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회사는 하루쯤 쉬어라!
가끔은 먼 곳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자문해보라. 이 문제, 이 상황, 이 사건이 5년 뒤에도 나를 괴롭힐까? 한 미식축구 감독은 자신의 선수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주었다.
글ㆍ사진 레지너 브릿
201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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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문제나 난관, 위기에 봉착할 때면 이렇게 자문해라.

“5년 뒤에도 이 일이 대단해 보일까?”

대답은 거의 언제나 ‘아니다’일 것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자. 나는 학사 학위를 받는 데 12년이 걸렸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이 지금 대수롭냐고? 절대 아니다.

나는 산림 관리원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화학 수업을 25시간 이상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더구나 동물학에서 D를 받았고, 아동 심리학에서도 D를 받았다. 당시에는 내가 낙오자로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신까지 해서 학교를 중퇴했다. 하지만 6년 뒤 복학했을 때는 그 대학교의 과거 학점 말소 정책 덕분에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짜잔! 학점 평균이 금세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우리는 작은 일 때문에 너무 자주 괴로워한다.
이따금 심한 두통이나 근육통, 지독한 축농증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밤새 뒤척이면서 내일 회사에 전화해서 병가를 낼지 말지 고민한다. 전화해라. 하루 쉰 것이 5년 뒤에 대수로운 일로 기억되겠는가?
힘겹게 작성한 리포트가 완벽하지 않을 때도 있다.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내가 바라는 최고가 아닐 때. 10페이지를 쓰려고 했는데 9페이지밖에 못 썼을 때. 걱정 마라. 5년 뒤에 그 일이 대수롭게 보이겠는가?

모유로 아기를 키우는데 직장에 복귀해야 할 때도 있다. 모유를 끊으면 아기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스럽다. 엄마한테 버려진 느낌이 들지 않을까? 젖병을 물리면 엄마와 아기의 유대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5년 뒤에는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아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내 친구의 두 살배기 아들은 애지중지하는 장난감을 입에 물고 살았다. 그걸 어찌나 요란하게 빨아대던지 진공청소기를 틀어놓은 것 같았다. 그대로 두면 치아 발육이 더뎌질 상황이었지만, 엄마는 그 장난감을 치우면 아들이 잠을 자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결국 그 장난감이 꼭 필요한 다른 아이에게 보내줘야 한다고 아들을 설득했다. 아들은 그날 온종일 칭얼댔지만 밤에는 곤히 잠들었으며, 그 후로도 밤마다 잘 잤다.

부모들은 늘 이런 일로 고민한다. 때로는 내 아이가 다른 집 아이보다 늦게 걸음마를 시작해서 걱정한다. 첫걸음을 생후 9개월에 떼는 아이도 있고, 생후 14개월에 떼는 아이도 있다. 5년 뒤에도 그게 걱정스러울까? 걸음마를 일찍 시작하건 늦게 시작하건, 기어서 유치원에 가는 아이는 없다. 대소변 가리기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한 살 반일 때도 여전히 기저귀를 차거나 두 살 때도 이부자리에 쉬를 하면 겁부터 먹는다. 걱정할 필요 없다. 기저귀를 차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는 없으니까.

입사 면접이나 연애, 학점 문제도 마찬가지다. 5년 뒤에도 그 일이 대수롭게 여겨질까? 5개월 뒤에는 어떨까? 아니, 5분 뒤에는 어떨까? 아마 아닐 것이다.

더 힘든 일일 때는 어떨까? 더 중요한 일이라면? 남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다. 5년 뒤에는 웃으며 추억할 수 있다. 가끔은 먼 곳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자문해보라. 이 문제, 이 상황, 이 사건이 5년 뒤에도 나를 괴롭힐까? 한 미식축구 감독은 자신의 선수들에게 놀라운 가르침을 주었다. 감당하기 힘든 교훈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이었다.


신시내티 콜러레인 고등학교의 미식축구부 감독 케리 쿰스는 자신의 팀을 이끌고 13연승을 거두었다. 그의 선수들은 마지막 시합에서 상대를 49대7로 대파했다. 그들은 모든 시합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며칠 뒤에는 오하이오 주 챔피언을 가리는 고등학교 미식축구 슈퍼볼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쿰스 감독을 칭찬했다. 주말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결승전 생각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토요일에 열릴 큰 시합을 고대하며 들떠 있었는데, 그 학교 졸업생 한 명이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자기 엄마한테 말했다.

“나 저 애랑 8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이상한데. 왜 아직도 학교에 다니지?”

그 엄마는 콜러레인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상담 교사를 찾아가 같은 질문을 했다. 학적부를 살펴본 상담 교사는 그 선수가 9학년 때 낙제해서 고등학교를 5년째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기에 나갈 수 없는 부적격 선수였던 것이다. 이 소식이 감독과 교장, 장학사에게 전해졌다.

그 학생이 부적격 선수라는 사실은 전 세계를 통틀어 단 몇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 학생이 겨우 2년 동안 고등학교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정불화로 9학년 때 학교에 거의 나오지 못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형편없던 성적을 가까스로 끌어올리고 뒤늦게 10학년이 되어 새로운 삶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규칙은 규칙이었다. 감독이 이 부정행위를 주 당국에 보고하면 그의 팀은 결승전에 나갈 수 없었다.
훗날 쿰스 감독이 내게 말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단 몇 명뿐이야’라고 속삭이더군요. 갈등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결국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숨기고는 도저히 살 수 없었거든요.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하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 팀의 아이들이 무얼 보고 배우겠습니까. 다시는 그 애들의 눈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콜러레인 고등학교는 주 당국에 자진 신고했다. 그리고 미식축구부 감독은 선수들을 모두 강당으로 불러 모았다. 빠진 선수는 단 한 명뿐이었다. 코치가 그 부적격 선수를 차에 태우고 집에 데려다주면서 개인적으로 소식을 전했다. 쿰스 감독이 모두에게 기도하자고 하자 선수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 챘다. 마침내 감독이 소식을 전하자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감독이 선수들을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데리고 나가 마지막 경기를 하게 했다. 텅 빈 관중석에 둘러싸인 선수들은 교복을 입은 채 공을 던졌다.

쿰스 감독은 이번 일을 선수들에게 교훈으로 삼게 해주었다. 훌륭한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삶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너희는 살아가면서 이런 비극과 절망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훌륭한 인간의 참된 기준은 시련에 부딪쳐 넘어졌을 때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이다.”

이 사건의 충격파가 지역 전체에 퍼지면서, 그 부적격 선수의 이름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나오고 신문에 실렸다. 심지어 그 학생에게 체포 영장까지 발부되었는데, 과거에 저지른 절도에 대해 배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했다. 감독은 그를 차에 태우고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게 했다. 그 젊은이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미식축구 시즌을 일찍 끝내야 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지만, 한 젊은이의 삶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훨씬 더 괴로웠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 녀석은 너무나 힘겨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녀석이 어리다는 사실을 간과하죠. 나이는 열여덟 살이지만, 아직 애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때부터 코치들은 날마다 그 학생을 차에 태워 등교시켜주고, 숙제를 도와주고, 매주 성적을 확인해주면서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부적격 선수가 된 것이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하이오 주 전역에서 그 학교로 격려의 메시지가 담긴 팩스와 음식, 꽃다발이 쇄도했다. 심지어 다른 고등학교 관계자들까지 그 젊은이를 돕겠다고 연락했다. 사람들은 그 부적격 선수가 내지 못한 배상금에 보태라며 돈을 보내왔다.

쿰스 감독은 그들의 호의를 사양했다. 진정한 스승이었던 그는 이렇게 부탁했다.

“이 아이한테 돈 대신 일자리를 주십시오.”

그는 참담하게 끝났을 시즌을 승리의 시즌으로 바꿔놓았다. 선수들이 졸업한 뒤에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말이다. 쿰스 감독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고 5년쯤 지나면, 오하이오 주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미식축구 시즌을 날린 일이 결코 참담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경기장에서 얻은 그 어떤 승리보다 더 오래도록 그들의 삶에 아로새겨질 정직의 교훈으로 기억될 거라고.







 
#회사 #삶은 나를 #레지너 #브릿
1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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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2.02

당시에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단치 않은 일로 느껴지지 않는 일도 있겠죠. 하지만 반대로 별로 대단치 않은 일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일도 있는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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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4444

2012.02.02

회사를 하루쉬면 업무가 누락되고 동료와 거래처사람들이 기다려야하는 피해를 끼치는데,약속을 가벼이 여기는듯한 제목으로 느껴집니다.책의 취지야 이해하지만 제목으로 낚는 느낌도 드네요.책 내용대로 인생이란 숲을 보면 당장의 작은고민인 나무한개는 별것아닐수도 있겠만, 나무가 모여야 숲이된다는것도 잊지말아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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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2012.02.01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생각이 나네요. 긴 인생에서 보면 지금 이 순간의 어려움은 하나의 자그마한 일일 뿐이죠. 긴 안목을 가지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네요.
'쿰스'감독이 정말 대단하군요.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하다니. 절로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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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너 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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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너 브릿

오하이오의 대표적 신문사 〈플레인 딜러The Plain Dealer〉의 인기 칼럼니스트. 1956년 인구 12,000명의 소도시인 오하이오 주 라베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켄트 주립대학(Kent State University)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존 캐럴대학(John Carroll University)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총 2000편이 넘는 칼럼을 게재했다. 그러던 그녀가 위기에 부닥친 건 지난 1998년 유방암을 선고받으면서부터였다. 브릿은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스런 화학요법과 지난한 회복의 이야기를 신문에 연재해 큰 호평을 받았고, 이 칼럼으로 1999년 내셔널 헤드라이너상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힉스 클리닉'의 불법적인 아동 거래 사건을 다룬 칼럼으로 또다시 내셔널 헤드라이너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3년에는 '오하이오 최고의 칼럼니스트'로 뽑혔으며, 2009년에는 미국법조협회가 수여하는 은망치상을 받는 한편, 오하이오 도서관 회의가 뽑는 '올해의 시민'으로 뽑히기도 했다. 2008년과 2009년, 2년 연속으로 퓰리처상 논평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10월에는 클리블랜드의 저널리즘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미국 칼럼니스트 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 밖에도 브릿은 라디오 프로그램 〈생각의 소리The Sound of Ideas〉에 출연해 청취자들의 고민과 아픔을 함께하며 인생 멘토로 활약했다. 그녀의 명칼럼 50개를 엄선해 묶은 이 책은 영국, 중국,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 18개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