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옷의 사내 어둠의 열정을 입다
그는 반항적인 록큰롤러이자, 동시에 컨트리 뮤직의 전통을 계승하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Man in Black’이란 닉네임이 말해주듯 검은 옷을 즐겨 입었고 바리톤의 음성과 냉소적인 눈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201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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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니 캐시의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펑크 록이나 갱스터 랩의 원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50년대에 이미 “죽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의 노랫말에 그려진 등장인물들은 살인자, 강도, 폭력배, 마약쟁이 등이었다. 그는 반항적인 록큰롤러이자, 동시에 컨트리 뮤직의 전통을 계승하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Man in Black’이란 닉네임이 말해주듯 검은 옷을 즐겨 입었고 바리톤의 음성과 냉소적인 눈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자니 캐시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2년 2월 26일 미국 남부 아칸소 주 킹슬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전형적인 백인 가장으로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자니 캐시와 그의 형은 어려서부터 농장에 나가 부친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렇듯 근근이 빈곤한 삶을 이어가던 와중에 엎친 데 덮치듯 비극이 그의 가족을 덮친다. 자니 캐시와는 두 살 터울의 형이자 일곱 남매 중 가장 절친한 형제였던 잭 캐시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일하던 중 실수로 회전 톱날 테이블에 빠져 버렸고 몸이 거의 두 동강이 난 채 일주일을 고통에 신음하다 결국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린다. 목사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의지했던 장남의 어이없는 죽음에 그의 부친은 깊이 절망했고 그 모든 울분은 동생인 자니 캐시를 향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앙코르>에서도 묘사되었듯 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평생 그를 괴롭히던 트라우마였다고 한다.) 자니는 가족 사이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길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냉전이 한창이었던 1950년대에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군에 입대하여 독일로 건너가게 된다.
군인 시절 그는 본격적으로 기타를 치며 작곡을 시작한다. 이미 그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곡 쓰기 감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Folsom Prison Bluse」는 이 시기에 쓰인 곡으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내의 슬픈 운명을 리얼하게 그려낸 노랫말은 전설적인 흑인 블루스 맨인 리드 벨리의 인생을 묘사한 듯한 것이었다. 그 현실성은 실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들마저 감동시켰고, 훗날 폴섬 교도소에서의 공연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그 실황을 생생히 담은 라이브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범죄자 내면의 어둠을 이해하고 그려내는 그의 이러한 재능은 이후의 활약에 큰 버팀목이 되었지만, 또한 그의 영혼이 안고 있는 어두운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1954년 공군을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군 복무 시절 만난 여자친구 비비안 리베르토와 결혼하고 일자리를 찾아 멤피스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외판원 등의 일을 하며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마침 그 무렵은 록큰롤의 황금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있던 시기였다. 멤피스 거리는 태풍의 눈이 되었다. 바로 그 거리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배출해낸 선 레코드가 있던 까닭이었다. 그와 그의 밴드는 선 스튜디오에서 오디션을 치르게 되었고 사장인 샘 필립스(엘비스를 발굴해 낸 장본인)의 눈에 들어 레코딩을 하고 데뷔의 기회를 거머쥐게 된다. 그때 함께 오디션을 본 밴드 친구들인 루카서 퍼킨스(기타)와 마셜 그랜트(베이스)는 그대로 자니의 백 밴드가 되어(오디션은 자니 캐시의 개인적인 의사였을 뿐으로 나머지 멤버는 단지 자니의 부탁에 의해 참여한 것이었다) ‘테네시 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이렇게 데뷔하게 된 ‘자니 캐시 앤 테네시 투’는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시작된 록큰롤 붐을 타고 차례차례 히트곡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Hey Porter」 「Cry! Cry! Cry!」 「Folsom Prison Bluse」 「I Walk the Line」 「Get Rhythm」 「Big River」 등등……. 1950년대 후반은 명실상부 록큰롤의 황금시대였지만 그중에서도 선 레코드에서 데뷔한 아티스트들의 활약은 경이적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칼 퍼킨스, 로이 오비슨 그리고 자니 캐시 등 그들이 가는 곳 어디건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뮤지션에게 음반 판매 수익이란 보잘것없는 수입원이었고, 실질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전국을 돌며 투어를 해야만 했다. 자니 캐시 또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에 할애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자니는 향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만한 운명적인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는 같은 투어(당시의 투어란 유명 연예인들이 합동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참가하고 있던 멤버들 중 컨트리 음악계의 명문이라 할 만한 카터 패밀리의 딸 준 카터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야말로 자니의 운명을 변화시킬 운명의 여인이었다. 카터 패밀리는 2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는 컨트리 뮤직 붐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인기 밴드였다. 여자 기타리스트 메이벨 카터는 컨트리 기타의 초석을 쌓은 명연주자였으며 오토하프라는 악기를(크로마하프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세상에 처음 알린 것도 멤버의 한 사람인 사라 카터(준 카터의 어머니)였다. 사실 캐시는 어린 시절부터 카터 패밀리의 열성적 팬이었던 터였다. 자신이 그런 카터 패밀리의 구성원과 사랑에 빠지게 되다니…….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꿈의 실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기혼녀였고 아이도 있었다. 물론 자니 또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기에 둘의 사랑은 허용될 리 만무했다. 50년대라는 시대의 탓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탓이다. 한마디로 금단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혹은 당연하게도 그렇듯 절박한 상황이 오히려 그 둘의 가슴에 불을 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컨트리 음악의 세계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준 카터는 투어의 연속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고 그에 따른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을 하게 되지만 여자인 그녀에 대해선 특히 비난이 심했고 그 후 자니 또한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은 좀체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몇 번이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자니였지만 준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그녀 또한 자니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녀에게 있어 불륜이란 씻을 수 없는 큰 죄였던 것이다. 자니는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허한 마음을 달래려 매일 밤을 술과 마약에 빠져 보내게 된다.
당시 록큰롤 무브먼트의 총아였던 선 레코드 소속 백인 록큰롤 뮤지션들의 개성적인 스타일은 초창기 록큰롤의 모태가 되는 사운드적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전에도 말한 바 있듯이 록큰롤이란 일종의 크로스오버 뮤직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자니와 준은 현재에 이르러 보통 컨트리라 칭해지는 스타일인 반면, 제리 리 루이스나 칼 퍼킨스의 사운드는 록큰롤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엘비스의 음악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사운드적 특성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백인 록큰롤러의 대부분은 컨트리 뮤직의 세계에서 점차 록큰롤의 세계로 접근해 갔고 반대로 척 베리나 보 디들리 그리고 리틀 리처드와 같은 흑인 록큰롤러들은 블루스의 세계로부터 그들만의 록큰롤을 확장시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그러한 장르 구분 자체가 없었기에 장르의 테두리를 넘어 왕성한 음악적 교류가 가능했던 것일 게다.
1958년 드디어 대규모 레코드 회사 컬럼비아와 계약한 그는 록큰롤러라기보단 컨트리 뮤직의 대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나간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 비틀즈를 위시한 영국 밴드 주도의 록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며 컨트리 뮤직의 인기는 급격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불법 약물 소지에 의한 체포와 재판, 준과의 불륜이 세간에 불거지며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게다가 알코올, 마약 중독의 증세가 심각해져서 갖은 기행을 일삼았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준 카터였다. 자니 캐시는 1968년 긴 세월 동안의 꿈이었던 준과의 결혼을 마침내 실현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준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은 자니는 그 해에 자신의 음악적 재기를 모색하며 특별한 공연을 기획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 출발점인 「Folsom Prison Bluse」의 배경이기도 한 폴섬 교도소에서의 공연이라는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죄수들로부터 수많은 팬레터를 받고 있던 그는 이전부터 교도소 내에서의 콘서트를 성사시키려 교도소 측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6년 동안이나 계속된 밀고 당기기 끝에 허가를 얻어내게 된다. 결국 그는 폴섬 형무소에서 예의 전설적인 콘서트를 열었고 그 실황을 그대로 담은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캘리포니아 최대의 감옥인 산 쿠엔틴 형무소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을 역시 라이브 앨범으로 만들었고, 앨범은 무려 전미 차트 1위에 오르게 된다. 그것은 앨범 중시의 시대, 그리고 반체제 운동의 시대와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그의 성공적인 재기를 증명하는 작품이 되었다.
그 후 자니 캐시는 단순한 컨트리 앨범이 아닌 제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들을 차례차례 발표한다. 베트남 전쟁을 통렬히 비판한 「Man in Black」,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노래한 「Bitter Tears」, 서부 개척 역사의 이면을 꼬집은 「The True West」 등을 발표하고 애처 준 카터와의 작업물인 「Duet」을 발표하기도 한다. 1993년에는 U2의 앨범의 레코딩에 참여하게 되는데 반골정신의 집합체와도 같은 후배 뮤지션들과의 작업은 그의 록큰롤러로서의 애티튜드가 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데프젬 레이블의 설립자이며 비스티 보이즈를 발굴해낸 릭 루빈의 아메리칸 레코드와 계약한다. 그 이름 그대로 「American Recordings」란 타이틀의 앨범을 발표, 새로운 시대의 록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만들어낸다. 기존 다른 아티스트의 곡들을 자신의 독자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94년에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컨트리의 대가로 알려진 전설의 사내는 환갑의 나이가 지나 다시 젊은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열정으로 활동에 임했고 손주뻘 되는 젊뫀 세대의 뮤지션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가지며 음악적 회춘을 모색했다. 2002년에는 나인인치네일스의 「Hurt」를 커버했고 그 곡은 그가 녹음한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2003년 5월 아내 준 카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인 9월 12일 자니 또한 그녀를 따라가듯 조용히 숨을 거둔다. 두 달 후 11월 그의 유작 앨범 이 발표되었다.
자니 캐시의 음악은 록큰롤의 반골 정신, 민속 음악의 목가적 요소, 가스펠의 경건함 그리고 블루스와 컨트리의 비탄과 절망이 항상 넘쳐났다. 그는 컨트리의 계관 시인이었다. 그는 소외받는 자들의 절망을 대변하며 어둠의 세계를 노래했다. 사운드는 독특하면서도 극히 단순했다. 2비트의 트레인 비트에 실린 목소리는 노래라기보다 차라리 읊조림에 가까웠다. 그는 언제나 조용히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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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 캐시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2년 2월 26일 미국 남부 아칸소 주 킹슬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전형적인 백인 가장으로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자니 캐시와 그의 형은 어려서부터 농장에 나가 부친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그렇듯 근근이 빈곤한 삶을 이어가던 와중에 엎친 데 덮치듯 비극이 그의 가족을 덮친다. 자니 캐시와는 두 살 터울의 형이자 일곱 남매 중 가장 절친한 형제였던 잭 캐시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일하던 중 실수로 회전 톱날 테이블에 빠져 버렸고 몸이 거의 두 동강이 난 채 일주일을 고통에 신음하다 결국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린다. 목사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의지했던 장남의 어이없는 죽음에 그의 부친은 깊이 절망했고 그 모든 울분은 동생인 자니 캐시를 향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앙코르>에서도 묘사되었듯 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평생 그를 괴롭히던 트라우마였다고 한다.) 자니는 가족 사이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길이 없었다면 아마 그는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냉전이 한창이었던 1950년대에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군에 입대하여 독일로 건너가게 된다.
군인 시절 그는 본격적으로 기타를 치며 작곡을 시작한다. 이미 그에게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곡 쓰기 감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Folsom Prison Bluse」는 이 시기에 쓰인 곡으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사내의 슬픈 운명을 리얼하게 그려낸 노랫말은 전설적인 흑인 블루스 맨인 리드 벨리의 인생을 묘사한 듯한 것이었다. 그 현실성은 실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범죄자들마저 감동시켰고, 훗날 폴섬 교도소에서의 공연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그 실황을 생생히 담은 라이브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다. 범죄자 내면의 어둠을 이해하고 그려내는 그의 이러한 재능은 이후의 활약에 큰 버팀목이 되었지만, 또한 그의 영혼이 안고 있는 어두운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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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공군을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군 복무 시절 만난 여자친구 비비안 리베르토와 결혼하고 일자리를 찾아 멤피스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외판원 등의 일을 하며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마침 그 무렵은 록큰롤의 황금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있던 시기였다. 멤피스 거리는 태풍의 눈이 되었다. 바로 그 거리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배출해낸 선 레코드가 있던 까닭이었다. 그와 그의 밴드는 선 스튜디오에서 오디션을 치르게 되었고 사장인 샘 필립스(엘비스를 발굴해 낸 장본인)의 눈에 들어 레코딩을 하고 데뷔의 기회를 거머쥐게 된다. 그때 함께 오디션을 본 밴드 친구들인 루카서 퍼킨스(기타)와 마셜 그랜트(베이스)는 그대로 자니의 백 밴드가 되어(오디션은 자니 캐시의 개인적인 의사였을 뿐으로 나머지 멤버는 단지 자니의 부탁에 의해 참여한 것이었다) ‘테네시 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이렇게 데뷔하게 된 ‘자니 캐시 앤 테네시 투’는 영화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으로 시작된 록큰롤 붐을 타고 차례차례 히트곡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Hey Porter」 「Cry! Cry! Cry!」 「Folsom Prison Bluse」 「I Walk the Line」 「Get Rhythm」 「Big River」 등등……. 1950년대 후반은 명실상부 록큰롤의 황금시대였지만 그중에서도 선 레코드에서 데뷔한 아티스트들의 활약은 경이적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제리 리 루이스, 칼 퍼킨스, 로이 오비슨 그리고 자니 캐시 등 그들이 가는 곳 어디건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뮤지션에게 음반 판매 수익이란 보잘것없는 수입원이었고, 실질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전국을 돌며 투어를 해야만 했다. 자니 캐시 또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여행에 할애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자니는 향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만한 운명적인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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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같은 투어(당시의 투어란 유명 연예인들이 합동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다)에 참가하고 있던 멤버들 중 컨트리 음악계의 명문이라 할 만한 카터 패밀리의 딸 준 카터를 알게 된 것이다. 그녀야말로 자니의 운명을 변화시킬 운명의 여인이었다. 카터 패밀리는 2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는 컨트리 뮤직 붐 속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인기 밴드였다. 여자 기타리스트 메이벨 카터는 컨트리 기타의 초석을 쌓은 명연주자였으며 오토하프라는 악기를(크로마하프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세상에 처음 알린 것도 멤버의 한 사람인 사라 카터(준 카터의 어머니)였다. 사실 캐시는 어린 시절부터 카터 패밀리의 열성적 팬이었던 터였다. 자신이 그런 카터 패밀리의 구성원과 사랑에 빠지게 되다니…….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꿈의 실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기혼녀였고 아이도 있었다. 물론 자니 또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기에 둘의 사랑은 허용될 리 만무했다. 50년대라는 시대의 탓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탓이다. 한마디로 금단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혹은 당연하게도 그렇듯 절박한 상황이 오히려 그 둘의 가슴에 불을 붙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컨트리 음악의 세계란 예나 지금이나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준 카터는 투어의 연속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고 그에 따른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을 하게 되지만 여자인 그녀에 대해선 특히 비난이 심했고 그 후 자니 또한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은 좀체 용인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몇 번이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자니였지만 준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그녀 또한 자니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녀에게 있어 불륜이란 씻을 수 없는 큰 죄였던 것이다. 자니는 그러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허한 마음을 달래려 매일 밤을 술과 마약에 빠져 보내게 된다.
당시 록큰롤 무브먼트의 총아였던 선 레코드 소속 백인 록큰롤 뮤지션들의 개성적인 스타일은 초창기 록큰롤의 모태가 되는 사운드적 다양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전에도 말한 바 있듯이 록큰롤이란 일종의 크로스오버 뮤직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자니와 준은 현재에 이르러 보통 컨트리라 칭해지는 스타일인 반면, 제리 리 루이스나 칼 퍼킨스의 사운드는 록큰롤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엘비스의 음악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사운드적 특성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고 할 만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백인 록큰롤러의 대부분은 컨트리 뮤직의 세계에서 점차 록큰롤의 세계로 접근해 갔고 반대로 척 베리나 보 디들리 그리고 리틀 리처드와 같은 흑인 록큰롤러들은 블루스의 세계로부터 그들만의 록큰롤을 확장시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그러한 장르 구분 자체가 없었기에 장르의 테두리를 넘어 왕성한 음악적 교류가 가능했던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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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드디어 대규모 레코드 회사 컬럼비아와 계약한 그는 록큰롤러라기보단 컨트리 뮤직의 대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나간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와 비틀즈를 위시한 영국 밴드 주도의 록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며 컨트리 뮤직의 인기는 급격하게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자신의 불법 약물 소지에 의한 체포와 재판, 준과의 불륜이 세간에 불거지며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게다가 알코올, 마약 중독의 증세가 심각해져서 갖은 기행을 일삼았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준 카터였다. 자니 캐시는 1968년 긴 세월 동안의 꿈이었던 준과의 결혼을 마침내 실현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준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 마음을 다잡은 자니는 그 해에 자신의 음악적 재기를 모색하며 특별한 공연을 기획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 출발점인 「Folsom Prison Bluse」의 배경이기도 한 폴섬 교도소에서의 공연이라는 파격적인 아이디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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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들로부터 수많은 팬레터를 받고 있던 그는 이전부터 교도소 내에서의 콘서트를 성사시키려 교도소 측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고 6년 동안이나 계속된 밀고 당기기 끝에 허가를 얻어내게 된다. 결국 그는 폴섬 형무소에서 예의 전설적인 콘서트를 열었고 그 실황을 그대로 담은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캘리포니아 최대의 감옥인 산 쿠엔틴 형무소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을 역시 라이브 앨범으로 만들었고, 앨범은 무려 전미 차트 1위에 오르게 된다. 그것은 앨범 중시의 시대, 그리고 반체제 운동의 시대와 맞물려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그의 성공적인 재기를 증명하는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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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자니 캐시는 단순한 컨트리 앨범이 아닌 제작이라 불릴 만한 작품들을 차례차례 발표한다. 베트남 전쟁을 통렬히 비판한 「Man in Black」,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노래한 「Bitter Tears」, 서부 개척 역사의 이면을 꼬집은 「The True West」 등을 발표하고 애처 준 카터와의 작업물인 「Duet」을 발표하기도 한다. 1993년에는 U2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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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의 대가로 알려진 전설의 사내는 환갑의 나이가 지나 다시 젊은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열정으로 활동에 임했고 손주뻘 되는 젊뫀 세대의 뮤지션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가지며 음악적 회춘을 모색했다. 2002년에는 나인인치네일스의 「Hurt」를 커버했고 그 곡은 그가 녹음한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2003년 5월 아내 준 카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인 9월 12일 자니 또한 그녀를 따라가듯 조용히 숨을 거둔다. 두 달 후 11월 그의 유작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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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 캐시의 음악은 록큰롤의 반골 정신, 민속 음악의 목가적 요소, 가스펠의 경건함 그리고 블루스와 컨트리의 비탄과 절망이 항상 넘쳐났다. 그는 컨트리의 계관 시인이었다. 그는 소외받는 자들의 절망을 대변하며 어둠의 세계를 노래했다. 사운드는 독특하면서도 극히 단순했다. 2비트의 트레인 비트에 실린 목소리는 노래라기보다 차라리 읊조림에 가까웠다. 그는 언제나 조용히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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