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로 물이 넘쳐나는 도로를 통제하기 시작하면 정전은 정해진 순서다. 어학연수를 왔을 때는 정전이 되어도, 학생이자 손님인 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발전기를 돌리든지, 촛불을 준비하든지, 비상용 랜턴을 챙겨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는 현지인과 다를 바 없는 봉사단원이 된 후로는 정전에 대비해 스스로 랜턴과 촛불을 준비해두고, 그것들이 위치한 곳이 어딘지를 늘 새겨두어야 한다. 급하게 일이 닥치면 어두컴컴한 가운데서도, 눈을 감고도 찾을 수 있도록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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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가 와서 정전이 되었던 처음 몇 번은 준비해둔 촛불을 켜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달달거리던 선풍기가 멎고 피부에 끈적거림이 더해져도,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촛불이 가져다주는 알 수 없는 안정감에 사로잡히면, 순간 경건해짐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우기가 계속되고 잠깐이라도 촛불을 켜야 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어인 청승이냐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기 시작했다. 청승을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내가 왜 여기 와 있나, 봉사활동을 하러 와서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봉사활동을 마치면 과연 남는 게 뭘까, 남는 게 있을까?’ 등등 봉사활동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었다. 우울증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우울증이 깊어지기 전에 소소한 생각을 없앨 수 있는 북적거림에 떠밀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활기 회복! 여름방학을 맞은 한국 대학생 단기 봉사팀 방문이 가져다준 단기 처방전이었다. 봉사팀의 도움을 받아 천사의 집 아이들이 한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기로 했다. 프로그램으로 정한 것은 한국 음식 만들기. 아이들이 김밥과 부침개를 만들 수 있도록, 두 팀으로 나눠 재료들을 주고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한국 대학생들에게는 아이들을 도와서 김밥 재료들을 챙겨주며 응원하게 했다. 김은 한국에서 학생들이 갖고 온 것이지만, 재료 대부분은 현지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이들이 만든 김밥은 단단하게 말리지는 않았지만, 다들 신기해하며 입에 넣기에 바쁠 정도로 인기 만점이었다. 부침개 역시 옆에서 도와주던 단기 봉사팀 학생이 프라이팬을 높이 들어 뒤집는 묘기에 ‘와’ 하는 탄성과 박수가 절로 나오게 했다.
아이들이 단기 봉사팀 학생들과 금세 궁합이 맞는 것을 보며, 역시 사람이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함께 먹는 것임을 확인한다. 아이들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나눠준 재료들을 깔끔하게 사라지게 했다. 배가 고팠던 걸까? 진짜 맛이 있었던 걸까?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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