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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프로방스를 간다고? 지금 가봤자 그림 같은 풍경은 없고 엄청나게 춥고 바람만 장난 아니게 불어댄다고. 겨울의 프로방스는 갈 곳이 못 돼.”
처음 하는 여행이라 귀가 얇기도 했지만 이미 며칠간 파리를 돌아다니며 처음 만나는 세느강 맞바람에 볼이 다 터짐과 동시에 정신이 나가버린 나는 바람이 많이 분다는 말 한마디에 스위스로 건너갔다. 1995년 겨울, 유럽의 추위는 대단했고 칼바람이 불기로는 스위스의 호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꽃 시계에 쌓인 눈과 얼어붙은 호수를 보며 다짐에 또 다짐을 했다. 다시 언젠가 반드시 프로방스를 제일 좋은 시기에 다시 가 보고 말겠다고. 그 이후에도 유럽에서 머물 기회가 있었지만 프로방스로 여행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요리학교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나니 더더욱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유학을 마치면서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살림에 여행보다는 요리책 한 권이라도 더 사가는 쪽을 택했었으니까.
그래도, 아직 가보지 못한 프로방스를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학연수 시절 선물로 받은 피터 메일(Peter Mayle)의 『나의 프로방스』 오디오북. 들어 본 적도 없는 식재료들의 이름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내용을 다 이해하고 싶은 욕심에 원본까지 사서 봤다. 몇 년 뒤에 만난 피터 게더스(Peter Gethers)와 고양이 노튼(Norton)의 프로방스 이야기까지. 적어도 두 피터(Peter) 씨들에게 프로방스는, 본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누구에게나 절대 잊을 수 없고, 돌아가고 싶은 고향 같은 곳임이 확실했다.둘의 프로방스에 대한 책을 읽으며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한겨울의 프로방스는 안 가길 잘했다는 사실이다. 눈부신 햇살과 바다, 그리고 푸르른 산과 신선하다 못해 손대면 터져버릴 것 같은 채소들은 여름의 프로방스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일 테니까.
프로방스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들은 요리를 배우면서 더 커졌다. 프로방스의 요리들을 배우면서 고흐의 그림 덕에 내 뇌 속에 막연하게 노랗거나, 검은 초록으로 자리잡고 있던 프로방스의 이미지와 컬러는 쨍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 토마토와 가지, 주키니, 그리고 ‘프랑스의 허브가든’이라고 불리는 허브의 본고장, 그리고 들판을 가득 덮고 있는 보랏빛의 라벤더, 검거나, 자주색이거나, 초록인 싱싱한 올리브들, 그리고 그 올리브로부터 갓 짜낸 걸쭉한 오일, 분홍빛의 로제 와인과 역사를 자랑하는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까지. 프로방스의 요리와, 올리브 오일을 영국에 가장 먼저 소개한 요리작가 엘리자베스 데이비드(Elizabeth David)의 오래된 프로방스 요리책을 보고, 칙칙한 학교에서 그나마 가장 햇살이 잘 들고 넓은 프로방스 부엌에서(학교 부엌에 프랑스 지역 이름을 붙였었다) 요리들을 만들고 있자니 프로방스에 대한 그리움과 환상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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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의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요리를 만드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싱싱한 현지의 식재료들이다. 프로방스의 햇살 아래 자란 신선한 채소, 과일, 생선들과 그것들을 이용해 맛 좋은 요리들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고 프로방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인생에 있어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끔은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엌이 아니라 바로 시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쭉 늘어선 가판대를 기웃대며 천천히 걸었다. 물건을 사는 프랑스 주부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영국 여인들과 달랐다 프랑스 주부들은 물건의 겉모습을 살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가지는 꽉 쥐어보고, 토마토는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 성냥개비처럼 가느다란 강낭콩은 손가락으로 툭 부러뜨려 보고, 양상추는 의심쩍은 듯이 축축한 녹색의 중심부까지 찔러보고, 치즈와 올리브는 조금 떼어 맛을 본다. 이렇게 물건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도 그들이 마음대로 정한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주인을 쏘아본다. 그러고는 다른 가판대를 찾아가 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 시장 한구석에서는 포도주 협동조합에서 나온 소형트럭을 남자들이 둘러싸고, 양치질이라도 하듯이 새로 출시된 분홍빛 포도주를 시음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한 여인이 놓아 키운 닭이 낳은 달걀과 산 토끼를 팔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갖가지 채소와 작고 향기로운 바질, 라벤더 꿀통, 갓 짜낸 올리브유를 담은 커다란 초록색 병, 온실에서 키운 복숭아를 담은 접시, 검은 타프나드 단지, 꽃과 풀, 잼과 치즈가 잔뜩 쌓인 좌판들이 눈에 띄었다. 이른 아침 햇살에 모든 것이 먹음직하게 보였다.
노튼은 숄더백 안에 들어가 릴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노튼은 귀여운 모습으로 수제 소시지와 향취가 강한 염소 젖 치즈, 초콜릿 타르트 등을 조금씩 얻어먹곤 했다. 재니스와 나도 기지를 발휘했다. 금세 우리는 마음에 꼭 드는 행상을 찾아내 단골이 되었다. (이 행상의 대부분은 고르드와 압트의 시장에도 오니, 한 주에 두세 번은 보는 법이다) 그중에는 여덟 살짜리 딸과 함께 입에서 살살 녹는 타르트를 만들어 트럭에 싣고 파는 아주 친절하고 활기찬 남자도 있었다. 그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45분 동안 달리면 나오는 브나스크(Venasque) 마을에서 예술의 경지에 오른 타르트를 구워 시장에 가져왔다. 그가 만든 부추 타르트와 아티초크 타르트는 신의 음식 같았다. 하지만 샬롯 타르트가 정말 걸작이었다. 초콜릿을 씌우지 않은 음식 중에서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은 먹어 본 적이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남자가 초콜릿과 캐러멜을 넣은 타르트를 만든 적도 있다. 그 초콜릿 캐러멜 타르트는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보존되어야 마땅하다. 콜레스테롤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자면, 그의 타르트에는 그래도 버터가 3 킬로그램 이상은 들어있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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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그리워만 했었지만, 언젠가는 프로방스의 시장을 구석구석 돌아다녀 볼 날이 오겠지? 시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오랫동안 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인들과 눈도장을 찍고,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은 소심하게 와인이나 빵 같은 것들을 충동구매 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식탁에 올려놓은 라벤더의 향을 맡고, 마늘을 문질러 살짝 오븐에 구운 빵에 진하디 진한 올리브 오일을 넉넉히 뿌린 다음, 싱싱한 토마토를 얹어 꼭꼭 씹고 싶다. 햇살을 먹는 기분으로. 마음과 입술 모두 프로방스의 올리브 오일로 반질반질 촉촉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러면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좋은 재료가 있다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진리 또한 프로방스에서 더더욱 뼛속 깊이 느껴 볼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시장에서 사온 싱싱한 야채들 다듬어 프로방스의 갖은 허브 넣어 버무린 다음 구워 크고 둥근 빵과 알맞게 차가운 로제 와인을 곁들여 함께 나눠먹는 즐거움도 느껴보고 싶다. 친구들과 맛 좋은 요리, 술과 대화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고향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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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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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
2008.10.17
(저도 마찬가지 ㅎㅎ)
쌀쌀한 계절이 가기 전에 읽어 보고 해 먹어 보아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탄생
2008.10.15
FlyingAce
200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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