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는 어떻게 연락했나요?
초등학생이 된 내 아이, 아빠의 대학시절 사진을 보더니 촌스럽다며 피식 웃는다. 알고 보면 대학에서 퍽 유명했던 패션리더였는데…. 386세대(현 486세대)로 불리며 참여정부의 주역이 되었지만 어느덧 ‘낀 세대’가 되어 버린 40대. <채널예스>가 이들을 위해 1980년대로 향하는 추억의 급행열차를 (어바웃 90년대 특집에 이어) 재가동했다.
글ㆍ사진 엄지혜
201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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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시작하여,

1987년 6.29 선언을 거치는 가운데 한국프로야구가 출범되고

출판, 대중음악,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팽창하던 그 시절.

부동산 투기 열풍과 본격적 강남 개발로 사회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1980년대는 그야말로 사회 모든 분야갸 격하게 요동치던 시대였습니다.

<채널예스>는 1990년대를 탐험하는 기획을 거쳐 이제는 1980년대를 호출해봅니다.

그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있다면, 이제는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까요?

 

지난해는 1990년대를 회상하는 한 해였다. 영화 <건축학개론>, 드라마 <응답하라 1997>가 큰 인기를 얻으며 30대가 된 사람들은 청춘의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을 들으며 HOT, 젝스키스를 추억하는 30대들을 바라보며, 40대들은 다소 소외감을 느꼈다. 7080세대라고 하기엔 난 아직 젊은데, 어느덧 노땅 취급을 받다니! 검색 세대,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지금의 20대들에게 선포한다. “우리의 과거는 너희들의 지금보다 특별했다고!”


음악다방,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데이트


1963년생 Y씨. 부산의 명문고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이 됐다. 83학번,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이과계열 전자공학과의 신입생이 되어 입학식을 치렀다. 학교에 오면 운동권 학생들의 민중가요가 귀를 찌른다. 농활에 가면 빠짐없이 부르는 ‘타는 목마름으로’, ‘사계’부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그루터기’까지. 하지만 로맨티스트라고 자부하는 Y씨는 학교보다는 음악다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카세트테이프가 대중화되었지만, 통기타 음악의 산실이던 명동 음악다방 ‘쉘브르’에서 LP판을 고르며 낭만을 향유했다. 종로서적 앞에 있는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미팅을 하기로 한 날.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찻집에서 맥심, 초이스 커피믹스를 사 먹는 게 유행이었는데 이번에는 괜찮은 여학생들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큰 맘 먹고 경양식 레스토랑으로 장소를 잡았다. 대학생 버스회수권이 있던 시절, Y씨는 85원짜리 회수권으로 버스를 타고 종로로 향했다. 종로의 핫 플레이스는 서울극장, 피카디리, 단성사. 동시 상영하는 영화를 본 날이면 꼭 노트에 영화 감상평을 적곤 했다.


막걸리에 파전, 이념 논쟁


Y씨가 대학생이 되어, 한눈에 반한 외국 여배우는 브룩쉴즈. 그녀의 전성기를 증명하는 영화 <끝없는 사랑>은 당시 파격적인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Y씨는 대학에서 밴드 활동을 했다. 조용필, 백두산, 부활 등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들의 곡을 편곡해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평소 어수룩하고 소심한 Y씨였지만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선 날만큼은 이승철 못지않은 환호성을 샀다. 1977년에 시작한 <대학가요제>, 1979년에 시작한 <강변가요제>에 출전하기 위해 Y씨의 밴드는 매일 밤낮으로 연습을 했지만 2년 연속 예선 탈락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밴드 연습이 끝나면 막걸리에 파전을 시켜 놓고 이념 논쟁을 했다. 취기가 오르면 간혹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노래 한 곡만 함께 부르면 상황 종료. 밴드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아이 아빠가 된 지금까지도 우정을 지키고 있다.


공중전화로 사랑 고백, 오빠 보다는 ‘형’


주말이 되면 Y씨는 종로학원에서 서무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외가 금지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과외 금지가 풀렸는데 이미 Y씨는 직장생활을 시작한 때였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스포츠용품을 사는 취미를 가졌던 Y씨는 나이키, 아디다스, 프로스펙스 사이에서 늘 고민하며 결국에는 자국 브랜드를 사랑하자는 마음으로 프로스펙스를 선택했다. 다소 여성스러운 성격이 있었던 Y씨는 여자 후배들한테도 꽤 인기가 있었다.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이유로, 성격 미남이라는 이유로. 하지만 여자 후배들은 Y씨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나이가 비슷하면 ‘형’, 아니면 ‘선배’였다. 여동생이 없는 Y씨에게는 평생의 숙원이 ‘오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는데, 여자친구마저도 운동권에 속한 친구라 연애하는 기간 내내 ‘형’이라고 불리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여자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는 동네 앞에 있는 공중전화를 사용했다. 학점은 바닥인데 공부를 안 한고 연애만 하냐는 부모님의 채근을 피하려면, 공중전화가 해답이었다.

애인이 없는 친구들은 오로지 미팅에 목숨을 걸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고팅은 80년대 초까지 유행했다. 고고장 또는 디스코장에서 미팅을 하는 ‘고팅’은 개강을 빙자한 ‘개빙고’, 중간고사 후 치러지는 ‘중빙고’, 종강 후에 진행하는 ‘종빙고’ 등으로 확대됐다. 벚꽃놀이가 벌어지는 창경궁에서는 대규모 미팅이 벌어지기도 했다. 밤 야(夜)와 벚꽃이란 일본어 사쿠라를 합친 ‘야사쿠라팅’이 그것. 하지만 벚꽃이 뽑힌 85년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Y씨는 지금도 창경궁에 갈 때면,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다행히도 8세 연하인 아내는 ‘야사쿠라팅’의 존재를 몰라서 다행일 따름이다.


한동안 록 문화에 심취해있던 Y씨는 라디오키드다. 고등학생 때부터 빠진 라디오 청취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부터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을 즐겨 들었고, 지금까지도 Y씨에게 라디오 스타는 이종환, 황인용, 김기덕이다. 또 88년부터 시작한 라디오 다큐 드라마 <격동시대> 역시 잊지 못하는 추억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컬러TV가 등장한 후, 라디오의 인기가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그래도 라디오 마니아들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


밑단 접은 청바지, 어깨 패드 재킷


Y씨는 패션 센스 없기로 유명했지만 여자친구가 생긴 후부터는 꽤 대범해졌다. 셔츠를 꼭 바지 안에 넣고 벨트를 한 모범생 패션을 고수했던 Y씨가 장발에 꽃무늬 셔츠, 스키니 팬츠를 소화하며 캠퍼스를 누볐다. 뭐, 딱히 세련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봐줄 만은 했다고. 대학가 패션리더들은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조용필의 머플러, 가는 넥타이를 소품으로 사용했고, 록에 심취한 학생들은 찢어진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선호했다. 여학생들은 디스코 바지를 입거나 풍성한 투피스를 입었고 마린룩을 입는 예쁜 여학생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컬러TV의 등장으로 형형색색 강렬한 컬러의 패션이 대중화되었고 청바지 밑단은 두 번쯤 접어주는 센스, 두둑한 어깨 패드를 넣은 재킷이 유행했다. 여자들의 패션 아이콘은 민해경과 김완선, 황신혜. 남자들의 패션 아이콘 소방차와 박남정. 남자들은 동그랗게 말아 올린 앞머리와 무스로 가르마를 탄 하트 모양의 머리가 유행했고, 여자들은 짧게 자른 단발머리와 앞머리와 옆머리를 띄운 닭벼슬 머리가 유행했다. 또 큰 헤어밴드와 큰 사이즈의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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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7080세대
4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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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iokjh

2013.05.13

그 때의 아날로그적 감성...조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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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ager7

2013.03.31

정말 옛날 생각나네요. 난 76년생인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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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쿠키

2013.03.31

삐삐도 없는 시절 추억의 공중전화가 있었죠..ㅎㅎ 공중전화로 폰팅했던 어릴적 기억도 나네요..돈없으면 계속 100원씩 넣었던 기억도요..ㅎㅎ;http://twtkr.olleh.com/ley2525/status/318220398518992898 [트위터 공유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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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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