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퍼센트의 하루키를 만나는 법
무슨 상관이랴.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대체불능의 작가였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어느 시절을 견뎌냈었다.
201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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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일본 남자작가들의 얼굴’에 관한 기사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지금처럼 8월이었고, 제대로 더위 먹었고, 오랜 장마에 다들 우중충한 기분이었다. 기획회의에선 『파크 라이프』를 쓴 요시다 슈이치나 『사랑한 후에』를 쓴 츠지 히토나리처럼 잘생긴 남자작가들이 등장했다. 징이 박힌 가죽장갑에 요란하게 머리를 염색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나 혼자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빠졌다고 우겼었다. 회의가 점점 늦어져 점심으로 식어빠진 피자를 뜯다가, 다들 어이없단 얼굴로 나를 쳐다봤었다.
“하루키가 진정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못 생겼단 증거도 없잖아.”
“맙소사.”
주접이라거나, 주책이라거나 무슨 상관이랴.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게 대체불능의 작가였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어느 시절을 견뎌냈었다. 폴 오스터나 아멜리 노통브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이나 파리로 달려가는 선배들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하루키를 만나기 위해 도쿄의 메밀국수 가게나, 오래된 영화를 반복해서 상영하는 그리스의 작은 섬으로 달려가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때가 오면, 스무 살 때부터 줄곧 모아두었던 그의 책에 사인을 받고, 몇 년 째 방치 중인 블로그에 인증샷을 올리고, ‘브이’ 자를 그리며 세상에서 가장 유치해 보이는 ‘팬과 작가의 사진’을 찍고 말겠다고 다짐했었다.
문득 소설가가 된 어느 날, 고려대학교 교내 서점에서에 실린 하루키의 길고 긴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컸던 건 그래서였다. 그때, 내가 하루키에게 묻고 싶었던 삼백 일곱 여덟 가지 쯤의 질문들이 일일이, 올올이, 전부 다 떠올랐으니까. 기사를 다 읽고 여전히, 늘, 같은 표정인 그의 사진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여전히, 일관되게 잘생기지 않은 게 정말 마음에 들어요. 무라카미 씨.”
그러니까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오렌지족이란 말이 탄생했고, ‘쟈뎅’ 같은 셀프서비스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던 청춘들이 게스 데님에 니코보코의 하얀 운동화를 신고,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나 『양을 쫓는 모험』 등을 읽던 때가 있었다. 일본 문학의 본격적인 유입은 어느덧 ‘하루키적인 것’과 ‘사소설류’를 양산시켰고, 문단 여기저기에 포스트모더니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때는 하루키를 읽는다는 게 더 이상 쿨하지 않은 징표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같은 무라카미라면 차라리 ‘무라카미 류’가 낫잖아요.”
라고 충고하는 조숙한 얼굴의 후배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 경우, 여행을 떠날 때 늘 가방 속엔 하루키의 책이 들어 있었다. 동행인의 수면을 방해하는 게 미안해서 싱가폴 메리어트 호텔 화장실 비데 위에 앉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었다. 얼마 전 일본 여행 때는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신주쿠와 하라주쿠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빅스 바이더벡의 연주를 꽤 오래된 탄노이 스피커로 틀어주는 'DUG' 같은 재즈 클럽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증과 불면증에 하루키 책만 한 약은 없다. 그건 세코날(수면제)보다 유용하고, 벤조디아제핀 같은 신경안정제보다 안전하다. 유쾌한 커트 보네것도, 발랄한 우디 앨런이나 닉 혼비의 유쾌한 소설들도 내겐 하루키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의 문장은 여행 중 멀미를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문장 속에 달팽이관과 고막 사이를 조이고 여는 장치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그 틈을 이용해 버스를 타는 중에도 바깥 풍경을 놓치는 위험 없이, 여행 동안 얇은 책 한 권쯤은 전부 다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꼭 두툼한 스테이크를 소스까지 말끔히 먹어치운 것 같은 포만감을 준다. 기왕 디저트까지 곁들인다면 대단히 재미있는 레이몬드 챈들러나 레이몬드 카버 같은 ‘레이몬드 브라더스’의 책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여행 중이라면 그것은 그저 내게 옵션 일뿐이다.
<페이퍼>에 연재했던 오래된 내 북 칼럼을 인용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하루키는 떠나면서 읽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1Q84』 3권은 ‘베란다 프로젝트’의 「train」을 들으며 오래된 할머니의 집 마루에 누워 읽었다.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고, 그 위로 8월의 잠자리 떼들이 수도 없이 날아다니는 곳에서 말이다. 먼지 낀 고물 선풍기가 덜커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커다란 참나무 밑에서 매미가 울었다. 까무룩 잠이 쏟아질 때마다 졸다, 깨다, 읽다, 말다를 반복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이미 하늘이 코타르처럼 까매져 있었다. 그 위로 별들이 노란 참외 씨처럼 총총 박혀 있었고…….
눈여겨보던 작가가 먼 이국의 도시에 체류하며 글을 쓴다거나, 마라톤 대회를 완주했다거나, 취미로 번역을 한단 기사를 보면 어김없이 하루키가 떠올랐다. ‘마틸다’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우는 호텔 ‘알곤퀸’ 앞을 지나가거나, 렉싱턴 주위를 산책하면서도 누구도 아닌 하루키가 떠올랐다. 고독하고, 담백하고, 멋진 것들의 원형을 그가 대부분 가져가버렸단 생각 때문에 좀 씁쓸하기도 했다.
번역을 하면서 가장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때는 뭐니뭐니해도 가로로 늘어선 글자를 제일 먼저 세로로 일으켜 세우는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머릿속 언어 시스템이 쭉쭉 스트레칭을 하는 그 감각이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그리고 번역된 문장에서 느껴지는 그 리듬의 신선함을 이 초장의 스트레칭에서 생겨나온다.
정자세로 반듯이 앉아 골똘히 번역하고 있을 전문 번역가들이 들으면 씁쓸할 수도 있겠지만, 아사히 주간에 썼던 에세이에서도 그는 줄기차게 자신의 취미는 ‘번역’이라고 말해왔었다. 어쨌든 번역을 취미 삼아 할 만큼 원고료를 두둑이 받고 있는 복 받은 작가인 건 틀림없으니까. 하루키에 따르면 창작과 번역이란 정반대의 행위가 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번역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도 꽤 많다. 그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을 전부 다 번역한 것은 개인적으로 하루키가 카버의 팬이었던 탓도 있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한 탓도 있다. 1987년 하루키의 주선으로 일본에 올 계획이었던 레이먼드 카버는 1988년 폐암으로 사망한다. 카버의 부인이 낙심한 하루키에게 그의 유물인 ‘신발’을 선물해 보냈을 정도라고 한다.
얼마 전,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 갔다가 하루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길 들었다. 보기 드물게 근사하고 멋진 출판사의 대표는 하루키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매씩의 원고를 쓰고 있고, 번역 일까지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서, 원고를 제때 넘기지 않을 것 같은 누군가를(기가 막히게 재밌는 소설을 쓰고 있는 L 선배와 무심한 나) 웃으면서 순식간에 쏘아 보았다. 나와 L 선배는 테이블 옆 책상에 앉아 ‘설레임’을 빨고 있다가 졸지에 미안한 얼굴이 되어서 “아! 그게……”라며 이래저래 말을 더듬어야 했다. (하루키의 근사한 인터뷰 기사는 <문학동네> 계간지에 실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하루 4시간씩 소설을 쓰는 아멜리 노통브 얘기를 했다. 그녀가 편집자도 모르게 쟁여놨다는 서른 몇 권쯤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쓸 수 있다면, 아마 내 인생이 많이 바뀔지 모른다고. 하루키처럼 센트럴 파크를 달리며 말똥이 많다고 투덜대는 작가와 인터뷰할 정도의 체력을 기른다면 소설가로서의 내 경력이 50도쯤 바뀔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에 실린 ‘존 어빙’과의 인터뷰였다) 하루키의 소설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건, 그가 달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믿어온 탓도 있다. 역시 장편은 끈질긴 체력 싸움이니까.
덴고와 아오마메는 만나게 되는 걸까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그런 완만하고 조용한 투입과 배출뿐이다. 이따금 간호사가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밀고, 끝이 둥근 작은 가위로 귀와 코 밖으로 비어져나온 하얀 털을 깎는다. 눈썹도 가지런히 다듬는다. 의식은 없어도 그것들은 계속 자란다. 그런 사람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덴고는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원래 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우리가 그저 편의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창조한 세상엔 죽음과 삶이 맞붙어 있고,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다르지 않아 도심 고속도로 한 복판의 계단을 내려가면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1Q84의 세계로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그가 말해왔던 완벽한 ‘우물파기’의 아득한 풍경 같다.
그가 융의 그림자와 무의식, ‘우물파기’의 과정을 그토록 세밀히 그려냈던 건 어쩜 소설이 가지는 느린 대응성과 한 땀 한 땀 직접 꿰매어야 하는 수공업적인 고통이 인간의 고독과 닮아 있기 때문인 건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그려낸 세상에선 은색 메르세데스 쿠페를 탄 ‘신’이 아오마메에게 달걀색 코트를 걸쳐주며 선의를 표시하고(<매트릭스>의 오라클이 부엌에서 쿠키를 굽는 아줌마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전직 NHK 수금원이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아파트 문을 두드리며 밀린 세금을 내라고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런 세상에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일이 56억7천 년만의 고독을 감당해야 하는 일인런지도, 덴고와 아오마메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그가 예정에도 없던 3권을 써야 했을 만큼 아득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 완결된 소설을 계속 이어 쓴다는 건, 작가에게도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창조한 세계를 바둑판 같은 창작노트에 복기하면서 이미 닫아 두었던 두꺼운 문을 열어,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불러오는 복잡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3권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를 추적하는 ‘우시카와’를 새로운 화자로 편입시켰다. 이들이 만나기 위해선 집요하고 기괴한 메신저가 필요했던 것이다.
옴진리교 사건 이후, 하루키가 발견한 것은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젊음이 사이비 종교의 엉성하고 유치한 논리에 빠졌다는 점이었다. ‘질문’은 없고 오직 ‘정답’만 존재하는, 그로선 납득하기 힘든 세계 말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는 ‘유치한 것의 본질적인 힘’이나 ‘선과 악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장소나 입장을 바꾸어가며 변하는 것, 즉 균형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후 하루키의 이야기엔 점점 냉소와 무관심 대신 관계와 헌신,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다. 이른바 막장처럼 읽혀지는 사이비 종교, 아동학대, 남성폭력과 근친상간 등이 등장하는 것도, 대중적 코드를 엮어 적극적으로 사회 현상들과 ‘접속’하려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루키 문학이 변화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초기 그의 소?이 보여주는 개인적인 허무나 고독, 무관심이 사회적인 현상들과 접합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니까 말이다.
『1Q84』는 하루키적인 것의 총합이다. ‘쥐’나 ‘양사나이’ 같은 정체불명의 캐릭터가 나오던 초기 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이 종합 선물세트가 당연히 반가울 것이고, 애매모호한 초현실성에 진저리를 쳤던 사람이라면, 현재 세계 소설계의 가장 큰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캐릭터 장르물의 매력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소설엔 하루키 자신의 분신 같은 익숙한 남자 캐릭터가 나온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덴고’는 어김없이 외로운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고요한 식물성을 표방하고 있다.
마돈나나 빅뱅을 좋아하는 것과는 마찬가지로 하루키는 이미 소설계의 록스타다. 그가 소설에 쓴 야나체크의 음반 판매량이 갑자기 늘어나거나, 그가 번역한 피츠제럴드의 소설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그의 스타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가 세계의 끝 어딘가에서 소설을 쓰더라도 팬들은 멋진 피드백을 보낼 게 틀림없다. 소설이 나오기 무섭게 ‘1Q84 해설집’이 나오고, ‘아오마메의 다이어트용 샐러드 레시피’가 나오는 작가가 지구상에 몇이나 될까.
체호프가 말했어.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고.
덴고를 위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던 아오마메는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걸까. 하루키는 체호프가 만든 세상에서 저 멀리 돌아 나온 듯하다. 아오마메의 이마를 겨누던 차가운 총은 기어이 발사되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에서 삶 쪽으로, 덴고가 존재하는 세상 쪽으로 조금씩 이동해 기어 올라오니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3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은 채,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에 다소 안도하다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실망하면서.
“하루키가 진정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못 생겼단 증거도 없잖아.”
“맙소사.”
문득 소설가가 된 어느 날, 고려대학교 교내 서점에서
“여전히, 일관되게 잘생기지 않은 게 정말 마음에 들어요. 무라카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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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무라카미라면 차라리 ‘무라카미 류’가 낫잖아요.”
라고 충고하는 조숙한 얼굴의 후배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내 경우, 여행을 떠날 때 늘 가방 속엔 하루키의 책이 들어 있었다. 동행인의 수면을 방해하는 게 미안해서 싱가폴 메리어트 호텔 화장실 비데 위에 앉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었다. 얼마 전 일본 여행 때는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신주쿠와 하라주쿠 주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빅스 바이더벡의 연주를 꽤 오래된 탄노이 스피커로 틀어주는 'DUG' 같은 재즈 클럽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증과 불면증에 하루키 책만 한 약은 없다. 그건 세코날(수면제)보다 유용하고, 벤조디아제핀 같은 신경안정제보다 안전하다. 유쾌한 커트 보네것도, 발랄한 우디 앨런이나 닉 혼비의 유쾌한 소설들도 내겐 하루키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의 문장은 여행 중 멀미를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문장 속에 달팽이관과 고막 사이를 조이고 여는 장치가 들어 있는 것 같다. 문장과 문장 사이는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그 틈을 이용해 버스를 타는 중에도 바깥 풍경을 놓치는 위험 없이, 여행 동안 얇은 책 한 권쯤은 전부 다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꼭 두툼한 스테이크를 소스까지 말끔히 먹어치운 것 같은 포만감을 준다. 기왕 디저트까지 곁들인다면 대단히 재미있는 레이몬드 챈들러나 레이몬드 카버 같은 ‘레이몬드 브라더스’의 책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여행 중이라면 그것은 그저 내게 옵션 일뿐이다.
- <페이퍼> 북 칼럼 중
눈여겨보던 작가가 먼 이국의 도시에 체류하며 글을 쓴다거나, 마라톤 대회를 완주했다거나, 취미로 번역을 한단 기사를 보면 어김없이 하루키가 떠올랐다. ‘마틸다’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우는 호텔 ‘알곤퀸’ 앞을 지나가거나, 렉싱턴 주위를 산책하면서도 누구도 아닌 하루키가 떠올랐다. 고독하고, 담백하고, 멋진 것들의 원형을 그가 대부분 가져가버렸단 생각 때문에 좀 씁쓸하기도 했다.
번역을 하면서 가장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때는 뭐니뭐니해도 가로로 늘어선 글자를 제일 먼저 세로로 일으켜 세우는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때 머릿속 언어 시스템이 쭉쭉 스트레칭을 하는 그 감각이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그리고 번역된 문장에서 느껴지는 그 리듬의 신선함을 이 초장의 스트레칭에서 생겨나온다.
- 『비밀의 숲』
정자세로 반듯이 앉아 골똘히 번역하고 있을 전문 번역가들이 들으면 씁쓸할 수도 있겠지만, 아사히 주간에 썼던 에세이에서도 그는 줄기차게 자신의 취미는 ‘번역’이라고 말해왔었다. 어쨌든 번역을 취미 삼아 할 만큼 원고료를 두둑이 받고 있는 복 받은 작가인 건 틀림없으니까. 하루키에 따르면 창작과 번역이란 정반대의 행위가 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번역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도 꽤 많다. 그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을 전부 다 번역한 것은 개인적으로 하루키가 카버의 팬이었던 탓도 있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작용한 탓도 있다. 1987년 하루키의 주선으로 일본에 올 계획이었던 레이먼드 카버는 1988년 폐암으로 사망한다. 카버의 부인이 낙심한 하루키에게 그의 유물인 ‘신발’을 선물해 보냈을 정도라고 한다.
얼마 전, 파주에 있는 출판사에 갔다가 하루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길 들었다. 보기 드물게 근사하고 멋진 출판사의 대표는 하루키가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매씩의 원고를 쓰고 있고, 번역 일까지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서, 원고를 제때 넘기지 않을 것 같은 누군가를(기가 막히게 재밌는 소설을 쓰고 있는 L 선배와 무심한 나) 웃으면서 순식간에 쏘아 보았다. 나와 L 선배는 테이블 옆 책상에 앉아 ‘설레임’을 빨고 있다가 졸지에 미안한 얼굴이 되어서 “아! 그게……”라며 이래저래 말을 더듬어야 했다. (하루키의 근사한 인터뷰 기사는 <문학동네> 계간지에 실릴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하루 4시간씩 소설을 쓰는 아멜리 노통브 얘기를 했다. 그녀가 편집자도 모르게 쟁여놨다는 서른 몇 권쯤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그리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쓸 수 있다면, 아마 내 인생이 많이 바뀔지 모른다고. 하루키처럼 센트럴 파크를 달리며 말똥이 많다고 투덜대는 작가와 인터뷰할 정도의 체력을 기른다면 소설가로서의 내 경력이 50도쯤 바뀔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에 실린 ‘존 어빙’과의 인터뷰였다) 하루키의 소설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건, 그가 달리기를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믿어온 탓도 있다. 역시 장편은 끈질긴 체력 싸움이니까.
덴고와 아오마메는 만나게 되는 걸까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그런 완만하고 조용한 투입과 배출뿐이다. 이따금 간호사가 전기면도기로 수염을 밀고, 끝이 둥근 작은 가위로 귀와 코 밖으로 비어져나온 하얀 털을 깎는다. 눈썹도 가지런히 다듬는다. 의식은 없어도 그것들은 계속 자란다. 그런 사람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덴고는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원래 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기는 한 걸까. 우리가 그저 편의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 『1Q84』 3권
그가 융의 그림자와 무의식, ‘우물파기’의 과정을 그토록 세밀히 그려냈던 건 어쩜 소설이 가지는 느린 대응성과 한 땀 한 땀 직접 꿰매어야 하는 수공업적인 고통이 인간의 고독과 닮아 있기 때문인 건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그려낸 세상에선 은색 메르세데스 쿠페를 탄 ‘신’이 아오마메에게 달걀색 코트를 걸쳐주며 선의를 표시하고(<매트릭스>의 오라클이 부엌에서 쿠키를 굽는 아줌마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전직 NHK 수금원이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아파트 문을 두드리며 밀린 세금을 내라고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런 세상에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일이 56억7천 년만의 고독을 감당해야 하는 일인런지도, 덴고와 아오마메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그가 예정에도 없던 3권을 써야 했을 만큼 아득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 완결된 소설을 계속 이어 쓴다는 건, 작가에게도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창조한 세계를 바둑판 같은 창작노트에 복기하면서 이미 닫아 두었던 두꺼운 문을 열어,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불러오는 복잡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3권에서 덴고와 아오마메를 추적하는 ‘우시카와’를 새로운 화자로 편입시켰다. 이들이 만나기 위해선 집요하고 기괴한 메신저가 필요했던 것이다.
옴진리교 사건 이후, 하루키가 발견한 것은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수많은 젊음이 사이비 종교의 엉성하고 유치한 논리에 빠졌다는 점이었다. ‘질문’은 없고 오직 ‘정답’만 존재하는, 그로선 납득하기 힘든 세계 말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는 ‘유치한 것의 본질적인 힘’이나 ‘선과 악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장소나 입장을 바꾸어가며 변하는 것, 즉 균형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후 하루키의 이야기엔 점점 냉소와 무관심 대신 관계와 헌신, 균형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다. 이른바 막장처럼 읽혀지는 사이비 종교, 아동학대, 남성폭력과 근친상간 등이 등장하는 것도, 대중적 코드를 엮어 적극적으로 사회 현상들과 ‘접속’하려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하루키 문학이 변화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초기 그의 소?이 보여주는 개인적인 허무나 고독, 무관심이 사회적인 현상들과 접합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니까 말이다.
『1Q84』는 하루키적인 것의 총합이다. ‘쥐’나 ‘양사나이’ 같은 정체불명의 캐릭터가 나오던 초기 소설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이 종합 선물세트가 당연히 반가울 것이고, 애매모호한 초현실성에 진저리를 쳤던 사람이라면, 현재 세계 소설계의 가장 큰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캐릭터 장르물의 매력을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소설엔 하루키 자신의 분신 같은 익숙한 남자 캐릭터가 나온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덴고’는 어김없이 외로운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고요한 식물성을 표방하고 있다.
마돈나나 빅뱅을 좋아하는 것과는 마찬가지로 하루키는 이미 소설계의 록스타다. 그가 소설에 쓴 야나체크의 음반 판매량이 갑자기 늘어나거나, 그가 번역한 피츠제럴드의 소설이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그의 스타성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가 세계의 끝 어딘가에서 소설을 쓰더라도 팬들은 멋진 피드백을 보낼 게 틀림없다. 소설이 나오기 무섭게 ‘1Q84 해설집’이 나오고, ‘아오마메의 다이어트용 샐러드 레시피’가 나오는 작가가 지구상에 몇이나 될까.
체호프가 말했어.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왔다면 그건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고.
덴고를 위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던 아오마메는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걸까. 하루키는 체호프가 만든 세상에서 저 멀리 돌아 나온 듯하다. 아오마메의 이마를 겨누던 차가운 총은 기어이 발사되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에서 삶 쪽으로, 덴고가 존재하는 세상 쪽으로 조금씩 이동해 기어 올라오니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3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은 채, 나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에 다소 안도하다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실망하면서.
7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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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백영옥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prognose
2012.01.02
앙ㅋ
2011.10.26
nobody
2010.08.31
이젠 연재 안하시는 줄 알았어요.
(저의 무관심은 아니고 제가 알고보니 컴맹이였네요^^;;)
오늘 아이폰 예스 어플 업데이트하다 백작님 칼럼을 읽게됐어요.
(이럴 땐 핸펀이 기특해서 엉덩이?라도 토닥여주고싶다는~~^^*)
이제 핸펀으로 늘 확인하면 절대 스킵하지 않겠죠~^^
(그동안 못 읽었던 글들 쭈욱~ 읽어야겠어요)
문학동네 계간지에 실린 하루키 인터뷰는 보셨나요?
하루키 매니아들 여럿 쓰러졌을것 같던데...
전 그렇게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 살짝 무섭더라구요~ ㅎㅎ
오랜만에 백작님 글을 찾아내 방방뜨고 있는 nobody 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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