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그 포근포근한 추억
글: 채널예스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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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감자라 하지 않고 특별히 ‘하지감자’라고 했다. 아마 하지 무렵에 캐서 그럴 것이다. 요즘이야 강원도 감자, 제주도 감자 들이 사철 나오지만 내가 기억하는 감자는 오직 하지 무렵에만 나왔다. 그래서 나는 감자, 하면 어려서 먹던 그 하지감자만이 진짜 감자인 것만 같다. 슈퍼마켓 전등불 밑에 허옇게 쟁여져 있는 감자는 진짜 감자가 아닌 것만 같다. 무엇보다 슈퍼마켓 감자가 감자가 아닌 것 같은 이유는 감자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감자를 찌면 보실보실한 속살이 툭 터져서 진한 향기를 내뿜곤 하였다. 감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를 젓가락으로 쿡 찍어 호호 불며 먹어야 제 맛이 난다. 감자는 그렇게 먹는 것이다. 어디 기름에다 튀기고 ‘호이루’에 싸서 복잡하게 굽고 말 것도 없이 그냥 푹 쪄서 쿡 찍어 먹는 것이다!

젓가락으로 쿡 찍어 호호 불며 먹어야 제 맛이란다

감자씨는 대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월 말이나 삼월 초에 흙에 묻는다. 겨우내 부엌 나무청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올망졸망 쭈글쭈글한 씨감자를 씨눈을 보호해가며 반으로 가른다. 그런 날 밖에는 춘설이라도 난분분 흩날리기가 십상이다.

씨감자를 가르는 날은 저녁에 혹 가르고 남은 씨감자가 밥상 한 귀퉁이에 오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저녁 밥상머리에 내놓은, 겨우내 물이 빠져서 쭈글쭈글한 씨감자 한 양재기. 밥풀 묻은 감자 한 양재기. 아이들은 저녁밥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감자 양재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럴 때 먹는 감자는 감자 특유의 포근포근한 맛은 없다. 대신 쫀득쫀득, 마치 약간 굳은 찹쌀떡 같은 맛이 난다.

다음날 아침, 재에 버무린 씨감자를 아버지는 미리 두엄 듬뿍 뿌려서 고랑을 내놓은 흙에 묻었다. 씨감자는 심는다 하지 않고 그렇게 묻는다고 한다. 흙을 쏙쏙 파고 반으로 가른 씨감자 한 쪽씩을 묻는 것이다. 그렇게 묻어두면 곡우가 지날 무렵에는 어느새 싹이 터 있다. 아이들은 그때쯤 가위바위보 놀이를 할 때 이런 노래를 부른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그냥 ‘짱깸뽀’ 했던 아이들이.

“감자가 싹이 터서 잎이 나서 감자감자 쑛, 감자감자 쑛.”

빨리 감자를 먹고 싶은 마음이 그런 주문을 외게 했을 것이다. 이윽고 온 천지에 찔레꽃 향기가 진동할 때쯤, 하루 종일 어디선가 뻐꾹새 소리 숨바꼭질할 때쯤, 감자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럴 때 또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하얀 꽃 피면 하얀 감자 캐보나 마나 하얀 감자, 자주 꽃 피면 자주 감자 캐보나 마나 자주 감자…….”

감자꽃 필 때쯤 또 온 산야에는 노란 원추리꽃, 까만 점 박힌 참나리꽃이 피어난다. 온 세상은 꽃과 초록의 향연으로 마냥 싱그럽다. 이제 조금 있으면 보리도 익어가리라. 보리가 익어가고 감자 뿌리에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감자알이 맺힐 것이다. 아, 햇보리에 감자밥. 한겨울 노란 서숙에 고구마 넣은 밥을 해 먹었듯이, 이제 보드라운 햇보리에 하얀 감자 넣은 감자밥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초록의 숲속을 헤매다니며 뜯어온 푸른 고사리 무침에 뽀얀 취나물을 감자밥에 비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이 설설 나는 찐 감자 대령이오

모든 뿌리채소가 그렇듯이 감자 또한 북을 주어야 한다. 튼튼한 열매 맺히라고 뿌리 쪽에 포실포실한 흙을 북돋아줘야 하는 것이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여자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호미 들고 밭으로 간다. 아이들이 감자밭을 돌보는 동안 어른들은 고추 모종도 내야 하고 모내기 준비도 해야 한다.

보리가 까실까실 익어갈 때쯤, 아니 온 들에 보리타작하고 남은 보리 가시랭이 태우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쯤 감자도 튼실하게 굵어간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들에서 돌아온 엄마가 문득 말씀하신다.

“감자가 들었을라나 어쨌을라나, 내일은 학교 갔다 와서 감자 한 소쿠리 캐와봐라.” 바야흐로 모내기철이 다가와 품앗이꾼들 반찬을 할 만한가 어떤가 시험 삼아 캐와보라는 것이다. 드디어, 감자 먹을 때가 돌아온 것이다.

학교 갔다 와서 소쿠리를 들고 득달같이 감자밭으로 간다. 아직은 청청한 감잣대를 뽑아 던지고 나는 감자를 캔다. 그해의 첫 감자, 뽀얗게 살찐 감자가 주렁주렁하다. 그 쭈글쭈글하던 씨감자가 어떻게 그리도 잘생기게 변신을 했는지, 흙이 부리는 조화속이 그러 감탄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아직 많이 캐서는 안 된다. 딱 먹을 만큼만 캐야 한다.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은 한번 캐기 시작하면 한없이 캐고 싶어진다. 주절이 주절이 딸려나오는 감자 가족들.

가시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감자를 집에 가져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일단 소쿠리째로 물에 씻어서 돌확에 들들 문대야 한다. 그러면 껍질이 맨들맨들하게 벗겨진다. 그것을 그냥 푹 찐다. 오리지널 찐 감자다. 김 설설 나는 찐 감자는 모내기하는 어른들의 훌륭한 새참이다.

엄마는 장에 가서 비린 것을 사온다. 주로 갈치다. 감자 넣고 조린 갈치조림은 단연 일철의 논두렁에서 인기 만점의 반찬이다. 비린 것 없으면 햇고사리 넣고 조려도 되고, 햇고추 넣고 조려도 된다. 그냥 왕멸치 몇 개 넣고 조리기도 한다. 조그만 새끼감자에 마늘종을 넣고 물엿을 조금 넣고 쫀득쫀득하게 조리면 만드는 도중에 다 먹어버릴 정도로 맛있다.


여름 한철의 따뜻한 끼니 혹은 주전부리

감자는 모내기철이 얼추 끝나갈 무렵에 본격적으로 수확을 한다. 그래서 감자를 심었던 논은 가장 늦게 모가 심어진다. 감자꽃이 지고 푸르던 감잣대가 시들시들 녹아내릴 때쯤, 감잣대를 뽑고 감자를 캔다. 미리 많이 캐다 먹어버려서 감자밭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다. 겨울 한철의 고구마가 그랬듯이 이제 감자는 여름 한철의 식량이 되고 간식이 되어줄 것이다.

한여름에는 거의 날마다 감자를 찐다. 대바구리(바구니가 아니라)에 담긴 보리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몫. 엄마와 딸들은 언제나 점심으로 열무김치에 감자를 먹는다. 해가 중천에 떠서 도무지 서쪽으로 이동할 생각을 안 하는 무더운 날에 엄마는 감자돈부범벅을 한다. 감나무 밑 화덕에 솥을 걸고 일단 감자와 돈부(*동부콩.)를 섞어 푹푹 찐다. 그것을 사카린도 조금 넣어서 절구에 넣고 치댄다. 감자와 붉은 돈부가 어우러진 기막힌 맛이라니.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좀 다린다. 그래도 감자범벅이 없는 한여름은 심심하다. 팥소 없는 찐빵이다.

여름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면 집집마다 감자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여름 내내 서늘하다고 딴에는 생각하고 부려놓은 헛청[虛廳]의 감자가 검은 진물을 흘리며 썩어가는 것이다. 감자 썩는 냄새에 코를 싸쥐면서도 아이들은 언제나 감자광에 가서 여름을 나곤 했다. 선풍기도 없고 더위를 쫓을 것이라곤 부채밖에 없는데, 그나마 부채는 어른들 몫이고 아이들은 그저 책받침 하나 주워들고 감자광에 모여앉아 여름방학 숙제를 하는 것이다.

그런 여름날에 내 기억의 저장고 속에 각인된 썩은 감자 냄새, 흙과 어둠과 서늘한 기운 속에서 나는 썩은 감자 냄새. 내게 고향의 냄새는 바로 그 썩은 감자 냄새다. 썩은 감자라 하여 그냥 버리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썩은 감자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썩은 감자떡은 독특한 풍미가 있다.

엄마는 썩은 감자를 들들 갈아 물에 담가놓는다. 그러면 검은 전분이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 전분에 사카린과 소금을 조금 치고 베보자기에 싸서 푹 찌면 그것이 감자떡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썩은 냄새가 그렇게 황홀한 냄새로 변신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감자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사시사철 감자가 아닌 하지감자 이야기 말이다. 하지감자를 아는가? 사시사철 감자를 먹을 수 있는 시절에, 그럼에도 늘 나의 진짜 감자가 그리운 나는 하지감자를 아는 사람하고 밤새워 감자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감자, 그 포근포근한 추억을 꺼내 먹고 싶다.

2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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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Mr. Lee)

2008.06.17

작가가 들려준 감자 이야기는 감자꽃을 본적도, 감자를 어떻게 재배하지는도, 하지감자도 모르지만, 감자를 찌면 보실보실한 속살이 툭 터져서 진한 감자향기를 맡아본 기억과.... 양재기에 담아내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감자를 입천장을 디어가며 먹었던 기억이 있는 나에겐 바로 어린 시절 나의 추억처럼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살아온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동일한 맛에 대한 추억이 갖게해주는 행복한 추억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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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춘

2008.06.17

몇년 전 학교앞 포장마차에서 떡볶기를 자주 사먹었는데 어느날부터 아줌마가 감자를 동글동글 튀겨서 설탕에 묻혀 팔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주종목이 떡에서 감자로 바꼈던 일이 있는데 그때 생각이 나네요. 집에서는 감자를 쪄먹는다거나 튀겨먹는일이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그땐 밖에서 사먹는 감자가 왜그리 맛있었는지 몰라요.... 오늘은 갑자기 감자가 급 땡기네요. 누가 저기 사진 속 감자좀 사주세요. 먹고싶어용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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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turehs

2008.06.17

포실포실한 감자에 쫄깃쫄깃한 싸리버섯을 번갈아 먹으며 짠지로 이따금 입안을 개운하게 하면서 저녁을 먹던 그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요. 그렇게 캐온 감자를 외할머니와 둘이서 열심히 들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선 엄마가 쪄주신 감자를 동네 친구들하고 먹을때 고추장을 찍어먹는 저를 이상하게 보던 친구들...어렸을때 너무나 많이 먹었던 탓일까. 지금 감자를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며칠전...외할머니가 지져주시던 그 고등어자반이 외그리 먹고 싶은지...마침 고등어 자반 한손이 있어서 그냥 구우라는 신랑의 말을 외면하고, 친정에서 가져온 몇주가 됐는지도 모를 감자를 넣어 밥을 하고 고등어 한손을 자작하게 처음으로 끓여 내어 신랑과 함께 나란히 앉아 먹었습니다. 순간 서울사는 딸내 집에 가져다 주려 일년내내 준비하여 거둬들인 감자를 무겁게 이고, 한손엔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외손녀를 잡고 구비구비 그 어지러운 대관령 고개를 넘었을 외할머니의 그 고단함이 생각나네요..이번 주말엔 외할머니 좋아라 하시는 맛난 음식 몇개 해서 찾아뵈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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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1963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91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2년 여성신문학상,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수여, 2004년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5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올해의 예술상, 만해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의 모습과 가난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뤄온 작가 공선옥.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표현해 내는 소설가이다. "근대에 태어났지만 전근대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하는 작가의 음성은 유년시절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고, 세 자매가 생존을 위해 뛰어야 했던 상황에서 둘째 딸의 책무를 지닌 채 "같은 연배 또래들이라고 해서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참외 파는 소녀이기도 했으며, 입학만 한 상태에서 무학점 학생으로 남아야 했고, 빚에 쫓겨 다니는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병간호가 작가 공선옥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었다. 공장을 떠돌며 위장 취업자가 아닌, 대학생 출신 생계 취업자였으며, 나중에는 고속버스, 관광버스, 직행버스를 전전하며 안내양을 하던 어느 날 “나의 궁핍한 시절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소설가 공선옥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목마른 계절」 「우리 생애의 꽃」 등 개성있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가진 자에게는 눈물의 슬픔을,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기쁨을 안겨 주는 작가이다.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 피었다 지는 작은 꽃들에게 눈길을 보내온 작가는 작품 속에서 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2002년 『멋진 한세상』이후 5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명랑한 밤길』역시 그녀의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집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버둥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독자 커뮤니티 문학동네에 일일연재되어, 화제를 모았으며, 가장 아픈 시대를 가장 예쁘게 살아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스무 살 시기의,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 한 도시’에서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란』에서는 가족의 빈자리를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일궈낼 수 있는 삶의 행복한 순간을 유려하고 따뜻하게 그려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사람들, 철저하게 이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꽃 같은 싸움을 담고 있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