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폭락 위기를 기회로! 한국 10대 부자 등극한 사나이
“나도 한때는 샐러리맨이었다. 밖에서는 나를 보고 성공한 사업가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샐러리맨 생활을 할 때나 사업가로 사는 지금이나 삶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월급쟁이니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생각을, 나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201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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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샐러리맨이었다. 밖에서는 나를 보고 성공한 사업가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샐러리맨 생활을 할 때나 사업가로 사는 지금이나 삶에서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월급쟁이니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생각을, 나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박현주 회장과 우리 가족의 인연은 2008년에 시작되었다. PB(고액자산관리 전문가)로서 2년 차 경험을 쌓아가고 있을 때로, 먼저 내가 PB가 된 이유를 밝혀야겠다.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나는 PB가 되기 전 지점에 근무하면서 18년간 카드와 보험마케팅에 열정을 쏟았다. 10년간 카드마케팅에서 2만4천 좌의 카드를 신규 했고, 보험(방카슈랑스)마케팅에서 2천 계좌를 유치하며 ‘리테일 마케팅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나서도 가슴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최고의 마케팅 전문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리테일 마케팅뿐만 아니라 자산관리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부자가 되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가장 빠른 길은 압구정 PB센터의 PB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007년 나는 꿈에 그리던 PB로 선발되었다.
2008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큰 마음을 먹고 시내 유명 호텔에 점심을 먹으로 갔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의 느낌을 가져보라고 했던가? 호텔 식사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예약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호텔 로비에서 박현주 회장을 처음 만났다. 시장전망과 유망상품에 대해, 현재 운용되고 있는 펀드 상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짧지만 그의 성공철학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부자 마인드를 간접 경험하러 호텔에 간 첫날 우연히 박현주 회장님을 만나고, 그 만남이 소중하게 이어져 『한국의 슈퍼리치』 책의 서평까지 받게 될 줄은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나라 주식부자 6위에까지 오른 박현주 회장은 이처럼 모른 샐러리맨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책을 통해, 그리고 펀드매니저나 운용사 직원 등을 통해 그의 성공신화를 들으며 ‘박현주 회장이야말로 성공을 꿈꾸는 이의 진정한 멘토’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슈퍼리치』에 소개된 대로,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증권회사에 잠깐 다니다가 자신이 구상한 금융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워보기 위해 미래에셋을 창업한다.
국내에 적립식펀드를 처음 도입하고, 펀드 붐을 일으킨 주인공 박현주 회장. 그가 늘 운이 좋고 승승장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에게도 위기의 시절이 있었다.
1988년부터 한신증권 계열사인 한신투자자문에서 운용과장과 증권사의 상품운용과장으로 최고수익률을 올리며 자산운용의 묘미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지점 발령을 받았다. 그가 최연소 지점장 발령을 받았던 1989년 4월 1일 시점은 종합주가지수가 1,007포인트 최고점을 찍고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영업점 지점장 발령이 내려졌고, 이때 그는 마치 지옥에 떨어진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인생 최대의 시련기였다고 회상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 한번 해보자.”
그는 30대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새롭게 구축했다. 주먹구구식 영업으로는 지점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영업보다 직원훈련에 집중했다.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종목을 추천하는 것만이 고객의 소중한 돈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을 직원들에게 전파시키며 밤 10시, 11시까지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서서히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전국 1위 점포를 만들어냈다.
탁월한 영업 신화를 만들어내던 그에게 당시 한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 원이란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당시 강남 50평대 아파트를 2억 원이면 살 수 있었으니 그가 제안받은 조건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에게 “과연 내가 내 꿈을 실현할 정도의 내공을 쌓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더욱 정진하자고 결심한다. 지금도 그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에서 돈이나 자리보다 중요한 것이 꿈이라고 강조하며 “돈에 자신의 꿈을 팔지 말라.”는 경험 어린 조언을 잊지 않는다.
그의 성공요인 중 가장 주목할 것은 바로 ‘소수자의 시각, 소수자의 길’을 견지한 실행력이다. 사람은 누구나 대중(무리) 속에 속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박현주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항상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박현주 1호를 발매할 때 다른 회사들은 폐쇄형이라는 이유로 꺼렸지만 그는 오히려 다른 회사들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성공을 확신했고, 중국의 푸동 지구에 위치한 건물을 살 때도 대부분 직원이 반대했지만, 10년 앞을 내다본다는 심정으로 매입을 결정했다. 지금은 외국 투자은행들이 건물을 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분명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월마트의 샘 월튼처럼 슈퍼리치가 갖고 있는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 그의 통찰력은 엄청난 독서와 사색, 땀 흘리는 운동, 머리를 비우고 초심을 잃지 않는 좋은 습관에서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다. 스스로도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라고 독서의 중요함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샐러리맨으로서 누구나 꿈을 가지고 올바른 습관으로 노력하면 수천 억 대 슈퍼리치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직하게 벌어 정직하게 쓰일 때 ‘돈은 아름다운 꽃’이란 그의 철학을 직접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회사를 창업하고 10개월 만에 1억 원을 출자해 1998년 4월 미래에셋육영재단을 만들었고, 2000년 3월 75억 원을 들여 박현주 재단을 설립했다. 2006년 6월에는 제1회 글로벌 전문가 양성프로그램을 통해 글로벌 금융인재를 키우는 데도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평범한 샐러리맨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박현주 회장이 보여주듯 가슴에 품은 꿈(평생을 바쳐 목숨 걸고 할 수 있는 일)을 마치 대나무 씨앗처럼 땅속(가슴속) 깊이 뿌리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대나무가 4년의 시간이 지난 뒤 3~5미터 크기로 단번에 도약하듯 자신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고, 차근차근 사업 구상을 하면서 크게 도약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박 회장 역시 처음부터 슈퍼리치의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성공을 한 개, 두 개 계단을 밟듯 쌓아 올라가며, 더 큰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자신만의 꿈을 가슴속에 그리면서 하루 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처럼 채워갔기에 그는 오늘날 존경받는 대한민국 꿈 멘토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가 지난 10년보다 더 멋진 꿈을 펼칠 것이라 믿으며, 우리 역시 자신의 소중한 꿈을 향해, 슈퍼리치의 꿈을 향해 멋진 한 걸음을 내딛어보자.
박현주 회장과 우리 가족의 인연은 2008년에 시작되었다. PB(고액자산관리 전문가)로서 2년 차 경험을 쌓아가고 있을 때로, 먼저 내가 PB가 된 이유를 밝혀야겠다.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나는 PB가 되기 전 지점에 근무하면서 18년간 카드와 보험마케팅에 열정을 쏟았다. 10년간 카드마케팅에서 2만4천 좌의 카드를 신규 했고, 보험(방카슈랑스)마케팅에서 2천 계좌를 유치하며 ‘리테일 마케팅 최고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나 두 가지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나서도 가슴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최고의 마케팅 전문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리테일 마케팅뿐만 아니라 자산관리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부자가 되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가장 빠른 길은 압구정 PB센터의 PB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007년 나는 꿈에 그리던 PB로 선발되었다.
2008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큰 마음을 먹고 시내 유명 호텔에 점심을 먹으로 갔다. 부자가 되려면 부자의 느낌을 가져보라고 했던가? 호텔 식사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예약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호텔 로비에서 박현주 회장을 처음 만났다. 시장전망과 유망상품에 대해, 현재 운용되고 있는 펀드 상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짧지만 그의 성공철학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부자 마인드를 간접 경험하러 호텔에 간 첫날 우연히 박현주 회장님을 만나고, 그 만남이 소중하게 이어져 『한국의 슈퍼리치』 책의 서평까지 받게 될 줄은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나라 주식부자 6위에까지 오른 박현주 회장은 이처럼 모른 샐러리맨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책을 통해, 그리고 펀드매니저나 운용사 직원 등을 통해 그의 성공신화를 들으며 ‘박현주 회장이야말로 성공을 꿈꾸는 이의 진정한 멘토’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슈퍼리치』에 소개된 대로,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증권회사에 잠깐 다니다가 자신이 구상한 금융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워보기 위해 미래에셋을 창업한다.
국내에 적립식펀드를 처음 도입하고, 펀드 붐을 일으킨 주인공 박현주 회장. 그가 늘 운이 좋고 승승장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에게도 위기의 시절이 있었다.
1988년부터 한신증권 계열사인 한신투자자문에서 운용과장과 증권사의 상품운용과장으로 최고수익률을 올리며 자산운용의 묘미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지점 발령을 받았다. 그가 최연소 지점장 발령을 받았던 1989년 4월 1일 시점은 종합주가지수가 1,007포인트 최고점을 찍고 줄곧 내리막길을 걷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영업점 지점장 발령이 내려졌고, 이때 그는 마치 지옥에 떨어진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를 인생 최대의 시련기였다고 회상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 한번 해보자.”
그는 30대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 진용을 새롭게 구축했다. 주먹구구식 영업으로는 지점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영업보다 직원훈련에 집중했다.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종목을 추천하는 것만이 고객의 소중한 돈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을 직원들에게 전파시키며 밤 10시, 11시까지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서서히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전국 1위 점포를 만들어냈다.
탁월한 영업 신화를 만들어내던 그에게 당시 한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 원이란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안이 왔다. 당시 강남 50평대 아파트를 2억 원이면 살 수 있었으니 그가 제안받은 조건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자신에게 “과연 내가 내 꿈을 실현할 정도의 내공을 쌓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더욱 정진하자고 결심한다. 지금도 그는 젊은이들에게 인생에서 돈이나 자리보다 중요한 것이 꿈이라고 강조하며 “돈에 자신의 꿈을 팔지 말라.”는 경험 어린 조언을 잊지 않는다.
그의 성공요인 중 가장 주목할 것은 바로 ‘소수자의 시각, 소수자의 길’을 견지한 실행력이다. 사람은 누구나 대중(무리) 속에 속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박현주 회장은 위기의 순간마다 항상 소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박현주 1호를 발매할 때 다른 회사들은 폐쇄형이라는 이유로 꺼렸지만 그는 오히려 다른 회사들이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성공을 확신했고, 중국의 푸동 지구에 위치한 건물을 살 때도 대부분 직원이 반대했지만, 10년 앞을 내다본다는 심정으로 매입을 결정했다. 지금은 외국 투자은행들이 건물을 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분명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월마트의 샘 월튼처럼 슈퍼리치가 갖고 있는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 그의 통찰력은 엄청난 독서와 사색, 땀 흘리는 운동, 머리를 비우고 초심을 잃지 않는 좋은 습관에서 후천적으로 생긴 것이다. 스스로도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라고 독서의 중요함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샐러리맨으로서 누구나 꿈을 가지고 올바른 습관으로 노력하면 수천 억 대 슈퍼리치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직하게 벌어 정직하게 쓰일 때 ‘돈은 아름다운 꽃’이란 그의 철학을 직접 실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회사를 창업하고 10개월 만에 1억 원을 출자해 1998년 4월 미래에셋육영재단을 만들었고, 2000년 3월 75억 원을 들여 박현주 재단을 설립했다. 2006년 6월에는 제1회 글로벌 전문가 양성프로그램을 통해 글로벌 금융인재를 키우는 데도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평범한 샐러리맨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박현주 회장이 보여주듯 가슴에 품은 꿈(평생을 바쳐 목숨 걸고 할 수 있는 일)을 마치 대나무 씨앗처럼 땅속(가슴속) 깊이 뿌리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마치 대나무가 4년의 시간이 지난 뒤 3~5미터 크기로 단번에 도약하듯 자신의 자리에서 최고가 되고, 차근차근 사업 구상을 하면서 크게 도약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박 회장 역시 처음부터 슈퍼리치의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성공을 한 개, 두 개 계단을 밟듯 쌓아 올라가며, 더 큰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자신만의 꿈을 가슴속에 그리면서 하루 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처럼 채워갔기에 그는 오늘날 존경받는 대한민국 꿈 멘토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가 지난 10년보다 더 멋진 꿈을 펼칠 것이라 믿으며, 우리 역시 자신의 소중한 꿈을 향해, 슈퍼리치의 꿈을 향해 멋진 한 걸음을 내딛어보자.
- 한국의 슈퍼리치 신동일 저 | 리더스북
KB국민은행 압구정PB센터 부센터장이자 VVIP 자산관리팀장인 신동일 PB. 압구정에서 6년 이상 초고액자산가들, 이른바 ‘슈퍼리치’들을 상대로 자산관리를 해왔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성공스토리를 주목했다. 저자는 자신의 꿈을 좇아 맨바닥에서 성공한 18명의 슈퍼리치들의 생생한 성공스토리를 담았다. 100억대 부자가 된 카센터 정비공, 부동산 경매 박사가 된 미장원 아줌마, 보따리 장사로 부자가 된 35세 사업가, 하루 매출 70만 원 대박 커피점 사장님의 이야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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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동일
KB국민은행 압구정PB센터 부센터장이자 VVIP 자산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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