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간 글쟁이로 살아온 김윤덕 기자가 삶의 쓴맛과 단맛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칼럼 ‘줌마병법’을 엮어 또 한번 책으로 냈습니다. “시대의 밑바닥을 온몸으로 살아낸 무명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를 전국 팔도에서 실어 온 구수한 입말로 전하는 넉살과 유머의 에세이.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을 인터뷰하면서도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고 말하는, 김윤덕 기자를 만났습니다.
‘언론고시’를 보지 않은 기자
34년 동안 기자 생활을 하고 계세요.
대학 졸업 전인 1991년부터 『월간 샘터』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95년도에 <경향신문>으로 이직해 7년을 근무했어요. 그리고 월드컵이 있던 2002년에 <조선일보>로 옮겨 20년 넘게 다니고 있네요. 남들이 말하는 ‘언론고시’를 안 보고 언론인이 된 거라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고,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하다 보니 기회가 온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지난 10월 제41회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상하셨죠. 한국 최초의 여성 기자가 만든 상인 만큼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최은희 기자는 민간 신문 최초 여성 기자로, 독립운동도 하고 여성운동도 하신 분이에요. 제가 문화부 여성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매년 최은희 여기자상 시상식 기사를 썼는데 내심 ‘나도 나중에 저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동경했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대특종 기자나 종군기자, 스타 기자들이 받는 상이었으니까요. 이번에 낸 책 『오늘, 아내가 사라졌다』 서문에도 쓴 것처럼 친구가 ‘네 팔자엔 글월 문(文)자만 세 개’라고 해서 밥이나 벌어먹겠냐고 우스갯소리 했던 기억이 나는데, 막상 최은희상을 받고 보니 내가 정말 글밥을 먹고 평생을 살려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은희라는 이름에, 그리고 후배 여기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언론인이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시상식 취재 열기도 뜨거웠는데, 국내 최초로 노벨상 시상식 취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2009년 스웨덴 연수를 할 때 취재할 기회를 얻었어요. 매년 10월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고, 12월 10일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나머지 주요 부문 상을 시상하고 만찬을 여는데, 스톡홀름 현지 교민들의 도움을 받아 취재 기자 명단에 오를 수 있게 됐죠. 그런데 막상 시상식에 가니까 우리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취잿거리가 너무 없는 거예요. 그나마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었는데, 그분마저도 너무 바빠서 스톡홀름 만찬에 들렀다 가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회사에는 한국 기자 최초로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을 취재한다고 큰소리 쳐놨는데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하나 난감해지더군요(웃음). 그래서 제가 옆에 앉은 스웨덴 왕립연구원 경제학자에게 물었어요. 세계적인 노벨상 시상식에 왜 유럽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재벌들이 오지 않았느냐고요, 사르코지와 메르켈만 와도 흥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자 그 학자가 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그 사람들이 여기를 왜 오느냐’고 반문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노벨상 만찬은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학문을 고집해온 학자와 그 가족들을 축하하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완전히 감동했어요. 그날 만찬 가격이 36만원 정도였는데, 아무리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라도 마음대로 올 수 없는 곳이 노벨 만찬장이었죠. 순간 무릎을 치며 ‘이거다!’ 했습니다(웃음).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학문을 숭상하고 학자들을 존경하는지 절감했고, 이를 주제로 기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무도회에도 가야 하지 않느냐는 경제학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기사를 마감하러 곧장 집으로 달려갔어요. 드레스도 없어서 임신 4개월 때 입은 까만 벨벳 원피스를 입고 갔었는데, 얼른 벗어던지고 밤새워 기사를 썼지요. 한국으로 초고를 보내고 쓰러져 자고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제 기사가 1면으로 간다고요.
거물급 정치인부터 유명 예술가, 기업인 등 다양한 분들을 인터뷰하셨더군요. 그럼에도 유독 애정을 품고 있는 대상은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0년 넘는 기자 생활 동안 최소 1000명 이상 인터뷰한 것 같아요. 훌륭한 명사들의 성공 신화도 감동적이었지만, 평범한 사람들, 필부필부가 생생한 입말로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도 그에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더라고요. 그래서 꽁트식 에세이 ‘줌마병법’을 쓰기 시작했고, 조선일보에서 가장 오래된 칼럼 중 하나로 사랑받게 됐습니다. 기자 생활을 『월간 샘터』에서 일했던 영향도 있을 거예요. 저는 그곳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길렀다고 생각하거든요.
문학적 감수성이요?
당시 『월간 샘터』 데스크들이 모두 정채봉 동화 작가, 박몽구 시인 같은 문인들이었어요. 꼬마 기자로 제가 담당했던 필진이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님, 최인호 작가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겐 너무나 큰 스승들이었죠. 그분들에게 문학적 글쓰기와 인터뷰하는 방식을 배운 것 같아요.
문인들에게 취재 방식을 배웠다는 점은 새롭습니다.
『월간 샘터』에 있을 때 첫 인터뷰이가 동두천 기지촌에서 혼혈아들을 돌보는 목사님이었어요.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오니까 정채봉 부장이 저보고 취재를 제대로 하고 왔는지 체크를 하셨어요. 저는 그분의 훌륭한 업적을 말씀드릴 참인데, 정채봉 부장은 의외의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그의 사무실 벽에 어떤 사진이 걸려 있었냐, 그의 버릇이 뭐냐, 댓돌에 신발 몇 켤레가 있더냐, 이런 것들이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정채봉 부장 왈, 인터뷰는 그 사람이 하는 말만 듣고 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환경까지 살피고 와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야말로 문인들은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도 예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느꼈지요. 『월간 샘터』에서 문학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는 훈련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게 밑바탕이 돼 신문사로 옮겨와서도 저만의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독창적인 글쓰기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언론고시를 통해 기자 생활을 시작했더라면 세심한 부분, 디테일이 살아 있는 글을 쓰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제 글이 일반 신문 기사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처음 신문사로 이직하고 나서는 전형적인 신문 기사를 뒤집는 식으로 글을 써서 혼나기도 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실험이 재미있었고, 나중에는 독자들도 좋아하셨죠. 어떻게 보면 조선일보 장수 칼럼 중 하나인 ‘줌마병법’도 그렇게 출발한 것 같아요.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있는 목소리
‘줌마병법’은 소설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한 콩트 형식의 독특한 칼럼이더라고요. 일간지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어요.
시작은 사실 소소해요. 당시 문화부장이 여성이었는데 일하면서 아이 키우는 에피소드를 생활 칼럼으로 써보라고 하셨어요. 그때 첫 애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한 때라 엄마 숙제가 많아 제가 징징 울면서 회사에 다녔거든요. 그런데 부장이 뭘 써도 좋지만 징징거리지 말고 재미있게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줌마병법’을 코믹 콘셉트로 잡았고, 팩트에 상상력을 가미해 콩트식으로 쓰기 시작한 거죠. 아줌마들이 또 워낙 웃기잖아요. 고달픈 인생을 풀어가는 그들의 넉살과 해학, 유머를 충분히 담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편집국장이 이런 칼럼을 꼭 써야 하냐고 하셨다던데 저희 부장이 책임은 자기가 질 테니 계속 써보라고 응원해주셨죠. 2009년 스웨덴 연수 가기 전까지 쓴 줌마병법은 『우리는 모두 사랑을 모르는 남자와 산다』라는 책으로 나왔고, 1년 연수가 끝나고 돌아와서는 ‘新(신)줌마병법’으로 다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이번 책 『오늘, 아내가 사라졌다』는 ‘신줌마병법’을 묶은 거죠? 이전 ‘줌마병법’과 다른 점은 무엇이었나요?
‘줌마병법’ 때는 제 또래 여성들 이야기를 주로 했어요. 그런데 저도 나이가 들고 마흔이 넘으니까 주변의 남자들, 아저씨들의 애환이 보이더라고요. 제가 홍일점인 부서에서 남자 기자들의 푸념과 한탄을 들어보니 그들 나름의 고민과 분투가 있고, 그래서 안쓰럽기도 했고요. 덕분에 ‘신줌마병법’은 아버지, 남편, 아들 등 남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담게 됐습니다. 역지사지라고 할까요? 그러다보니 독자층도 확 늘었고, 피드백도 급증했습니다. 어떤 독자분은 왜 본인 가정사를 허락도 안 받고 쓰냐고 항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어요(웃음).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사는구나 생각했죠.
사투리나 입말을 글로 쓰는 게 특히 인상적이에요.
살아있는 입말이 너무 좋아요. 생활 속에 배어 있는 언어가 진짜 언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사투리를 좋아해요. 대학 시절에는 『태백산맥』이나 『혼불』을 열심히 읽으면서 전라도 사투리에 매료됐고, 제 고향인 충청도와 남편 고향인 경상도 사투리도 좋아합니다. 서울 표준말에는 없는 유머와 해학, 정이 담겨 있달까요. 제가 시어머니에게 마음을 열게 된 계기도 ‘단디’라는 말 때문이었어요. 임신했을 때 출근하려고 현관 밖을 나서면 어머니께서 “단디 다녀오니라” 하셨거든요. ‘단디’라는 그 말이 참 예쁘고 따뜻했습니다.
입말을 글로 옮기는 게 쉽지 않죠. 자칫하면 어색하고요. 사투리를 현실감 있게 글로 구사하는 비결이 있을까요?
녹음이죠(웃음). 물론 허락을 받고요. 사투리를 활자로 적는 게 쉽지 않은데, 최대한 입말 그대로 살리면서 리드미컬하게 쓰려고 노력하죠. ‘무교동 횟집의 비밀병기를 아십니까?’는 제가 줌마병법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칼럼인데요. 원래는 다른 칼럼을 준비했다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기 이야기를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와 급히 바꾼 거였죠. 글에 나오는 횟집은 무교동 ‘신성’이라고 하는 곳인데 정계 인사들의 오랜 단골집이에요. 그런데 그곳에 ‘전무’라는 직함을 단 여성 직원분이 전라도 사투리로 어찌나 맛깔나게 구사하는지 혼을 쏙 빼놓더라고요. 언젠가 저 분을 꼭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싶었는데 그날 다짜고짜 쳐들어가 인터뷰를 하게 된 거죠. 독자들 반응도 좋아서 그 식당이 한동안 미어터졌다고 들었어요(웃음). 회사내 호남 출신 기자들이 어떻게 전라도 사투리를 잘 구사했냐고 묻던데,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지요. 기자의 기본은 역시 ‘귀명창’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맛깔나는 입말에 매콤한 중년의 유머와 해학이 더해지니 판소리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도 잘 몰랐는데 제가 글을 쓸 때 운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더라고요. 산문을 쓰면서도 자꾸 단어를 줄이고, 글자 수를 맞추려고 하는 거예요. 리듬감 때문에. 다 쓴 글을 입으로 소리내 읽으면서 걸리는 게 있으면 고치고 또 고치는 식으로 운율을 맞추고 있었죠. 그리고 해학, 풍자, 넉살을 버무려 글맛을 내려고 노력해요. 그래야 제 마음에도 들고. 써놓고 다음 날 다시 읽어보고 재미없으면 탈고할 때까지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이죠. 그래야 독자가 한 쾌에 지루해하지 않으면 읽을 수 있을테니까요..
신문사 관점에서는 매우 실험적인 글쓰기 방식이었을 것 같아요.
<경향신문>에서 일할 때 인터뷰 한 바닥을 질문 하나도 없이 사투리를 그대로 살린 답변으로만 쓴 적이 있어요. 주니어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제정신이었나 싶어요(웃음). 그래도 저의 실험을 데스크가 받아준 거죠. 90년대 후반 신문 업계에 섹션 바람이 불었던 영향도 컸어요. <경향신문>의 문화섹션 ‘매거진 X’가 가장 센세이셔널 했죠. 언론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만큼요. 가장 대표적인 게 커버스토리인데, 첫 주인공이 그룹 룰라였어요. 대통령도 광고없이 전단으로 인터뷰하는 시절이 아니었는데, 그때 매거진 X가 엄청난 도전을 한 거죠. 그런데 그런 실험이 X세대의 대중문화 부흥기와 맞물려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신문의 문법까지 바꾼 전환점이 된 겁니다.
단편소설이랑 시집을 늘 들고 다니면서 읽으셨다고요.
요즘엔 넷플릭스에 빠져 있어서 반성 중이에요.(웃음) 한창 글을 많이 쓰고 더 잘 쓰고 싶어서 노력할 때는 시집, 단편소설을 엄청나게 읽었어요. 후배들이나 기자 준비생들에게도 지하철에서 핸드폰 보지 말고 시집이나 소설을 읽으라고 충고해요. 특히 한국 단편소설을 권하죠. 시적 산문의 리듬감, 스토리라인을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창비에서 나온 ‘20세기 한국 소설’이라는 50권짜리 전집은 글쓰기 공부에 아주 훌륭한 교과서죠. 특히 이 전집은 책 뒤편에 낱말 풀이가 부록으로 따로 나와요. 기자는 물론 글을 쓰는 이들에겐 우리말 어휘를 늘릴 수 있게 해주는 책자죠. 요즘은 스토리 시대라 소설을 많이 읽으면 신문 기사를 쓸 때도 큰 도움이 돼요. 이번에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는 샘터에서 함께 기자로 일한 적도 있는데, 그 친구의 인터뷰를 보면서 반성했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2시간씩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그런 자극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타인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누구인가요?
부암동에 100세가 넘는 할머니가 하시던 손만두집이 있었어요. 그분을 인터뷰하면서 역대 대통령 중에 누가 가장 좋았냐는 질문을 했어요. 그때가 2011년이니까 할머니는 고종 때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본 거예요(웃음). 할머니의 대답이 궁금해서 기다렸는데, 그 분 하시는 말씀. ‘내가 그분들을 가까이에서 겪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평가할 수 있겠어요.’ 순간 허를 찔린 듯,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할머니 말씀이 사실이니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알고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지요. 저도 인터뷰를 3~4시간 진행하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 만난 사람을 제가 과연 제대로 독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어요. 선배들 중에서는 20분만 만나면 그 사람을 다 파악할 수 있다는 분도 있었지만, 저는 10시간을 만나도 모를 것 같거든요(웃음).
좋은 인터뷰란 무엇일까요?
인터뷰를 읽는 독자의 앞에 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생생한 인터뷰요. 인간 대 인간으로 체온이 느껴지면서 진솔한 대화를 한다고 느껴지는 인터뷰. 저는 인터뷰이와 관련된 중요 이슈도 물어보지만 사소한 질문도 많이 해요. 인간적인 면을 느끼게 하고 싶어서. 사실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잖아요(웃음). 별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고 싶어 독자들과 접점이 있는 일상적 질문들도 많이 하지요.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요?
질문이 좋아야 해요. 좋은 질문을 하려면 상대에 대해 미리 연구하고 관련 책이나 자료를 읽고 가야 하죠. 1차원적 질문을 하면 깊이 있고 재미있는 답변이 나오기 힘들어요. 예전에 현각스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막상 만나 보니 기존에 나온 기사들에서 느꼈던 점잖고 거룩한 스님이 전혀 아니었어요. 사투리를 거침없이 쓰고 욕도 잘하고 성격도 쾌활한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죠. 그래서 제가 본 그대로 생생한 인터뷰를 쓴 뒤 팩트 체크를 위해 초고를 보내 드렸더니 스님이 무척 당황하시는 거예요. 자기를 거룩하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웃음). 막상 기사가 게재됐을 땐 좋아하셨지만요. 인터뷰는 그 사람을 편협한 틀에 가둬놓고 바라볼 게 아니라 가능한 있는 그대로 독자들이 느낄 수 있어야 좋은 인터뷰인데, 그러려면 정석에 해당하는 질문 외에도 다양하고 엉뚱한 질문들을 많이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뜻밖의 명언을 건질 수 있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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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슬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