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대해 글을 쓰려 하니 문득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여전히 내 말을 듣지 않으신다. 고집을 피우며 당신 주장대로 한다는 게 아니라 당신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나도 말하는 것을 참 좋아하지만 엄마 또한 징글맞을 정도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에겐 둘 다 청취 기능이 없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가 있는 법. 평소 내 이야기를 듣지 않다가도 괴력이라 할 만큼 집중력을 발휘하실 때가 있다. 내가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하거나 투정을 부리려는 찰나는 귀신같이 포착하신다. 그 순간부터 “이노무 자슥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이 시작된다. 초등학생 때는 우리 엄만 혹시 계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몇 번 있다. 단적인 예로, 비가 오는 날 엄마는 단 한 번도 학교로 우산을 가져다준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비를 맞고 들어갔더니 “와 우산 안 가지갔노?” 하며 도리어 화를 내셨다. 하긴 조금이라도 비가 올 것 같으면 우산을 가져가라고 미리 말씀하시긴 했다. 아열대 지역에서 살았더라면 나는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스콜이 쏟아질 때마다 비 맞은 생쥐꼴이 되었을 테니까. 훗날 내가 그 얘길 하면서 계모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모면 우산 갖다 줬제. 친엄마니까 그리 안 한기라.” 그 말에 내 큰 입이 더 벌어졌다.
연세가 일흔다섯이나 되셨는데도 엄나는 여전히 부녀회나 경로당 잔치 등 동네 대소사에 직접 관여한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우리 집은 늘 동네 사람들로 붐볐다.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를 떠는 곳임은 당연하고 면장, 어촌계장, 그리고 어촌계장 선거에서 네 표 차로 낙선한 동네 아저씨, 농협 조합장까지 우리 집을 단골로 삼아 미역과 파도와 나라 걱정을 했다.
시골집 안방에서 TV를 보다 보면 거실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이 자연스럽게 들리곤 했다. 동네 아저씨가 찾아와서 마누라와 대판 싸웠다며 울며불며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30분 넘게 그 아저씨를 달래고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갑자기 “근데 와 우리 집에 와서 이라노? 니 집에 가라. 빨리 가라!” 하고 쫓아내셨다. 그러실 거면 처음부터 받아주지를 말든가 말이다.
또 엄마는 무엇보다 비밀 관리에 능숙하다. 언젠가 한 아주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 것 같다며 엄마에게 비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거 비밀인데예”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자 엄마는 “아이고, 내는 비밀이면 안 들을란다”라고 말을 잘랐다. 그래도 그 아주머니는 엄마가 제일 든든했는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결혼식도 올리기 전 손주를 보게 생겼다는 그 아주머니의 고민을 들어주고, ‘예비 며느리 출산 후 부기가 빠진 다음에 식 올리면 된다’는 명쾌한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비밀을 지켜달라는 그 아주머니의 말에 이렇게 받아치셨다. “그래 알았다. 비밀이제, 비밀. 근데 장담은 못하겠다. 마 동네 사람 내일쯤 되면 절반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라.” 그 아주머니가 “형님 와 이라십니까?” 하자 엄마는 “처음에 내가 뭐라 하더노? 비밀 이야기 안 듣는다 안 하드나? 이 이야기 난 안 듣는다 하는데 니가 했다 아이가” 하며 아주머니를 놀리는 것이었다. 그 뒤로 나도 한 번씩 써먹곤 한다. “이거 너한테만 하는 얘긴데” 또는 “이거 진짜 비밀인데”라고 누가 운을 떼면 “어? 난 비밀이면 안 들을래” 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대부분 상대방은 놀라는 기색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내가 오히려 믿음을 주는지 유독 나에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들이 많다.
엄마는 에너지와 유머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하루는 고향 집에 갔다가 다음 날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영철아, 내일 몇 시 비행기고?” 하고 물으셨다. 내가 열 시 비행기라고 대답하니 혼자 중얼거리며 “아홉 시 전에는 나가야 하니 여덟 시에 깨우면, 씻고 여덟 시 반에 밥 먹고, 알았다. 여덟 시에 깨우마.” 하고 당신 방으로 가셨다. 그러다 오후쯤 되니 확인을 하시려는지 아니면 시간을 잊어버린 것인지 비행기 출발 시간을 다시 물으셨다. 나는 귀찮은 내색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주말연속극을 보고 주무실 때쯤 되었을까, 엄마가 또 시간을 물으셨다. “영철아, 내일 몇 시 비행기라고?” 나는 “열 시 비행기라 안 하드나? 엄마, 내가 몇 번 말하노? 아, 진짜” 하고 좀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도 엄마한테 너무 언성을 높인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웃으며 답하셨다. “내가 오늘 세 번 안 물어봤나.”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엄마는 늘 당신이 즐겁거나 누군가를 즐겁게 하는 모습이었다. 몇 해 전 그런 엄마에게 엄마도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때가 있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와 안 힘들겠노? 살다 보면 죽고 싶은 날도 있고 비가 오면 갑자기 눈물도 나고 사는 게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제. 너희도 키워야 하는데 돈은 없지, 빌린 돈은 갚아야지, 마 내일 생각하면 까마득하고 그런 날도 많았다 아이가. 근데 엄마는 그런 힘들고 슬픈 감정이 몇 분 안가더라이. 너네 이모 막순이한테 전화가 와서 오늘은 미역 광주리 많이 채웠다 카먼 기분 좋아 다 까묵고, 또 비 오는 것 보고 우울하다가도 빨래 걷어야 하는데 싶어서 빨래 걷고 나면 까먹드라. 그리고 우리 집에 사람들 좀 놀러 오나? 누구랑 이야기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고, 뭐 그러다 보니 이래 됐다.” 엄마의 대답은 놀라웠다.
하긴 이런 면은 나에게도 있는 것이었다. 내가 A형이라 전형적인 속 좁은 사람으로 찍혀 있지만 사실 나는 잘 잊어버리고 지나칠 정도로 밝은 면이 많다. 박미선 선배가 이런 나를 두고 우스갯소리로 “우리 영철이 또 조증 시작됐다”라고 놀리기도 했다. 하루는 어느 프로그램에 출연한 의사분에게 내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정말 조증이 맞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분의 대답은 조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무섭게 할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는 것이라 했다. 간혹 <강심장>에서는 출연자들이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지을 때가 있다. 한 번은 누가 “영철이 너는 저런 이야기 있어? 넌 아픔이 없지?” 그랬는데, 내가 곰곰 생각하다 “왜 없겠어. 아버지 얘기 한판 해?”라고 말해 다들 웃곤 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내가 엄마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내 앞에선 그러시지만 혼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지. 그 눈물을 닦고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할 때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졌을까. 누구에게나 말 못할 상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 상처는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아문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시종일관 안 좋은 이야기만 꺼내놓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다간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갈 것이다. 어지간한 고민이라면 우선 혼자 해결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친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고민이 다 해결되면 여러 사람 앞에서 그것을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이 좋다. 마음의 상처도 몸의 상처와 같다. 고민이 다 해결된 후에 여러 사람에게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처가 아문 후에 새 살이 나는 것과 같다.
나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를 고등학교 2학년 이후로 만나지 않았다. 군에 입대한다고 해서 잠깐 찾아뵌 것이 전부다. 어려서부터 나는 유독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아버지가 싫었고 아버지만 오시면 경직되는 집안 분위기가 두려웠다. 부모님의 이혼 후에는 아버지를 만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 아버지의 기억은 기억대로 또 현재 아버지의 부재는 부재대로 나에게 하나의 트라우마로 똬리를 틀었다. 어느 방송에 게스트로 나온 정신과 의사분과 방송국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살면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시간보다 짧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을 뱉고 보니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뜨겁게 맺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서른여섯 살이 되던 3년 전,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서른여섯은 아버지가 나를 낳아주실 때의 나이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계신다는 부산으로 가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은 원망이라기보다 너무 늦게 찾아가는 데 대한 반성에 가까웠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아버지에게 용서라는 말을 써도 될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내내 발걸음을 붙들었다.
아버지를 만난 나는 짧지만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곧 울음을 그치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끌어온 부자간의 화해가 이렇게 쉽게 끝이 나다니. 나는 기쁜 마음에 도리어 억울함까지 느껴졌다. 역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논리적이고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것 같다. 내 유년의 기억과는 달리 아버지는 의외로 말수가 많으셨다. “이영자랑 사귀노? 송은이는 어떻노?” 식의 뜬금없는 질문도 많이 하셨다.
그 이후로 아버지께는 종종 안부전화도 드리고 시간을 내어 찾아뵙기도 한다. 강호동 형은 아버지와 화해를 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영철아, 너는 아버지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 거야”라는 가슴 뭉클한 말을 해주었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고 슬픈 기억을 꺼내보는 것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 일을 다시 생각해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결국 기쁘고 행복한 일로 만드는 것. 당신도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다. 분명 ‘시간’이 당신을 줄곧 응원해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에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일단, 시작해 김영철 저 |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이루고자 하는 꿈과 삶의 목적을 위해 꾸준히 배움의 길을 걸어온 김영철이 20~30대 젊은이들에게 전해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삶의 우여곡절이나 대단한 서사라고 할 만한 게 담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혜안과 그가 읽었던 책의 교훈과 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공부했던 흔적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배움이고 학습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배운 것들을 독자들에게 나눠주고자 한다.
김영철
1974년 울산 출생으로, 동국대 호텔경영학과 경주 캠퍼스를 졸업하고 1999년에 KBS 14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초등학교 시절, 고향 근처의 고리 원자력 발전소에 출장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상대로 ‘Hello, Mr, OK’ 단 세 단어로 당차게 영어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후 중학교 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영어 실력이 초중급 언저리를 왔다갔다 하면서 자신감마저 상실하고 외국인만 만나면 수줍고 침묵하는 성격으로 변했다.
서른이 넘어서야 영어 굴욕 사건과 몬트리올 코미디 페스티벌에서 발견한 꿈을 계기로 영어 공부에 사활을 걸게 되었다. 새벽부터 강남 영어 학원가에서 발품을 팔며 각고의 노력 끝에 입을 뚫고 잃어버린 영어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5년에는 영어 채널인 아리랑 라디오 프로그램의 영시 소개 코너에서 게스트로 활동했으며, 2006년 3월부터 계원조형예술대학교에서 교양 과목인 ‘기초 영어 초급’ 강의를 하고 있다. 또한 바쁜 와중에도 여러 대학에서 영어 특강을 하는 등 방송과 영어 교육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특히 2005년부터 MBC 라디오 ‘정오의 희망곡’에서 ‘영철영어’ 코너를 진행하면서 쉽고 재미있게 배우는 생활영어 전도사로 맹활약 했다. 지금은 라디오 ‘김영철의 펀펀 투데이’를 진행하며 사람들에게 즐거운 영어를 알리고 있다. 또한 그간 갈고 닦아온 영어실력을 바탕으로『치즈는 어디에?』라는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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