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 음성메시지로 사랑의 세네나데를 부르던 시절
어쩌면 ‘진정 90년대적인 어떤 것’은 삐삐와 공중전화와 pc통신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최첨단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에 지쳐버린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라나는 서글픈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90년대적인 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는 무엇일까.
201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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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힘들고 지칠 때면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준 너의 전화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꽃다지의 <전화카드>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노래를 고3때 처음 들었다. 그때만 해도 전화카드는 참 센스 넘치는 선물이었다. 3천원짜리 전화카드 한 장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했던 시절이었다. 삐삐가 막 유행하기 직전, 여전히 집전화를 엿듣는 부모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나만의 은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건 공중전화박스였던 것이다.
90년대 중반에 대학생이 된 나에게 이 노래를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지극히 수줍은 젊은이의 사랑 고백이다.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촌스럽게 연애편지를 쓸 수도 없고, 전화카드 한 장을 주며 ‘언제라도 힘들고 지칠 때면 전화해’라고 속삭이는 수줍은 청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공중전화를 붙잡고 3분이나 떠들 수 있는 자유를 ‘겨우 20원’으로 누릴 수 있던 시절의 일이다. 대학교 식당의 멀쩡한 식사 한 끼가 900원이던 시절. 하루용돈 5000원이면 떵떵거리면서(?)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던 시절의 일이다.
아직 휴대폰이 상용화되기 이전, 삐삐는 우리들의 최첨단 통신기기였다. 지우개만한 크기의 앙증맞은 기계에 우리의 사연을 차곡차곡 암호화해서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1004(천사)’, ‘8282(빨리빨리)’, ‘1010235(열렬히 사모)’ ‘1772(me)’ 등의 삐삐용 암호는 전혀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연락받고자 하는 전화번호를 그냥 찍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직 숫자만으로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삐삐용 암호’야말로 절친이나 연인끼리의 ‘배타적인 친밀감’을 표현하는 확실한 의사소통방식이었다.
삐삐 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길게 늘어선 공중전화 대기행렬이다. 90년대, 우리들은 지금보다 훨씬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던 것 같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할 때 2010년대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멀티미디어로 활용하여 각종 오락을 즐긴다. 휴대폰으로 TV나 영화도 즐기고, 게임도 즐기고, 거리낌 없이 셀카도 찍는다.
하지만 그땐 공중전화의 차례가 오기를 고대하면서, 사람들은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 너무 길게 통화하는 앞사람을 향해선 살짝 눈을 흘기기도 했지만, 은근히 앞사람의 간지러운 통화내용을 엿듣기도 하면서 웃음을 참기도 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쉽게 취소하거나 미룰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약속을 잘 지켰고, 나를 기다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만 상황이 틀어지면 냉큼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약속 취소’를 할 수 있는 요즘과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마음마저 쉽게 ‘모바일 마인드’로 만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쉽게 약속을 미루고, 취소하고, 가벼이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또 하나 그리운 것은 삐삐의 음성메시지다. 휴대폰의 컬러링이 보통 음원을 구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반면, 당시 삐삐의 ‘인사말’은 본인이 직접 녹음한 아날로그 음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인사말을 녹음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이성친구를 위해 들려주고 싶은 고백의 노래를 녹음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 또한 멋진 인사말을 만들기 위해 집에 있는 피아노로 직접 연주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번이나 녹음했다가 지우고 다시, 좀 더 어여쁜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땀 흘렸던 기억. 지금 생각해보면 낯 뜨겁지만,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생목소리로 귀청이 떠나갈 듯 노래를 불러주는 남자친구도 있었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그게 진심이라는 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천진함.
그 대책 없는 순수를 서로가 거리낌없이 받아줄 수 있었던 건 삐삐의 음성 메시지가 ‘일방적’이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녹음하지만, 상대방은 ‘한참 후에’ 내가 없는 자리에서 혼자서 내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삐삐 음성메시지는 불가피하게 독백을 자극했고, 순정한 고백의 무대를 마련했던 셈이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은 이와 달리 항상 즉각적이고, 쌍방향적이며, 핑퐁처럼 빠른 리액션으로 상대방의 자극을 유도한다. 누군가에게 지금 당장이 아닌 나중에 들을 수 있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 상대방의 즉각적인 반응에 대한 걱정을 털어내고, 일단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기자신을 향해 독백을 하는 형태로 내 마음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삐삐의 음성 메시지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지금 즉시’가 아니라, 언젠가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90년대적인 것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바로 pc 통신이다. ‘atdt 01410’을 누르면 ‘삐릭삐릭’하는 전화버튼 소리가 울리며 새파란 하이텔 통신 화면이 펼쳐지곤 했다. 생각해 보면 pc 통신은 사람을 참 용감하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각종 모임을 내가 직접 주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모임이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보다는 많아야 4명 정도인 소규모 모임을 선호한다. 그런데 pc 통신에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채팅방’을 만들어 거침없이 수다거리를 찾아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수 김광석의 죽음 소식을 접하던 날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김광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테마로 pc 채팅방을 만들었고, 그날 엄청난 수의 손님들이 나의 방을 방문했다. 아마 그날은 그런 채팅방이 전국에 수백 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면부지의 타인을 향해 무한한 ‘열림’의 순간을, ‘깨임’의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 바로 pc 통신 채팅방이었다. ‘귓속말’ 기능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의 수다조차도 그때는 순박했다. 자신이 ‘진짜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진정 90년대적인 어떤 것’은 삐삐와 공중전화와 pc통신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최첨단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에 지쳐버린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라나는 서글픈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90년대적인 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그때 우리는 푸르른 20대였다는 것, 조금은 쑥스럽고 때로는 낯뜨겁지만, 그땐 그렇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백’하고 싶었던, 늘 불에 덴 것 같은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90년대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나’라는 것이 그토록 소중하다는 것, 집단보다 개인의 욕망과 정서가 우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토록 소중한 ‘나’를 발견한 순간, 우리는 그토록 외로운 자신을 발견했고, ‘나’의 발견과 함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담론은 바로 ‘소통’이었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된 지금, 사람들은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었다. 편리한 스마트폰만으로 혼자 즐길 수 있는 오락이 정말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의 추억들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누군가 ‘함께’였던 것 같다. 90년대를 향한 노스탤지아, 그것이 진정 소중한 이유는 우리가 ‘함께’였던 시절에 느낀 타인의 온기를 변함없이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90년대 중반에 대학생이 된 나에게 이 노래를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지극히 수줍은 젊은이의 사랑 고백이다.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촌스럽게 연애편지를 쓸 수도 없고, 전화카드 한 장을 주며 ‘언제라도 힘들고 지칠 때면 전화해’라고 속삭이는 수줍은 청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공중전화를 붙잡고 3분이나 떠들 수 있는 자유를 ‘겨우 20원’으로 누릴 수 있던 시절의 일이다. 대학교 식당의 멀쩡한 식사 한 끼가 900원이던 시절. 하루용돈 5000원이면 떵떵거리면서(?)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던 시절의 일이다.
아직 휴대폰이 상용화되기 이전, 삐삐는 우리들의 최첨단 통신기기였다. 지우개만한 크기의 앙증맞은 기계에 우리의 사연을 차곡차곡 암호화해서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그리고 ‘1004(천사)’, ‘8282(빨리빨리)’, ‘1010235(열렬히 사모)’ ‘1772(me)’ 등의 삐삐용 암호는 전혀 촌스럽거나 어색하지 않게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연락받고자 하는 전화번호를 그냥 찍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직 숫자만으로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 ‘삐삐용 암호’야말로 절친이나 연인끼리의 ‘배타적인 친밀감’을 표현하는 확실한 의사소통방식이었다.
삐삐 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길게 늘어선 공중전화 대기행렬이다. 90년대, 우리들은 지금보다 훨씬 기다리는 일에 익숙했던 것 같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할 때 2010년대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멀티미디어로 활용하여 각종 오락을 즐긴다. 휴대폰으로 TV나 영화도 즐기고, 게임도 즐기고, 거리낌 없이 셀카도 찍는다.
하지만 그땐 공중전화의 차례가 오기를 고대하면서, 사람들은 그냥 기다리기만 했다. 너무 길게 통화하는 앞사람을 향해선 살짝 눈을 흘기기도 했지만, 은근히 앞사람의 간지러운 통화내용을 엿듣기도 하면서 웃음을 참기도 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쉽게 취소하거나 미룰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약속을 잘 지켰고, 나를 기다리는 상대방의 고통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만 상황이 틀어지면 냉큼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약속 취소’를 할 수 있는 요즘과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마음마저 쉽게 ‘모바일 마인드’로 만든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쉽게 약속을 미루고, 취소하고, 가벼이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또 하나 그리운 것은 삐삐의 음성메시지다. 휴대폰의 컬러링이 보통 음원을 구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반면, 당시 삐삐의 ‘인사말’은 본인이 직접 녹음한 아날로그 음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인사말을 녹음하는 경우도 다반사였고, 이성친구를 위해 들려주고 싶은 고백의 노래를 녹음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 또한 멋진 인사말을 만들기 위해 집에 있는 피아노로 직접 연주를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번이나 녹음했다가 지우고 다시, 좀 더 어여쁜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땀 흘렸던 기억. 지금 생각해보면 낯 뜨겁지만,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생목소리로 귀청이 떠나갈 듯 노래를 불러주는 남자친구도 있었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그게 진심이라는 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천진함.
그 대책 없는 순수를 서로가 거리낌없이 받아줄 수 있었던 건 삐삐의 음성 메시지가 ‘일방적’이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녹음하지만, 상대방은 ‘한참 후에’ 내가 없는 자리에서 혼자서 내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삐삐 음성메시지는 불가피하게 독백을 자극했고, 순정한 고백의 무대를 마련했던 셈이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은 이와 달리 항상 즉각적이고, 쌍방향적이며, 핑퐁처럼 빠른 리액션으로 상대방의 자극을 유도한다. 누군가에게 지금 당장이 아닌 나중에 들을 수 있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 상대방의 즉각적인 반응에 대한 걱정을 털어내고, 일단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마음을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기자신을 향해 독백을 하는 형태로 내 마음을 고스란히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삐삐의 음성 메시지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지금 즉시’가 아니라, 언젠가는 나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90년대적인 것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바로 pc 통신이다. ‘atdt 01410’을 누르면 ‘삐릭삐릭’하는 전화버튼 소리가 울리며 새파란 하이텔 통신 화면이 펼쳐지곤 했다. 생각해 보면 pc 통신은 사람을 참 용감하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각종 모임을 내가 직접 주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모임이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보다는 많아야 4명 정도인 소규모 모임을 선호한다. 그런데 pc 통신에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채팅방’을 만들어 거침없이 수다거리를 찾아내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처럼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수 김광석의 죽음 소식을 접하던 날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김광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는 테마로 pc 채팅방을 만들었고, 그날 엄청난 수의 손님들이 나의 방을 방문했다. 아마 그날은 그런 채팅방이 전국에 수백 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면부지의 타인을 향해 무한한 ‘열림’의 순간을, ‘깨임’의 순간을 만들어준 것이 바로 pc 통신 채팅방이었다. ‘귓속말’ 기능을 이용해서 은밀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의 수다조차도 그때는 순박했다. 자신이 ‘진짜 외계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진정 90년대적인 어떤 것’은 삐삐와 공중전화와 pc통신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최첨단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에 지쳐버린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라나는 서글픈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90년대적인 것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그때 우리는 푸르른 20대였다는 것, 조금은 쑥스럽고 때로는 낯뜨겁지만, 그땐 그렇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고백’하고 싶었던, 늘 불에 덴 것 같은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90년대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나’라는 것이 그토록 소중하다는 것, 집단보다 개인의 욕망과 정서가 우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토록 소중한 ‘나’를 발견한 순간, 우리는 그토록 외로운 자신을 발견했고, ‘나’의 발견과 함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담론은 바로 ‘소통’이었다.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된 지금, 사람들은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었다. 편리한 스마트폰만으로 혼자 즐길 수 있는 오락이 정말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90년대의 추억들을 돌이켜 보면, 언제나 누군가 ‘함께’였던 것 같다. 90년대를 향한 노스탤지아, 그것이 진정 소중한 이유는 우리가 ‘함께’였던 시절에 느낀 타인의 온기를 변함없이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글을 쓴 정여울님은… 타칭 문학평론가, 자칭 글쟁이 또는 글순이.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여행과 음악을 짝사랑하는 사람. <한겨레신문>에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네필 다이어리1, 2≫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미디어 아라크네≫,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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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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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e78
2013.06.25
did826
2013.03.30
Joonghee0412
2012.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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