매력이 있어. 특히 유작들을 모아놓은 <백조의 노래>(백조는 죽기직전에 마지막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이 있다!)는 꼭 한번 들어봐.”
뮐러의 원작 시 제목은 ‘겨울 여행’(winter journey)인데, 슈베르트의 노래는 <겨울 나그네>로 번역되어 오고 있다. “번역상으로는 ‘겨울 여행’이 정확하지만, 아무래도 ‘겨울 나그네’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성이 더 강렬했던 거지.
이 곡은 실연한 연인의 집 밖에서 안녕을 고하며 시작하여 겨울 들판을 떠돌며 차례차례 보고 느끼는 것을 묘사했어. 마지막에는 ‘들어줄 이 없고, 거들떠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멈추지 않고 연주하는 거리의 늙은 악사를 만나 함께 길을 가면서 끝나.”
<겨울 나그네>의 진짜 느낌 살리는 바리톤 음색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안 보스트리치의 <겨울 나그네>
“성악가는 목소리의 음역별로 남녀 각각 세 가지로 분류해. 여자는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알토로, 남자는 테너/ 바리톤/ 베이스로 나뉘어. 남자건 여자건 아무래도 고음을 화려하게 뽐내는 성악가가 주목받기 마련이라, 대부분 남녀 주연은 소프라노와 테너가 맡아.
목소리가 한 단계 낮은 메조소프라노와 바리톤은 보통 주인공의 라이벌이나 악역을 맡는데, 이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만큼은 테너가 아닌 바리톤이 불러야 제맛이 나. 묵직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너무 가볍지 않은 바리톤의 음색으로 불러야 외롭고 쓸쓸하지만, 낭만적인 겨울 나그네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거든.”
가곡의 왕이 만든 노래답게 많은 성악가가 <겨울 나그네>를 녹음했다. 그중 첫손가락에 꼽히는 음반은 독일 출신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의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이다.
“지적이고 명료하고 맑으면서도 기품있는 저음의 피셔-디스카우의 목소리는 슈베르트의 가곡들의 주는 느낌과 그대로 맞아 떨어지며 자기 옷을 입은양 자연스러워. 보통은 영어나 프랑스어에 비해 격한 된소리로 취급받는 독일어 발음이 아름답게까지 들리게 만드는 힘이 있어. 슈베르트의 작품 말고도 많은 독일 가곡의 녹음을 남겼으며, 여러 오페라에 출연했어. 가히 20세기의 최고의 바리톤이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성악가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지.”
슈베르트, 좀더 친해지고 싶다면
선배는 <겨울 나그네> 다음으로 들어볼 슈베르트 음반을 읊기 시작했고, 나는 열심히 받아 적었다. “<겨울 나그네>나 <백조의 노래> 말고도 듣지 않고 넘어가기 아쉬운 좋은 가곡들이 많아. 학교에서도 많이 배우는 <들장미>나 <송어>도 친숙하고, 세 명의 캐릭터를 소화해야 해서, 성악가는 물론 피아노 반주자도 절대 신공을 발휘해야 하는 <마왕>도 정말 매력적인 곡이야. 그리고 가곡은 아니지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와 <아베 마리아>도 빼놓을 수 없지.”
“디스카우의 슈베르트 가곡집도 괜찮고, 한스 호터, 분덜리히, 페터 슈라이어의 슈베르트 가곡도 일품이야. 비교적 최근의 성악가들이라면, 아름다운 미성의 이안 보스트리지나 굵직한 매력의 마티아스 괴르네가 있지. 특히나 마티아스 괴르네의 겨울 나그네는 열렬한 호평과 찬사를 받은 베스트셀러 음반중 하나야. 슈베르트를 포함한 여러 독일 가곡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면, 유니버설에서 출시한 <독일 가곡집>을 추천해.”
여름이 저무는 무렵,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젠가 정말로 발이 폭폭 잠길 만큼 눈이 내리는 날, 가만히 집에 앉아 이 곡을 꼭 한번 들어봐야겠다. 오페라처럼 이해할 수 없는 가사가 나온다고 지레 겁먹었는데, 바리톤 성악가가 목소리로 내는 다양한 표정의 소리를 떠올리며 슬픔에 젖었다가, 안도했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여정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혼자 길을 걷고 있을 때, ‘친구여, 여기 와서 쉬어라’ 하는 보리수의 소리가, ‘지상에 신이 없다면, 우리들이 바로 신이야’ 하던 용기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을까. 이번 한주도 좋은 친구를 사귀었다.
두 번째로 선택된 음반 이안 보스트리지, 안스네스 : 슈베르트 : 겨울 나그네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아름다운 미성의 이안 보스트리지의 음반이 두번째로 선택되었다. 대학교의 인기많은 교수님 느낌의 이안 보스트리지는 느낌 그대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구파 성악가이다. 영국출신의 독일가곡이라? 어색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청명한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런 걱정은 저만치 사라진다. 겨울 나그네도 좋고 다른 가곡집도 좋으니 꼭 감상해볼 것! 겨울 나그네를 비올라로 편곡하여 연주한 매우 특별한 음반이다. 비올라의 음색과 <겨울 나그네> 속의 고독하고 쓸쓸한 느낌이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는 것은 예상 그대로이다. 용재 오닐의 비올라 연주는 그 외로움 속에 듣는 이를 감싸 안는 따뜻함이 있다. 덧붙여 비올라로 연주하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까지 들어볼 수 있는 가격 면에서도 매력만점인 음반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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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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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연답게 잘, 헤쳐나가고자 합니다.
미미의괴담
2013.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