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진한 커피향, 밤이면 예술의 향기가 피어나는 거리
나이는 자꾸 늘어가는데 관절염보다 지긋지긋한 이놈의 방황은 끝이 나질 않는다. 거기에 세월이 갈수록 더해지는 항목까지 있으니, 바로 방황하는 내 자신에 대한 방황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데, 청춘도 아니면서 아프니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민망하다.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는 서른도 훌쩍 지났건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
글ㆍ사진 이영희
20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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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자꾸 늘어가는데 관절염보다 지긋지긋한 이놈의 방황은 끝이 나질 않는다. 거기에 세월이 갈수록 더해지는 항목까지 있으니, 바로 방황하는 내 자신에 대한 방황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데, 청춘도 아니면서 아프니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민망하다.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는 서른도 훌쩍 지났건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당최 알 수가 없다.

방황조차 떳떳하지 못한 나이가 되면, 요동치는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 하나쯤은 익혀둘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효과를 보고 있는 건 무작정 걷기다. 마음이 복잡할 땐 트레이닝 복에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산책’ 혹은 ‘산보’ 같은 예쁜 표현과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떠도는 마음을 따라 몸도 떠돈다고 해야 할까. 목적지 같은 건 정하지 않고 발길 향하는 대로, 즉흥적으로 걷기. 그러다 보면 가끔은 헝클어졌던 마음이 조금씩 갈피를 잡아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경우엔 걷고 또 걸어 녹초가 된 몸과 맘을 비집고, ‘어떻게든 되겠지’ 정신이 불쑥 솟아오른다.

 

최근에는 시모키타자와(下北?) 방황을 시작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새 소설 『안녕 시모키타자와』(일본어 제목은 ‘もしもし下北?’)’를 읽은 후다. 사실 앞선 칼럼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쓴 적이 있다. 말랑말랑, 간질간질해서 싫다면서. 하지만 오랜만에 읽은 그의 작품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느낌이 제법 좋았다. 소설에 묘사된 그 거리 구석구석을 걸어보고 싶어, 읽는 내내 마음이 들썩였다.

『안녕 시모키타자와』는 두 여자 어른의 성장담이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으니, 스스로 상처에 약을 바르며 흉터 없이 아물기를 기도해야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요시에의 아빠, 제법 유명한 밴드의 키보디스트였던 그는 비밀스런 어떤 여인과 이바라키현의 숲에서 동반자살을 했다.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편을, 아빠를 잃은 후, 엄마와 요시에는 각자의 상처 안에서 허우적대며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일상을 보내던 두 사람에게 ‘생명의 샐러드’를 선사한 곳이 시모키타자와의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 ‘레 리앙’. 그 맛을 기억하며 요시에와 엄마는 시모키타자와에서 새 생활을 시작한다. 아침이면 각 볶은 커피향이 골목을 채우고, 밤이면 음악과 연극을 사랑하는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이 거리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시간표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점심때쯤 되면 지갑이랑 열쇠랑 휴대전화만 들고 밖으로 나가. 우선은 퓨어 로드에 있는 ‘원 러브’에 가서 파는 책인지 아니면 핫짱의 개인 소장품인지 모를 헌책을 좀 보다가 핫짱이랑 잠시 얘기를 나눠. 대충 앞으로 월 하고 싶은지, 우리는 한 물 갔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뭐 그런 얘기지만. (중략) 엄마는 낮 시간을 대충 이렇게 보내. ‘로쿠산’에서 피자 런치를 먹는 것도 아주 좋아해. 피자는 ‘라 베르데’도 맛있어. 혼자서도 한판을 날름 먹을 수 있어. 가끔은 돈 쓸 각오를 하고 ‘아스카’에 가서 일본식 런치를 먹는 일도 있어. 그리고 틈틈이 오래도록 읽지 못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씩 읽고 있어. (중략) 그렇게 여행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하루 일과가 다 끝났다는 기분이 들어. 아무튼 언제나 일부러 천천히 천천히 걸어. 학생 때처럼 아주 천천히. 지금 엄마에게 있는 건 시간뿐이니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모키타자와는 도쿄의 남서부 세타가야구에 있다. 1970년대 돈 없는 예술가들이 몰려들면서 만들어진 도쿄 서브 컬처의 중심지다. 계획 없이 형성된 거리라 골목은 복잡하게 이어져 있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20여개의 라이브 하우스와 작은 레코드점, 인디레이블 사무실 등이 모여 있고 극장, 독립영화관, 술집, 옷 가게 등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실제로 작업실을 시모키타자와로 옮기면서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았기 때문에,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거리와 가게는 실제로도 존재한다. 시모키타자와는 요시모토 바나나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사랑받아 왔는데, ‘설국’으로 유명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영화 '쉘 위 댄스'의 감독 수오 마사유키도 이곳에서 예술활동을 시작했다.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영화 ‘왁자지껄 시모키타자와(ざわざわ下北?)’와 만화 ‘시모키타 글로리데이즈’, 드라마 ‘시모키타 선데이즈’ 등이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몇 년 전부터 개발계획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2003년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는 도쿄올림픽 유치를 위한 도시정비의 일환으로 시모키타자와역 주변 정비계획을 입안했고, 치요다구도 좁은 도로로 인한 화재의 위험, 긴급차량의 통과 불편 등을 이유로 들면서 이에 동조했다. 2006년 확정된 계획에 따르면 좁고 낡은 현재의 시모키타자와 역은 완전히 없어지고 지하에 새로운 역이 건설된다. 지상에는 광장과 입체교차로가 만들어져, 역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된 세련된 변화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시모키타자와만이 지닌 독특한 매력을 훼손하게 될 것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극장, 라이브하우스, 펍을 중심으로 한 상업자협의회가 「세이브 더 시모키타자와(Save the下北?)」, 「지키자 시모키타(まもれシモキタ)」 등을 조직해 2004년부터 지속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고, 사회학자 요시미 슌야, 음악가 소카베 케이치 등 학자와 예술가들이 ‘시모키타자와 포럼’ 이라는 전문가 단체를 만들어 연구모임을 열고 있다. 이들은 시모키타자와 정비 계획이 ‘정리되지 앓은 자유로움’으로 표현되는 이 지역의 개성과 문화를 파괴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어떤 거리를 만들 것인가, 그 거리에 어떤 아이덴티티를 부여할 것인가는 개발의 관점에서가 아닌, 문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현재 시모키타자와 정비계획은 일단 재검토에 들어간 상태다. 지난 8월 세타가야구의 호사카 구청장은 이미 시작된 시모키타자와역 지하화 공사를 제외한 역 앞 광장 조성이나 도로 보강 사업 등에 대해서는 일단 진행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쿄도와 세타가야구가 추진해온 원안을 폐기하고 시모키타라는 동네에 보다 어울리는, 반대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런 정책 전환에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흔들어놓은 3월 대지진의 영향도 있었다. 올해 4월 열린 통일지방선거에서 호사카 구청장은“3?11 대지진 이후 우리 사회의 가치는 바뀌고 있다. 대형개발이라는 가치에도 전환이 필요하다”는 공약을 내세워 개발 찬성파를 누르고 구청장에 당선됐다.

『안녕 시모키타자와』에도 무분별한 개발로 이 곳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는 저자의 마음이 자주 드러난다. 거리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탄생한다. 어디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었던 요시에와 엄마가 여행을 하듯 시모키타자와를 찾았다 돌아가는 경험을 통해 다시 일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듯.

몇 년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의 삶이 이 거리를 숨쉬듯 들고 나는 것을 나는 느꼈다.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들고 나면서 거리는 만들어진다.
후지코 씨의 말대로다. 언뜻 보면 뒤죽박죽 혼란스럽고 추하지만, 어느 틈엔가 멋진 무늬를 그리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과 추악함과 비참함과 사랑과 훌륭함과 웃는 얼굴과 풍요로움, 그런 모든 것들이 뒤섞이고 엉킨 무의식의 넝쿨 같은 것, 설사 도끼로 싹둑 잘라 낸다 해도, 불태워 버린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 속 경치까지는, 그 안에 살아있는 시간까지는 빼앗을 수 없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그 안에 지금과 나를 통해 우리 아빠도 분명하게 속해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걸 가르쳐 준, 포근히 감싸 안아 쉬게 해 준 시모키타자와여, 고맙습니다. 모양이 어떻게 바뀌든 끈질기게 단단하게 뿌리내려, 영원히 여기에 있기를…….


아이폰, 아이패드용 앱으로 출간된 『안녕 시모키타자와』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게들의 지도가 부록으로 담겨 있지만, 미로 같은 시모키타자와의 골목에서 이 장소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굳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헤맬 것이 아니라, 그냥 맘에 드는 가게를 구경하다 눈에 띄는 카레집에서 천천히 카레라도 먹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게 이 거리를 만끽하는 최선의 방법일 듯. 어쨌거나 시모키타자와는 그런 동네니까 말이다. 청춘도 아닌 주제에 방황하는 누군가에게도, “적어도 이 곳에서는 느긋하게 굴고, 주춤거리고, 한심해지고, 망가지기로 하자. 인간 누구나에게 한심한 구석은 있다. 과도하게 분발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될 대로 된다”고, 쿨하게 속삭여줄 것만 같은.


 
#이영희 #일본 #안녕 시모키타자와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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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물

2012.03.07

오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도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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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2012.02.18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도 개발의 바람은 잘 피할 수가 없나 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고 또 중장기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분명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보완해 가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인데,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인해서 이런 것들을 못 보거나 봐도 애써 외면하려하니 말입니다. 이제는 좀 더 멀리 내다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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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1.17

3.11 영향이 있었다면 보다 정비되고 안전한 그런 거리만들기 계획이 더 힘을 얻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반대였네요. 대체 어떤 거리일까. 가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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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