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사랑의 고백, “히스클리프는 나야.” - 『폭풍의 언덕』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8.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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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었더니 내 나이 열다섯에 내가 너무 늙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오로지 히스클리프가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그 힘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기 때문에 막상 히스클리프가 죽어버리자 큰일을 치른 사람처럼 허탈했었다. 한 가지 유별나게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충동적으로 마루의 선반 밑에 있던 오래된 포도주 통에 손을 깊숙이 넣어 바닥에 깔려있던 포도 알맹이 하나를 꺼내 들여다보던 거다. 그때 그 포도 모양은 기이하게도 일그러지지도 쪼그라들지도 않고 얼마나 완전한 형상을 갖고 있었던지. 어스름 불빛 아래 완벽한 구.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히스클리프가 죽으면서 완전한 형상을 띈 뭔가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그에게서 언젠가는 뭔가를 물려받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늙어버렸다고 생각해서 비통했다.

모든 소설은 저마다 어떤 이상적인 현실을 담고 있다는 말. 나는 『폭풍의 언덕』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를 만나면 꼭 그 말부터 물어보고 싶다. 그녀의 이상은 내 맘 속의 생각과 일치할 것인지?

『폭풍의 언덕』의 첫 장면은 그 배경지인 영국 요크셔의 워더링 하이츠와 불멸의 두 주인공 히스클리프, 캐서린을 모두 보여준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한 나그네가 추위에 떨며 문을 열고 들어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청한다. 집주인은 몹시 거만하고 침울한 분위기의 건장한 체격의 거친 남자인데 그는 옆에 있던 개를 한번 발로 걷어차 버리고는 마지못해 나그네에게 방 한 칸을 내준다. 잠을 자려던 나그네는 한밤에 창문이 덜커덩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깬다. 그리고 바람결에 여자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릴 듣는다. 그 목소리는 저 황량한 벌판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나 좀 들어가게 해 줘. 이십 년 동안이에요. 이십 년 동안 떠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겁에 질린 나그네는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다가 여자의 섬뜩한 손에 붙잡힌다. 그는 여자의 손을 물어뜯어 떼버리고는 공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 소리를 들은 주인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창백한 낯빛으로 창을 비틀어 열고 흐느낀다.

“들어와, 들어와, 제발 들어와. 한 번만 더. 그리운 그대,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오.”

그리고 주인은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절망감에 울부짖는다. 무엇이 유령을 호출했던가?

이것이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첫 시작 부분이고 1939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영화 <폭풍의 언덕>의 첫 장면이다.

어쩌면 쓰라린 사랑을 겪어낸 뒤에야만 히스클리프의 『폭풍의 언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풍의 언덕』의 거의 모든 장면들은 기괴하고 의도적으로 잔인한데도 묘한 자기만의 윤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최고의 장면은 캐서린이 옆 마을의 에드가 린턴이란 부드럽고 선량한 부유한 신사에게 청혼을 받고 하녀이자 말벗인 넬리와 대화를 하는 부분이다.

넬리는 캐서린에게 왜 에드가와 결혼하려 하느냐고 물어본다. 캐서린은, 그이는 잘생기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젊고 명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재산을 많이 물려 받을 테고 그렇게 된다면 그녀 자신은 근방에서 제일가는 부인이 될 것이 분명하므로 결혼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넬리는 캐서린이 린턴 부인이 되면 히스클리프를 잃게 될 건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캐서린은 오빠가 히스클리프를 저렇게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던들 자신이 에드가와 결혼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을 거라며, 히스클리프에 대해선 이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어야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내게 큰 불행은 히스클리프의 불행이었어. 그리고 처음부터 나도 각자의 불행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보다도 생각한 것은 히스클리프 자신이었어.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도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도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거야.”

이 부분이 아름다운 이유는 “히스클리프는 나야.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 말의 힘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의 고백과 자기 선언이 같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고백은 자기 정체성의 고백이고 감정과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고 그리고 많은 경우에 사랑 자체보다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을, 에밀리 브론테는 캐서린의 입을 통해 말한다.

영화 <폭풍의 언덕>(1939)의 한 장면

캐서린의 결혼 이후에 『폭풍의 언덕』에선 현실 세계에선 아무도 맘 편안히 살지 못하고 미래는 암담하기만 하다. 히스클리프의 숨 쉴 겨를이 없이 휘몰아치는 사랑의 고백과 행동. 열정으로 인한 분노는 사랑이 갖는 비극성을 낙인찍듯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사랑이라면 관통하는 정서는 한마디로 기괴한 열정이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격렬한 열정 때문에 히스클리프는 끝없이 음모를 꾸며 캐서린 오빠의 집을 빼앗고 복수를 위해서 캐서린의 시누이와 결혼을 하고 그녀를 학대하고 결국은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양으로 삼는다. 소설 속의 온유하고 잘 사회화된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시들시들 죽어간다. 히스클리프에겐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다. ‘네 남편의 평생 동안의 사랑은 내 하루만의 사랑에도 못 미친다.’는 절규는 사랑과 함께 고통을 고백한다.

두 번째로 아름다운 장면은 캐서린이 죽게 되는 바로 그날 밤 히스클리프의 기도 부분이다. 캐서린이 죽던 밤 그녀의 집 정원을 결코 떠나지 않고 나무토막처럼 서 있던 히스클리프는 야수처럼 고함지른다.

“끝까지 거짓말쟁이군, 어디로 간 거지? 난 한 가지만 기도하겠어.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나는 히스클리프의 이 기도를 세기의 기도라고 부르고 싶다. 이 기도는 위로나 축복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지혜도 아니다. 이 기도는 다짐이고 약속이고 그 자체로 그날 이후의 실제적인 삶이고 한 개인의 역사다. 그는 기도한 바 그대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사랑 안에서 삶을 태워 없애 버렸다.

“내가 거실에 앉아 있을 때는 밖에 나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 것 같고 벌판을 쏘다니다보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와 만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집을 나갔다가도 급히 들어오는 거지. 그녀가 틀림없이 워더링 하이츠의 어느 곳엔간 있을 것만 같아서. 하룻밤에 몇 번씩이나 눈을 떴다 감았다해.”

히스클리프에겐 모호한 감정이란 없다. 깊이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 본 사람은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량도 마음도, 교양도 없는 이 음울한 사내가 우리에게 구원인 이유는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엔 무관심과 급변하는 감정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넓이가 아니라 깊이를 보여주면서 묵시론적 인물이 된다. 그러므로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위험하지만 우리 모두가 외로운 날 맘속으로 기대하고 꿈꾸는 어떤 감정을 극한으로 보여준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극한의 것. 검은 매혹이라 부를 만한 매혹이다.

책의 후반부 등장인물들은 히스클리프의 지치지 않는 복수심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히스클리프가 죽어야지만 실타래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과연 그는 죽을 때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죽기 전에 유령을 한번만이라도 만나게 될 것인가?

“무엇 하나 그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이 있어야 말이지. 이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해도 그녀의 모습이, 깔린 돌마다 떠오른단 말이야! 흘러가는 구름송이마다 나무마다 밤이면 온 하늘에, 낮이면 눈에 띄는 온갖 것들 속에 나는 온통 그녀의 모습으로 둘러싸여있단 말이야. 흔해 빠진 남자와 여자의 얼굴들 심지어 나 자신의 모습마저 그녀의 얼굴을 닮아서 나를 비웃거든. 온 세상이 그녀가 전에 살아있었다는 것과 내가 그녀를 잃었다는 무서운 기억의 진열장이라고.”

그에게 있어서 이 모든 어휘들은 다 동의어이다. 내 불멸의 사랑, 내 권리를 지키겠다는 무모한 노력, 나의 타락, 나의 자존심, 나의 행복. 내 고뇌의 망령.

남들이 원하는 천국은 전혀 바라지도 않고 또 가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 히스클리프가 과연 죽기 전에 캐서린의 유령을 만나 자기만의 천국으로 갔을까? 히스클리프 죽음의 배경은 소설과 영화의 첫 장면, 덜커덩거리는 창문 밑이었다. 그날 밤도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창문은 열렸다 닫혔다 덜거덕거리면서 창틀 위에 놓인 그의 한쪽 손을 짓찧는 것이었어요. 껍질이 벗겨졌지만 피가 흐르지는 않았어요. 저는 창문을 닫아걸고 그의 앞이마로 늘어진 검고 긴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두 눈을 감기려고 해보았어요. 되도록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무섭고 살아있는 듯한 환희의 눈빛을 지우려고 했지요. 눈은 감겨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히스클리프가 죽기 전에 캐서린의 유령을 향해 손을 뻗고 적어도 한 번은 그 감촉을 느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오래전 나는 ‘그녀는 실제적 삶을 한번도 살지 못했다’라는 어떤 소설 속의 구절 때문에 슬퍼했던 기억이 있는데 히스클리프의 경우는 어떤 삶은 살았고 어떤 삶은 전혀 살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사랑을 이어가는 끈질긴 과정으로 볼 때 그의 삶은 완벽했다. 히스클리프는 그동안 실제로 존재했으나 제대로 표현된 적 없는, 공포스럽게 강하고 끈질긴, 숭고한 사랑의 원형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만큼만 히스클리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도 인생에 몇 년, 혹은 몇날 며칠은, 혹은 어떤 찰나엔 히스클리프였을 것이다(혹은 현재도 히스클리프이다).

오늘날 현실 세계는 우리에게 워더링 하이츠에 부는 바람만큼이나 끝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세상엔 사랑 말고도 성취해야 할 일이 많다거나 혹은 맹렬한 열정은 한가한 날에나 갖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나는 히스클리프에게 끝없이 매혹된다. 사랑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지상에 있는 동안 한번만이라도 내가 시작한 일을 끝까지 끌고 가보고 싶기 때문이다. 시작한 일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고 매 순간 뭐에 홀린 듯이 재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속으로 나도 뛰어 들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금욕주의자가 되느니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열정으로 가득 찬 인간은 확실히 덜 타락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너야!’라는 선언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불행 없는 소망은 없다는 걸, 부도덕하지 않은 절대성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을 읽고 난 사람은 꼭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의 피로가 어디서 오는지 그 근원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너무 사랑해서인지, 덜 사랑해서인지.

1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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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6.10

최근에 또 영화로 나온 거같더군요. 아직까지 보지도 못했고 영화 평점도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 할 수 없겠지만. 좋아했던 작품이에요. 작가의 자매가 쓴 제인에어와 함께. 굳이 말하면 제인에어를 더 좋아했지만요. 역시 너무 암울한 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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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gsiks

2010.03.31

중학교 3학년 때 독서실의 휴게소에 꽂혀 있는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차피 놀러 간 곳이라 공부도 안 하고 열심히 읽었던 ... 이 후에 비디오를 빌려서 영화까지 보기도 했죠. 이 후 얼마 간은 사랑에 관해서는 항상 이렇게 약간은 어둡고, 슬픈,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란 생각을 가지게 됐던 거 같아요. 전 힌들리가 얼마나 미웠던지, 게다가 린튼까지 싫더군요. 이후 비슷한 이미지의 사람들을 보면 좀 적대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랑이 축복이라고 얘기하는데, 여기 주인공들에겐 다들 헤어날 수 없는 저주 같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선율들이 슬프게, 아프게 들리는 듯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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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waa

2009.09.10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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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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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저/<김종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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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

19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1818년 영국 요크셔주 손턴에서 목사인 패트릭 브론테와 마리아 브랜웰 사이에서 여섯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중 셋째 딸이 『제인 에어』로 영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을 쓴 샬럿 브론테다.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남매들은 10대 초반부터 산문과 시로 습작을 한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하워스 교구에서 자라났는데, 세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청소년기에 세 명의 언니들도 병사했다. 월터 스콧, 바이런, 셸리 등의 작품을 좋아했고, 이야기를 짓고 일기 쓰기를 즐겼다. 에밀리는 1847년 엘리스 벨이라는 남성의 가명으로 『폭풍의 언덕』을 출간한다. 목사의 딸로서 교사 생활을 잠깐 한 것이 전부인 평범해 보이는 그녀가 모든 사람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1846년 샬럿이 에밀리의 시를 발견하고는 출판사에 시집 출판을 문의하여 세 자매의 가명을 제목으로 한 공동 시집 『커러, 엘리스, 액튼 벨의 시 작품들』을 냈다. 1847년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가, 그리고 샬럿의 『제인 에어』가 출간되었다. 언니 샬럿이 쓴 『제인 에어』가 출간 즉시 큰 인기를 얻으며 성공을 거둔 것과 달리 『폭풍의 언덕』은 출간 당시 작품 내용이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잔인하며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에밀리는 마치 자신이 직접 그 폭풍을 맞은 듯, 작품을 출간한 이듬해인 1848년, 폐결핵에 걸려 30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에밀리는 『폭풍의 언덕』이라는 한 권의 대작으로 국내 소설가로만 알려져 있으나, 영미권 대학의 영문학과에서는 중요한 시인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에밀리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잇따른 죽음을 경험해야 했지만 상상력을 통해 “죽음에서 아름다운 생명을 불렀”으며, 피아노와 외국어를 독학하면서 좁은 집에 머물렀지만 “성스러운 목소리로, 현실의 세상에 대해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