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값: 버지니아 공대 사건을 바라보며…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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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사람의 생명은 다 소중하다고 배웁니다만… 정말 그런가요? 사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히 우리보다 더 낫거나 중요한 사람이 있고, 못나거나 쓸모없거나 심지어 유해한 사람도 있습니다.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은 바로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조지 베일리가 없는 세상이 조지 베일리가 있는 세상보다 못했던 건, 자살을 기도하기 직전까지 조지 베일리가 보통 사람의 평균보다 훨씬 중요하고 유익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그를 구하고자 천사를 보낸 거죠. 보통 사람에겐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린 사람의 목숨이 여전히 소중하다고 배웁니다. 왜일까요? 그건 우리가 비교적 여유로운 세계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원리적으로나마 모든 사람의 목숨에 신경을 쓰는 사회는 예상외로 적고 또 젊습니다.

코니 윌리스의 시간 여행 SF 소설 『둠즈데이 북』은 근사한 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소설은 시간 여행 기술이 발명된 미래 세계와 역병이 유행하는 중세 시대를 번갈아가며 진행됩니다. 시간 여행자인 주인공은 알 수 없는 사고로 과거에 갇혀서 갑자기 마을을 덮친 전염병과 싸우게 되지요.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건 윌리스가 묘사하는 중세 사람들이 죽음을 보는 관점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태평해요.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동안에도 그들은 매정할 정도로 무덤덤합니다. 이 소설에서 독자가 분명한 시간 갭을 느끼는 것도 그 태도 때문이죠.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그들은 사극 복장을 한 현대 배우가 아닌 중세 유럽인처럼 보입니다.

왜일까요? 그건 당시 사람들의 목숨값이 지금보다 쌌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우리보다 훨씬 짧았고 병이나 사고로 죽을 확률도 높았죠. 죽음에 대비하고 기대치를 낮게 잡지 않으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버텨내지 못합니다. 죽음과 삶에 대해 현대인과 같은 기준을 세우면 인구 절반이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지 못할 걸요.

그런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쉽게 가혹해집니다. 『향수』에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의 엄마는 자기가 직접 낳은 아기를 다섯이나 죽게 방치했지만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죠. 당시 그런 계급에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연쇄살인마를 처형하는 데에도 엄청난 압력을 받는 사회에 살지만 바로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형 집행은 대중오락이었죠.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를 읽어보세요. 주인공 가족은 창문에서 교수형 광경이 보이는 집에 살면서 입장료를 받아먹고 살지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는 사형집행인이 말 그대로 죄수를 때려죽이는 이탈리아 처형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비교적 문명사회라고 생각하는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아무도 그 설정을 지어내지 않았죠.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모인 사람들

지구촌 사람들이 버지니아 공대 학살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동안 (저 역시 명복을…) 지구상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계속 죽어나갔습니다.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는 전쟁과 테러와 부당한 정부 때문에 버지니아 공대에서 죽은 사람들의 몇백 배나 되는 사람들이 살해당합니다. 수많은 사람은 그냥 굶어 죽고요. 하지만 우린 그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죠. 왜일까요? 일단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인간의 목숨값이 싸기 때문이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그들의 죽음은 우리에게 별다른 영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은 다르죠. 국가 이미지가 달렸고 재미교포의 앞날이 달렸습니다. 쫀쫀하게 들리지만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수단이나 이라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숨값을 과거의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지구촌 시대에 사람들이 목숨값에 거는 기대치는 전보다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죠. 현실 세계에서 도달할 수 없는 목숨값을 기대하는 사람의 죽음과 처음부터 기대 자체가 없는 사람의 죽음은 무게가 다릅니다. 아무것도 도울 힘이 없는 문명은 그들의 공포와 고통을 가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에게 ‘그냥 포기하고 죽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못 하고 저도 못 합니다. 아무리 목숨값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복 받은 사회 때문에 부풀려진 것이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런 막연한 태도만으로 목숨값의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10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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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whale

2007.05.14

저는 님의 의견에 밑도 끝도 없는 주홍글씨를 새길 의도따윈 없습니다. 이거야말로 오버로군요. '쫀쫀하다'라는 표현을 쓴 건 그게 원글에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작은 따옴표로 인용해서 쓰면 제 주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쓴 것이지 님에 대한 인신공격이 아닙니다. 원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고 그 표현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 지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애도는 산 자를 위한 것이며 단순한 슬픔에서 우러나온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 조차 결국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이기적인 인간이고 인간인 이상 한계는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덜 이기적이 될 수 있는 기회마저 놓치고 말 겁니다. 그게 바로 진짜 비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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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whale

2007.05.14

온 나라의 메이저 신문들이 버지니아 공대사건을 제 1면에 대서특필할 때 이라크에서 폭탄테러로 죽은 60명의 이야기는 딱 3단의 기사로 소개되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숫자로 따져선 안된다지만 숫자로만 생각해도 두배입니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목숨값'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안타까운 죽음들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 역학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모든 생명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듯이 죽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왜 이들의 죽음이 받고 있는 것만큼의 애도를 받지 못하는 지 생각해봐야하지 않습니까? 버지니아 사건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가해자도 아닌데' 운운하는 것은 쫀쫀한 것을 넘어서 비겁합니다. 이걸 비겁하다고 인식하지 않고서는 사람의 목숨에 값이 매겨지는 이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제대로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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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whale

2007.05.14

Naomi/ 제 댓글 뿐만 아니라 원글까지 오독하고 계시는 군요. 제가 글쓴이도 아니고 Djuna님이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썼는 지 확언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닙니다만 그렇다하더라도 이 글의 그렇게 협소하게 읽힐 만한 글은 아닐텐데요. 지금 여기서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니까 버지니아 사태에 대한 애도따위, 전세계의 비극을 해결할 수도 없는 데 집어치우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애도는 애도로서 남습니다. 그걸 부정할 사람들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안타깝고 그 안타까움에 슬퍼하는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저는 이 안타까움과 슬픔 이후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애도는 자연스러울 지는 몰라도 공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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