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대통령 당선? 상상할 수 없는 비극!
박종철이 죽었다. 긴장과 숨죽임 속에 맞은 1987년이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연초부터 다가온 폭풍의 조짐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 정부와 시민의 대결이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던 때였다. 한 젊은이의 충격적인 죽음.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와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대라고 물고문을 당하며 추궁 당하던 그였다.
201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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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은 물혹이다.
40대의 무거움을 생각한다. 나는 그리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마술 따윈 믿지 않는다. 40대 중반에 들어와, 문득문득 마음속에서 근심을 먹고 자라는 어떤 혹을 발견한다. 죽음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도 잦아졌다. 아직은 만져도 아프지 않고 말랑말랑한 양성 종양이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기보다는,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보고 비관과 고뇌에 휩싸인 척 엄살을 떠는 게 건강에 좋다고 보는 편이다. 혹을 달고 살더라도 말이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도 물혹, 아니 불혹을 발견한다. ‘어느 낮 소리 없이 다가온 불혹의 초조감’이라는 말이 불혹을 지나는 아들의 가슴을 관통하며 찌르르 소리를 낸다.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도 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 죄라고 하자. 까짓거, 그런 죄 쯤 짓고 살아도 좋다.
이 시는 불혹, 아니 부록에 해당하는 스크랩에 적혀있다. 아버지는 굵직굵직한 정치ㆍ사회 이슈와 관계된 신문기사들을 오려 26권까지 스크랩을 만들었다. 이를 ‘본 스크랩’이라 이름 붙여본다. 아버지는 여기에 담지 않은 문화나 스포츠, 종교 또는 화보와 시리즈기사들로 또 다른 스크랩을 만들었다. ‘부록 스크랩’이라 할 만 하다. 본 스크랩이 1959년부터 1992년까지 총 26권이라면, 이 부록 스크랩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총 11권이다. 위의 시는 그 부록스크랩에 실린 딱 한 편이다. 전체 11권 중 스포츠기사가 가득한 어느 한 권의 맨 앞에 적혀있다.
그림 속에선 병속에 갇힌 어떤 중년의 사내가 담배를 왼손에 끼고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다. 어느 신문에 나온 그림을 적당히 오려붙였으리라. 40대 후반이었을 아버지의 심정을 잘 대변했기 때문일까. ‘편견과 아집을 계수하는 고혈압’이란 말은 그림 속의 코르크 마개와 잘 어울린다. 코르크마개는 이중의 벽을 상징한다. 밥벌이와 생존이라는 굴레, 그리고 편견과 아집이라는 그물. 아, 저 병 속에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인지도 모른다.
불혹은 잠깐이었다. 아버지는 곧 지천명을 맞았다. 아버지가 지천명에 만든 ‘본 스크랩’을 편다. 1987년에서 1991년. 이제 스크랩도 종반을 향해 치달아간다. 제19권(1987년 1~6월), 제20권(1987년 7~12월), 제21권(1988년), 제22권(1989년), 제23권(1990년), 제24권(1991년)을 넘기며 각 권 맨 앞에 놓인 시를 만난다. 부록 스크랩과는 달리 본 스크랩에선 매번 ‘서시’를 남겨놓았다. 본 스크랩에 더 애착을 보인 증거일까? 그 시들을 곱씹으며 1987~1991년의 시대 풍경들을 감상해본다.
시 앞에 나오는 자유, 사랑, 진리…. 사랑은 복잡하다. 진리는 어렵다. 자유란 말이 개중 쉽다. 즉자적이고 현실적이다. 자유를 갈아 뭉개고 볶아 하나의 작품이 된다면, 그리하여 즐겁다면 웃으리라 감사하리라. 아버지의 말에 동감한다. 그러나 자유를 갈아 뭉개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 공포와 악몽의 괴작!
박종철이 죽었다. 긴장과 숨죽임 속에 맞은 1987년이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연초부터 다가온 폭풍의 조짐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 정부와 시민의 대결이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던 때였다. 한 젊은이의 충격적인 죽음.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와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대라고 물고문을 당하며 추궁 당하던 그였다.
박종철의 자유를 갈아 뭉개고 심상치 않은 여론의 화살 앞에 납작 엎드렸던 자들은, 곧 또 다른 자유를 빌미로 대대적 체제선전을 한다. 김만철의 자유.
김만철이 넘어왔다. 북한 청진의대병원 의사였던 김만철은 북한에서 50t급 청진호를 타고 일본ㆍ대만을 거쳐 한국에 왔다. 직계가족은 물론 장모ㆍ처남ㆍ처제까지 11명을 동반했다. 분단 이후 첫 대가족 단위의 보트피플 탈북사건이었다.
그가 1987년 1월15일 새벽 청진을 탈출해 일본 후쿠이현 미쿠니항에 도착한 것은 1월20일 오후. 박종철이 죽은 뒤 하루 지나서였다.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탈북자들을 인도해달라는 남한 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만철 일가는 제3국 망명을 희망해 대만으로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왔다. 탈출 이후 24일만이었다.
김만철은 왜 굳이 목숨을 걸고 남한에 왔을까? 그는 1987년 2월20일 기자회견에서 전남 출신 아버지의 입북 경위가 해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성분이 낙인 찍혀 고통 받았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일까? 그에게 또 다른 속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자유를 존중한다. 다만 그가 받은 융숭한 대접과 환대는 ‘박종철 물고문’ 덕임이 분명하다. 고문치사에 가슴아파하던 많은 이들이 김만철을 싸늘한 시선으로 외면했던 이유다.
이철승의 반기였다.
신민당 비주류였던 이철승 의원이 뜬금없이 ‘내각제’이야기를 꺼냈다. 반세기 동안 대통령 중심제가 박해를 주었다고? 당시 ‘직선제’는 반독재를 주창한 대중들의 열망이자 신민당의 당론이었다. 그럼에도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선민주화 후내각제협상’이라는 카드로 야당의 막후 실세였던 김영삼 김대중을 곤혹스럽게 하던 때였다. 이철승의 이 발언은 이민우에게 힘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전두환 정권이 보기에 이쁜 짓이었다. 결국 김영삼은 결단을 내린다. 4월8일 신당(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이민우 이철승과 따로 놀기로 결심한다. 신민당 의원 90명 중 74명이 여기에 참여한다. 두 이씨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
<조선일보> 4컷만화 고바우영감은 ‘3차에 걸친 철의 쇼크’라 풍자한다. 1차 철의 쇼크는 박종‘철’ 고문이다. 2차 철의 쇼크는 김만‘철’ 탈출, 3차 철의 쇼크는 이‘철’승 발언이다.
김영삼이 만든 통일민주당은 4월13일 발기인대회를 했다. 같은 날 전두환 대통령은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대통령선거를 연내에 실시하되, 직선제가 아닌 현행 간선제로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다음날 김수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부활절메시지를 발표한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했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크 고뇌로 가득 차게 됐으며 이 땅 위에는 다시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져 국민의 눈과 마음속 깊은 곳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됐다.” 5월21일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에 가담한 경관이 3명 더 있었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고문가담 경관 3명과 박처원 치안감 등 책임자급 3명이 구속된다.
6월이 왔다. 10일로 예정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주최 ‘6ㆍ10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이 전경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는다. 그는 뇌사상태에 빠진다. 다음날인 10일 전국에서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열리고, 서울 잠실체육관에선 차기 대통령 후보 노태우를 선출하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다. 전국은 시위의 쓰나미에 잠긴다. 그리고 6월29일.
잎이 무성하리라? 꽃이 피리라? 열배로 맺으리라?
아버지의 시 마지막 줄에 상스러운 댓글을 달아본다. “개뿔!”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악마로 투사하는, 나름 사회의식을 지녔으되 미숙했던 만 스무 살 청춘이었다. 노태우 후보의 당선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잠을 못 이뤘다. 민간정부에 대한 기대와 설렘 또는 최악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분명히 벼랑 밑으로 떨어져 끝장난 줄로만 믿었던 악당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다시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정녕 그럴 수는 없었다. 순진했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40대의 무거움을 생각한다. 나는 그리 낙관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마술 따윈 믿지 않는다. 40대 중반에 들어와, 문득문득 마음속에서 근심을 먹고 자라는 어떤 혹을 발견한다. 죽음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도 잦아졌다. 아직은 만져도 아프지 않고 말랑말랑한 양성 종양이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기보다는,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보고 비관과 고뇌에 휩싸인 척 엄살을 떠는 게 건강에 좋다고 보는 편이다. 혹을 달고 살더라도 말이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도 물혹, 아니 불혹을 발견한다. ‘어느 낮 소리 없이 다가온 불혹의 초조감’이라는 말이 불혹을 지나는 아들의 가슴을 관통하며 찌르르 소리를 낸다.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도 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 죄라고 하자. 까짓거, 그런 죄 쯤 짓고 살아도 좋다.
인생의 자화상 |
이 시는 불혹, 아니 부록에 해당하는 스크랩에 적혀있다. 아버지는 굵직굵직한 정치ㆍ사회 이슈와 관계된 신문기사들을 오려 26권까지 스크랩을 만들었다. 이를 ‘본 스크랩’이라 이름 붙여본다. 아버지는 여기에 담지 않은 문화나 스포츠, 종교 또는 화보와 시리즈기사들로 또 다른 스크랩을 만들었다. ‘부록 스크랩’이라 할 만 하다. 본 스크랩이 1959년부터 1992년까지 총 26권이라면, 이 부록 스크랩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총 11권이다. 위의 시는 그 부록스크랩에 실린 딱 한 편이다. 전체 11권 중 스포츠기사가 가득한 어느 한 권의 맨 앞에 적혀있다.
그림 속에선 병속에 갇힌 어떤 중년의 사내가 담배를 왼손에 끼고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다. 어느 신문에 나온 그림을 적당히 오려붙였으리라. 40대 후반이었을 아버지의 심정을 잘 대변했기 때문일까. ‘편견과 아집을 계수하는 고혈압’이란 말은 그림 속의 코르크 마개와 잘 어울린다. 코르크마개는 이중의 벽을 상징한다. 밥벌이와 생존이라는 굴레, 그리고 편견과 아집이라는 그물. 아, 저 병 속에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인지도 모른다.
불혹은 잠깐이었다. 아버지는 곧 지천명을 맞았다. 아버지가 지천명에 만든 ‘본 스크랩’을 편다. 1987년에서 1991년. 이제 스크랩도 종반을 향해 치달아간다. 제19권(1987년 1~6월), 제20권(1987년 7~12월), 제21권(1988년), 제22권(1989년), 제23권(1990년), 제24권(1991년)을 넘기며 각 권 맨 앞에 놓인 시를 만난다. 부록 스크랩과는 달리 본 스크랩에선 매번 ‘서시’를 남겨놓았다. 본 스크랩에 더 애착을 보인 증거일까? 그 시들을 곱씹으며 1987~1991년의 시대 풍경들을 감상해본다.
사형틀 |
시 앞에 나오는 자유, 사랑, 진리…. 사랑은 복잡하다. 진리는 어렵다. 자유란 말이 개중 쉽다. 즉자적이고 현실적이다. 자유를 갈아 뭉개고 볶아 하나의 작품이 된다면, 그리하여 즐겁다면 웃으리라 감사하리라. 아버지의 말에 동감한다. 그러나 자유를 갈아 뭉개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다. 공포와 악몽의 괴작!
물고문 도중 질식사 치안본부 서울대 박종철군 사망사건 발표 경찰의 조사를 받다 숨진 서울대 박종철군은 치안본부대공수사2단의 조사관인 2명의 경찰관이 박군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질식해 숨진 것으로 경찰 자체조사결과 밝혀졌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19일 오전10시 기자회견을 갖고 경찰자체 특별조사단을 구성해 박군을 직접조사한 조한경 경위(41)와 강진규 경사(30)를 상대로 박군의 연행경위 사망원인 등을 철저 규명한 결과 담당수사관의 고문에 의한 사망임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강 본부장은 “이에 따라 담당조사관 조 경위와 강 경사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가혹행위에 의한 치사)로 이날 오전 구속했으며 이 사건에 대한 감독책임을 물어 전석린 경무관을 직위해제했다”고 발표했다.(하략) (<동아일보> 1987년 1월19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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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이 죽었다. 긴장과 숨죽임 속에 맞은 1987년이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연초부터 다가온 폭풍의 조짐이었다. 직선제 개헌을 둘러싼 여야의 공방, 정부와 시민의 대결이 어디로 튈지 가늠할 수 없던 때였다. 한 젊은이의 충격적인 죽음.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와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대라고 물고문을 당하며 추궁 당하던 그였다.
박종철의 자유를 갈아 뭉개고 심상치 않은 여론의 화살 앞에 납작 엎드렸던 자들은, 곧 또 다른 자유를 빌미로 대대적 체제선전을 한다. 김만철의 자유.
김만철씨 일가 서울 왔다 청진 출발 24일만에 11명 대북(臺北) 거쳐 어젯밤 김포에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46)씨 일가족 11명이 대만을 거쳐 8일 밤10시24분 김포공항에 도착, 북한을 탈출한지 24일 만에 한국으로 망명해왔다. 김씨 일가족은 아날저녁 8시25분(한국시간) 대북공항에서 한국정부가 제공한 대한항공 전세기에 탑승, 우리나라로 향했다. 김씨 일가족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약20분간 기자회견을 갖고 탈출동기 탈출준비과정 등을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김만철씨는 “남조선 인민들이 성심성의를 다해 도와주고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준데 대해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하략) (<동아일보> 1987년 2월9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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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철이 넘어왔다. 북한 청진의대병원 의사였던 김만철은 북한에서 50t급 청진호를 타고 일본ㆍ대만을 거쳐 한국에 왔다. 직계가족은 물론 장모ㆍ처남ㆍ처제까지 11명을 동반했다. 분단 이후 첫 대가족 단위의 보트피플 탈북사건이었다.
그가 1987년 1월15일 새벽 청진을 탈출해 일본 후쿠이현 미쿠니항에 도착한 것은 1월20일 오후. 박종철이 죽은 뒤 하루 지나서였다.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탈북자들을 인도해달라는 남한 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만철 일가는 제3국 망명을 희망해 대만으로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왔다. 탈출 이후 24일만이었다.
김만철은 왜 굳이 목숨을 걸고 남한에 왔을까? 그는 1987년 2월20일 기자회견에서 전남 출신 아버지의 입북 경위가 해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성분이 낙인 찍혀 고통 받았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일까? 그에게 또 다른 속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한 인간으로서 그의 자유를 존중한다. 다만 그가 받은 융숭한 대접과 환대는 ‘박종철 물고문’ 덕임이 분명하다. 고문치사에 가슴아파하던 많은 이들이 김만철을 싸늘한 시선으로 외면했던 이유다.
이철승 의원 내각제 표명 선택 국민투표는 반대 신민당의 이철승 의원은 19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반세기에 가깝도록 대통령중심제에 의해 독재와 박해를 받아온 국민과 신민당은 특정권력구조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선민주화를 전제로 진정한 책임정치가 구현되는 제도를 지지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개인적 소신인 내각책임제 지지를 강력히 표명했다.(하략) (<동아일보> 1987년 2월19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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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의 반기였다.
신민당 비주류였던 이철승 의원이 뜬금없이 ‘내각제’이야기를 꺼냈다. 반세기 동안 대통령 중심제가 박해를 주었다고? 당시 ‘직선제’는 반독재를 주창한 대중들의 열망이자 신민당의 당론이었다. 그럼에도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선민주화 후내각제협상’이라는 카드로 야당의 막후 실세였던 김영삼 김대중을 곤혹스럽게 하던 때였다. 이철승의 이 발언은 이민우에게 힘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전두환 정권이 보기에 이쁜 짓이었다. 결국 김영삼은 결단을 내린다. 4월8일 신당(통일민주당)을 창당해 이민우 이철승과 따로 놀기로 결심한다. 신민당 의원 90명 중 74명이 여기에 참여한다. 두 이씨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
<조선일보> 4컷만화 고바우영감은 ‘3차에 걸친 철의 쇼크’라 풍자한다. 1차 철의 쇼크는 박종‘철’ 고문이다. 2차 철의 쇼크는 김만‘철’ 탈출, 3차 철의 쇼크는 이‘철’승 발언이다.
김영삼이 만든 통일민주당은 4월13일 발기인대회를 했다. 같은 날 전두환 대통령은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대통령선거를 연내에 실시하되, 직선제가 아닌 현행 간선제로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다음날 김수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부활절메시지를 발표한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했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크 고뇌로 가득 차게 됐으며 이 땅 위에는 다시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져 국민의 눈과 마음속 깊은 곳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됐다.” 5월21일에는 박종철 고문치사에 가담한 경관이 3명 더 있었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축소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고문가담 경관 3명과 박처원 치안감 등 책임자급 3명이 구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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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왔다. 10일로 예정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주최 ‘6ㆍ10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이 전경이 쏜 직격 최루탄에 맞는다. 그는 뇌사상태에 빠진다. 다음날인 10일 전국에서 ‘호헌철폐국민대회’가 열리고, 서울 잠실체육관에선 차기 대통령 후보 노태우를 선출하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린다. 전국은 시위의 쓰나미에 잠긴다. 그리고 6월29일.
직선제 연내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은 29일 △김대중씨 사면복권 △모든 시국관련사범의 석방 등 시국수습을 위한 8개사항을 자신의 ‘특별선언’으로 밝히고 이 8개항 제안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노 대표는 이날 민정당 제102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이같이 결심을 밝히고 “만약 이 결심들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략) (<동아일보> 1987년 6월29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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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
잎이 무성하리라? 꽃이 피리라? 열배로 맺으리라?
아버지의 시 마지막 줄에 상스러운 댓글을 달아본다. “개뿔!”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를 악마로 투사하는, 나름 사회의식을 지녔으되 미숙했던 만 스무 살 청춘이었다. 노태우 후보의 당선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잠을 못 이뤘다. 민간정부에 대한 기대와 설렘 또는 최악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분명히 벼랑 밑으로 떨어져 끝장난 줄로만 믿었던 악당이, 선거와 투표를 통해 다시 돌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정녕 그럴 수는 없었다. 순진했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노태우 후보 대통령 당선 전국2백45개 개표구중 2백 개 개표소의 개표가 끝나 85.8%의 개표율을 보인 17일 오전11시20분 현재 △노 후보 7백27만7천28표 △김영삼 후보 5백30만4천5백97표 △김대중 후보 5백17만8천2백1표 △김종필 후보 1백57만7천8백88표를 각각 얻은 것으로 집계됐고 노 후보는 2위의 김영삼 후보보다 1백98만표 이상을 앞질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2백45개 개표소에서 개표가 완료되는 즉시 전체회의를 열어 노후보의 당선을 의결 공고할 예정인데 그 시점은 빠르면 17일 오후 늦게, 늦어도 18일 오전중이 될 것으로 보인다.(하략) (<동아일보> 1987년 12월17일치) (실제 최종 득표율은 노태우 36.6%(828만표), 김영삼 28.0%(633만표), 김대중 27.1%(611만표), 김종필 8.1%(182만표)-필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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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계속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3개의 댓글
필자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치즈
2013.01.30
천재
2012.08.31
kth27zz
201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