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만인보’ 넘어 ‘만물보’까지, 인간과 자연, 우주의 상응에 기여하기를”
1980년 여름, 내란 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구상을 시작해, 만 30년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총 작품 수 4,001편, 조연급 정도만 포함해도 등장인물이 5,600여 명에 이른다.
글 : 김수영
201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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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쓴 인물 백과사전’ 『만인보』가 25년 만에 완간되었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아래와 같은 추천사를 달았다.

“고은 시인이 『만인보』 연재를 시작하면서 3천 편쯤 쓸 작정이라고 했을 때 ‘말이 그렇지’라는 게 나의 속마음이었다. 1~3권 300여 편이 한꺼번에 간행되면서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 이제 4,001편을 담은 『만인보』 30권이 완간된다. 완간이라지만 앞으로 5천 편인들 못 써낼 것 없을 듯한 기운이 이번의 마지막 네 권에 넘쳐난다.”

1980년 여름, 내란 음모 및 계엄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구상을 시작해, 만 30년 만에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총 작품 수 4,001편, 조연급 정도만 포함해도 등장인물이 5,600여 명에 이른다. 완간을 기념하여 기존에 출간된 1~26권을 출간 시기별로 합본하고, 27~30권을 더하여 열한 권의 양장본과 부록 한 권으로 묶어 냈다.

시인은 원고 탈고 후에도 전집 출판에 맞추어 약 8개월간 역사적 사실 관계와 인명 착오 등의 오류를 바로잡고, 4천 편의 시를 일일이 손봤다. 세계 시단에서도 ‘오늘날의 문학에서 가장 비범한 기획’이라고 평가받는 『만인보』 완간을 기념하여 지난 4월 9일 프레스센터에서 완간 기념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사회자는 완간을 기념해 2008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로버트 하스, 리영희 선생이 보내온 축전을 소개했다. 로버트 하스는 “전 세계에 주는 선물이자 한국 국민의 생명력에 바치는 찬사”라고 전해 왔고, 병상 중에 있는 리영희 선생은 “시의 형식을 빌려 민족사의 애환이 농축된 이 작품으로 많은 즐거움에 도취된다. 고은 시인의 안경을 통해 나는 경의감을 느끼며 역사를 본다”고 축하를 보내왔다.

고은 시인은 이어 『만인보』 완간 소회를 밝혔다.

“지난 25년의 세월은, 『만인보』 속에서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자연이었습니다. 『만인보』 안에는 각각 다른 시기의 얼굴들, 다른 방향의 얼굴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선재해 있지만, 하나의 명제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상과의 약속을 이걸로 지켰습니다.

앞으로 어느 날 31권을 쓰고 있는 나의 혼백을 누군가가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만인보』 이후의 『만인보』 작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귀납과 연역이라는 것. 서사와 서정이라는 것. 서술과 묘사라는 것. 기억과 상상이라는 것. 그리고 문학과 역사라는 것, 현실과 허구라는 것, 시와 시가 아니라는 것…… 이런 것의 합신(合身)이 만인보의 의미일지 모릅니다. 시는 우주 만상의 화합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인보’는 인간을 넘어서 ‘만물보’까지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의 상응에 기여하기를 꿈꿉니다.”


이어 간담회 자리를 위해 준비한 새 낱말을 소개하며, 모국어 존속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기도 했다.

“어젯밤 ‘아련가련하다’는 말을 지었습니다. 아련하다는 말보다 덜 아련하다는 뜻입니다. ‘아련하다’는 말은 내가 처음 들은 시어였습니다. 그때가 나는 운명의 기억처럼 가슴이 뜨겁거든요. 고향의 무명 시인이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보다는 조금 미치지 못하는 말로, 선배의 뒤에 서 있는 태도로써, 아련보다는 못한 말로 ‘아련가련’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또 ‘오련가련’이라는 말도 지었습니다. 온 듯함과 간 듯함을 합한 말입니다. 오는 것도 아닌, 가는 것도 아닌 애매한 의미입니다. 서구의 말과 달리 우리는 애매한 언어를 피 속에 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나는 내 앞에 오는 바람을 ‘가슴 바람’, 등 뒤에서 오는 바람을 ‘등 바람’이라고 부릅니다. 앞과 뒤라는 거시적인 방향을 육화(肉化)시켜서 내 몸의 언어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앞으로 나는 모국어의 혁신적인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서라도 시어 하나하나를 지어 작품 안에 넣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수많은 모국어의 사어(死語)에 대한 진언이기도 합니다. 또한 모국어의 100년이 보장될 수 없는 날 속에서 언어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분과 오열이 담겨 있습니다. 말의 계승 못지않게 말의 처음을 여는 일이 시인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나의 만남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적인 것이다. 이 공공성이야말로 개인적인 망각과 방임으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진실의 기념으로 그 일회성을 막아야 한다. 하잘것없는 만남 하나에도 거기에는 역사의 불가결성이 있다.(「만인보」 1권 ‘시인의 말’)


모국어 존속의 우려를 드러냈는데, 모국어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내 우려일 뿐 아니라 지구상의 우려입니다. 뛰어난 시어를 구사하는 시인들이 갖는 예감이라는 것은 거의 과학적일 정도로 정확하죠. 지금 지구상에 수많은 언어가 남았지만, 수많은 언어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21세기가 다하면 백 년이죠. 절반 내지 90퍼센트가 소멸될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이 어떻게 될까?’ ‘백 년 뒤의 시인이 모국어를 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30권을 완간하면서, 5?18 이야기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만인보』를 마무리 지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내 렌즈, 안경을 배제하고, 이 자연의 현상을 보는 것처럼 무심히 작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자연이라는 것은 해방, 분단의 시작이었고, 6?25라는 전쟁에서 생사를 분에 넘치게 경험했습니다. 역사가 하나의 인간의 자연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도적으로 마지막에 광주를 쓰려는 게 아니라 계절의 이동에 의해 써진 것이 광주입니다. 진혼은 의미가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진혼으로 끝나선 안 됩니다. 내 상상 속에서 죽음을 삶으로 연장시키자. 그들의 죽음을 시인까지 그렇게 치부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삶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중단된 것이니 그 이후를 재생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세상에 단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주인공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글을 쓰셨습니다. 돌아가신 두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생각도 책 속에 담겨 있는데요.

『만인보』에서는 사람에 대해 차이를 두지 않는 게 내 윤리입니다. 나는 고독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곳에 대해서 고요하게 가치를 부정할 때도 있습니다. 동참하고 싶지 않은, 중얼거리고 싶은 시각도 있죠.”

이제 완간을 했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만인보』의 본질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끝이라는 말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노름꾼들이 5,000원 벌었다고 거기서 끝내지 않죠.(웃음) 그게 천박한 게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하고 싶죠. 모든 인간의 항성입니다. 시인도 거기에 예외일 수가 없죠. 지금 쓴 것도 끝이다 하면 끝이지만,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인지도 모르죠.”

특별이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습니까?

“증거 인멸을 해서,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좌중 웃음) 내가 쓴 것 같지도 않아요. 다시 읽을 때야 생각나더군요. 쓴 기억도 없어요.”

요즘 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 세계의 우울함이 만연한 것 같아요. 우리 내부가 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한마디나 티끌 하나가 우주다,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문학에서는 내면보다 외부를 숭상하는 커다란 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아라는 내면, 탐험하는 것, 요즘의 그런 것에 비해 난 다른 시를 쓰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십니까?

“잠자지는 않을 거예요.(웃음) 쓰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아직 못 쓴 사람이 있어서, 앞으로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이승에서 본능이 작동하여 내 의도와 상관없이 진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줘야 합니다. 백낙청 교수가 ‘5,000편 더 쓸 수도 있겠다’며 격려를 해 줬는데, 약속은 안 합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고은 #시인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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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rtex42

2012.03.12

만인보, 기획의 힘. 대단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확장을 하고 싶은 게, 인간의 항성이라는 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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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2.09

완간의 기쁨을 많은이들과 나누셨으리라 믿습니다. 다음새 작품은 언제 출간될지 기다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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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카스에프

2010.10.07

2007년도의 일이다.
안성을 가는 남부터미널 버스를 타는데
버스기사님 바로 뒷자리의 어느분을 스치듯 마주하고 뒷자리로 걸어가면서
낯이익는데 누구지..고민을 하다가..차가 출발하면서...아~~~~
고은선생님.. 차마 용기가 나지않아 싸인도 못받고
안성톨게이트 지나 나보다 먼저 내리시더라.
오늘 2010년 고은선생님의 노벨문학상 유력이..지난 8년보다
기대가 되는건. 만인보의 완간이 시대의 기념비가 되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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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summer2277@naver.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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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한국의 대표적인 참여시인. 본명은 고은태로 1933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하였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법명은 일초(一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 활동을 하다가 1958년 『현대문학』에 시「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등을 추천받아 등단하였다. 1960년 첫 시집『피안감성』간행하였으며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기도 하였다. 초기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한 반면 이후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을 표출하었다. 영웅주의에 물들지 않고 진솔한 삶의 내면을 드러내는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19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출판하며 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으며 이후 시ㆍ소설ㆍ수필ㆍ평론 등 100여 권의 저서를 간행하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섰으며 계속해서 1984년『고은시전집』을 냈고 1986년『만인보』간행을 시작하였다. 1987~94년 서사시『백두산』, 1999년 시집『머나먼 길』을 간행하고, 미국 하바드대학 하바드옌칭 연구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시선집이 간행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회원 한국대표이자 서울대학교 초빙교수, 단국대학교 석좌교수이다. 저서로 『허공』,『개념의 숲』,『오십년의 사춘기』, 『고은 시 선집』, 『고은 전집』(총 38권) 등 1백여 종이 있으며, 2010년에는 연작시편 『만인보』가 전 30권으로 완간되었다. 2011년에는 작품활동 53년 만에 처음으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연시집 『상화 시편』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등 국내 문학상 10여 개를 비롯하여 스웨덴 시카다 상, 노르웨이 비외르손 훈장 등 국내외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다. 최근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한국의 첫 번재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