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지리산을 안고 흘러간다
버스는 섬진강변을 달리고 있었다. 차 재배지에 걸맞게 섬진강 주변 지역은 해가 쨍하게 빛나다가도 갑자기 안개가 사위를 감싸고, 구름이 낮게 깔리면서 비를 뿌려댔다. 강은 천천히 제 갈 길을 가고, 산은 뭉글뭉글 구름을 피어 올린다. 쌍계사에 도착할 즈음 소나기가 한차례 내렸다 그쳤지만 여전히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쌍계사는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기하게도 아무리 비가 많이 와 물이 불어도 절 쪽으로 물이 넘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 출신인 문화재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절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대웅전이 공사 중인 점이 아쉬웠지만, 미소 지은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운 마애불과 꽃담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각별했다.
대웅전 앞에는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호)가 서 있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유명한 비석이지만, 이 고장 사람에게는 6.25와 지리산 빨치산으로 기억되는 비석이다. 폭탄을 맞아 여기저기 갈라졌고, 표면에는 총알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빨치산이 가져간 재봉틀을 가져오기 위해 쌀을 이고 갔다는 할머니, 가족들 중 죽지 않은 자가 없었던, 그 두려웠던 시절에 대한 기억,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타지 사람들이 이곳 사람들과 혼인을 하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가지는 한스러운 여운까지. 지리산이 품은 슬픈 역사는 여전히 그 그림자를 드리워놓고 있었다.
첫날밤, 신경숙 작가와의 만남
뚫어져라 쳐다보는 독자들의 시선이 다소 부담스러웠나 보다. 수줍은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앉은 작가는 무지개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여기에 오는 길에 오랜만에 무지개를 봤어요. 사진기가 없어서 눈에 담았습니다.” 시간은 어떻게 보내든지 흘러간다,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은 기쁘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러니 문학캠프에 모인 모든 분들이 마음을 열고 함께 하는 시간을 충만히 보냈으면 좋겠다는 말로 인사말을 마무리한 후,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작품 『종소리』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돌아온 새 같다. 이젠 어디에나 깃들일 수 있는 새 같다. 낯선 새 한 마리가 세면장 창틀에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건 당신이었다.」로 시작되는 단편 소설 『종소리』는 가장 가깝게 있으면서도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진정 들어야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소설을 읽다가 중간 중간 쉬면서, 각 부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편하게 털어놓았다. 언제 작품을 썼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작품을 쓰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무엇이었는지,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주었다.
작가의 목소리가 작품과 꼭 어울리라는 법은 없지만, 신경숙 씨의 목소리와 그녀의 소설은 썩 잘 어울렸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놓쳐버리는 섬세한 문장들을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로 듣는 것은 색다르고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종소리』는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다. “찻집에서 있다가 보면 옆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들릴 때가 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죠. 그런 것들을 소설로 써요. 『종소리』도 옛 직장을 찾아오는 회사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쓴 것입니다.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인간의 이러저러한 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어요. 사무실에 갇힌 남자, 그 반대편에 있는 여자, 그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새. 그리고 그 새를 통해 자유를 얻어가는 과정이 떠올랐어요.”
남편은 크론키드카나다라는 희귀한 병을 앓는다. 그런데 이 병에 걸린 후, 부부관계는 오히려 회복될 기미를 보인다. “불행이 온 후, 그 불행 앞에 서면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되는 거예요. 살다가 보면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는 순간이 있어요. 저는 그 순간에 문학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지점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신경숙 작가에게 궁금한 것 몇 가지
『종소리』를 읽고 나서 독자들의 질문에 작가가 대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작가도 독자도 처음엔 수줍어했지만 금방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왜 작가가 되었는지, 작품을 쓸 때 혹시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두렵진 않았는지, 작가 말고 하고 싶은 일은 없었는지, 소설을 쓸 때 특별한 습관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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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문학 독자에게 널리 알린 첫 번째 작품집 『풍금이 있던 자리』는 ‘뜻밖의 성공’을 거둬 다음 소설을 쓸 수 있는 여유와 소원이었던 넓은 책상을 선사했다.
“서른이 되기 전에는 다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마음이 들떠 있잖아요. 저도 서른이 되기 전,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문학에 대해 고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동생에게 1년 동안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고, 1년 동안 단편소설 여섯 편을 썼어요. 그 단편 소설들이 『풍금이 있던 자리』에 실린 작품들입니다. 일년 동안 실컷 작품을 썼으니 직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출판사에서 책을 더 찍어야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책을 낸지 일주일 만이었어요. 그 책이 잘 팔려서 저는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소설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웃음).”
신경숙 작가는 작품을 쓰려고 책상으로 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렇지만 일단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끝을 낼 때까지 기본적인 생활만 해결하면서 글쓰기에 몰두한다. “그래서 많은 인간관계들이 끊기고 연애도 충분히 못해봤어요. 글 쓸 때 버릇이라면, 청소를 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글을 쓸 때는 약속도 안 만들고, 글쓰기와 상관없는 일은 하지 않아요. 아, 그리고 틈만 나면 손을 씻는 버릇이 있어요. 머리는 절대 안 감으면서.(웃음)” 그러면서 글쓰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일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문학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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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쓰기 시작하면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끝을 내야 합니다. 중단하고 포기하면 계속 중단하고 포기하게 되니까요. 자꾸 쓰다보면 ‘이것이 소설인가 보다’는 느낌이 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을 읽어야 해요. 소설가 지망생들의 원고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받은 느낌은 책을 별로 읽지 않았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좋은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세 번째 덕목쯤은 된다고 생각해요. 독서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니까요.”
그녀 역시 작품을 쓰지 않을 때는 항상 책을 읽고 있다고 했다. 머리가 왠지 느슨해졌다고 생각하면 어렵고 잘 안 읽히는 책에 도전한다. 그림책과 시집은 항상 뒤적거리고 있다. “대학생이라면, 계절별로 독서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을 겁니다. 한 계절 동안 관심 있는 주제의 책을 샅샅이 찾아서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거죠. 그런 것이 쌓이면 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겨요. 한 작가의 작품을 죄다 찾아서 읽어보는 것도 권할 만 해요. 모든 작품을 읽다보면, 그 작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세계를 자기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녀 역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 이청준, 조세희, 최인훈 등 선배 작가들의 작품을 모두 찾아 7~8번씩 되풀이해서 읽고, 노트에 옮겨 적기도 했다.
책의 미래, 독서의 미래가 어둡게 점쳐지는 오늘, 그녀는 독서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영화와 같은 영상물은 그 자리에 그냥 있기만 하면 되요. 영화관에 가서 2시간만 앉아 있으면 영화를 다 보게 되죠. 책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한 줄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줄로 넘어갈 수 없고, 한 페이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으니까요. 책 한 권을 다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영화 한 편을 다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인 거예요. 자기 눈으로 짚어가며 한 줄 한 줄 겪어나간 경험의 총합이 독서니까요.”
노고단에 올라 구름과 함께 밥을 먹다
지리산 문학캠프의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노고단 산행이 있는 둘째 날이다.
버스는 먼저 화엄사로 향했다. 화엄사는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도전하고 싶어 하는 지리산 정통종주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 탑을 지나 법당에 이르는 과정은 세속의 번뇌를 씻고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절은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지만, 화엄사는 특이하게도 일주문에서 비스듬한 위치에 대웅전이 있는, 태극 문양을 닮은 배치를 하고 있다는, 가이드분의 설명을 들으며 경내에 들어섰다.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주문에 들어서는 순간 저 멀리 웅장한 대웅전이 한 눈에 보이면서 찾아온 이를 압도하는 절들과는 다르게, 화엄사는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제 모습을 하나씩 보여준다. 조용히 나이를 먹어가는 절, 빛바랜 단청은 소박한 나무빛깔에 가까워져 간다. 어느 것 하나 들떠있는 구석이 없이 새벽처럼 맑은 기운을 뿜어낸다. 절을 감싸고 있는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시원했다. 절구경은 접어두고 계곡에 앉아 발이라도 담그고 싶을 만큼.
각황전 뒤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이름대로 사자 네 마리가 위층 기단에 기둥처럼 서 있다. 왜 사자인지 궁금해 절에 계시는 보살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사자후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자는 부처님을,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란다. 사자를 탑 사방에 세워둔 것은 부처님의 진리가 사방에 넘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성삼재 휴게소에 도착해 도시락과 얼린 물, 비옷을 나눠받고 노고단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간에 쉬지 말고, 속도도 늦추지 말고, 무리하지 않으면 누구나 다 올라간다”고 가이드는 호언장담했지만, 산행은 만만치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코스는 노고단 대피소에서 노고단까지 오르는 오르막길. 가이드가 ‘노고단 대피소’가 보이면 절반 온 것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거리의 절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올라가면서 알게 되었다. 약 35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지만, 시종 완만한 오르막과 평지가 이어지다가 막판에 등장하는 오르막은 지친 사람의 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체력이 없다면 오기로, 다들 기어서 올라가든 끌려서 올라가든 노고단에 도착했다.
그리고 만난 노고단. ‘진짜’ 노고단은 개방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어 올라가지 못했지만 구름에 싸여있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산행을 마치고, 피아골의 한 야영장에서 퀴즈 이벤트를 가졌다.
둘째 날 밤, 김훈 공지영 작가와의 만남
단상에 나란히 앉은 두 작가는 간단하게 인사말을 했다. 김훈 작가는 다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작가는 혼자서 글 쓰는 사람인데,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려니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라고 하며, 앞으로 글을 정말 똑바로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훈 작가의 뒤를 이어, 공지영 작가는 “생애 네 번째 등산을 오늘 여러분과 했습니다. 세 번째는 작년 문학캠프의 금강산이었지요.” 라고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라는 말로 인사를 맺었다.
첫날밤과 마찬가지로 먼저 작가의 작품 낭독이 있었다. 공지영 작가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두 번째 장을 낭독했고, 김훈 작가는『강산무진』에 실린 ‘화장’이라는 단편 소설을 조금 낭독했다.
작품 낭독이 끝난 후, 각각 읽은 부분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먼저 공지영 작가. “제가 읽은 부분은 유정이 모니카 고모의 임종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차를 운전하여 가는 장면입니다. 저는 소설의 첫 부분에 상징적인 것을 넣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이 부분의 경우, 하늘과 땅의 경계, 어둠과 빛에 관한 이야기, 어떤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해 어떤 만남이 진정한 사랑을 통한 것이었다면 거기엔 신과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첫 부분에 암시하고 싶었어요.”
작품의 한 장을 다 읽은 공지영 작가와 달리 김훈 작가는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로 시작되는 장의 두어 단락쯤 읽다가 “이쯤 읽고 말지요.”라고 낭독을 마치고는 “‘화장’은 이른바 사랑이라는 것의 아득함에 대해 쓴 글입니다. 그 아득하고, 부옇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기에 우리는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가요. 사랑이라는 것은 3인칭을 2인칭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득한 일인가요. 절망적이기까지 한 일이지요.”라고 작품을 설명했다.
소설 쓰기, 밥벌이의 지겨움
낭독이 끝난 후 독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첫 질문 ‘왜 작가가 되었는가’에 대해 두 작가는 같은 답을 했다. ‘밥벌이’를 위해서 소설을 쓴다는 것. 먼저 김훈 작가의 대답. “소설은 나에게 밥벌이의 노동입니다. 매우 힘들고 고달픈 노동이지요. 소설로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쓰지 않습니다. 다른 일을 찾아보겠지요. 저의 경우 27년 동안 다른 일을 해서 밥을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이게 아닌데’ 하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제가 쓴 글이 제가 쓰려고 했던 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그러면서도 출판사에 넘겨야 합니다. 그런 불완전 속에서 살아갑니다. 말할 수 없이 비통하죠. 그것을 견디며 밥벌이의 노동을 합니다.”
공지영 작가도 ‘생계를 위해서 글을 쓴다’고 이야기했다. “저는 식솔들이 많이 딸려서 생계를 위해 글을 써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죠. 책 읽고 쓰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글을 좀더 잘 써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작가라면 자유롭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공지영 작가는 아침에 출근해, 저녁이면 퇴근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쓴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이면 책을 읽는다. 슬럼프도 크게 겪은 기억이 없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도 그냥 쓴다. 그렇게 쓰다보면 신기하게도 슬럼프가 지나간다고. 특별히 글을 쓰면서 구애받는 것은 없지만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나오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70% 완성된 상태에서 글쓰기를 시작하는 버릇이 있어요.”
매일매일 꾸준히 쓴다는 것은 김훈 작가도 똑같았지만, 그 방법은 조금 달랐다. “작가가 자기 통제를 못하면 건달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전, 아침에 일어나 연필을 깎으면 예감이 옵니다. 오늘은 두 장 정도 쓰겠구나, 그러면 정말 하루가 끝날 때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두 장 밖에 채우지 못합니다. 안되겠구나 싶은 날도 있죠. 그런 날은 그냥 나가서 놉니다.(웃음)”
대부분의 작가가 컴퓨터를 이용해 원고를 작성하는 요즘, 김훈 작가는 아직도 연필과 원고지를 고집한다. “연필로만 글을 쓰는 것이 저의 못된 버릇인데요. 컴퓨터로 쓰려고 해봐도, 컴퓨터를 만지면 꼭 고장이 나요. 연필로 글을 쓰기 때문에 저는 글이 잘 안 써지면 연필 탓을 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딴 연필을 사옵니다만, 그런다고 글이 잘 써지겠어요.(웃음)”
소설가로 내가 매달리는 테마는 생로병사
한국을 대표하는 두 작가의 학창생활은 어땠을까? 공지영 씨는 중고등학교 때 새침한 학생이었고, 대학교 때는 동기 120명 중 끝에서 세 번째를 할 만큼 공부를 안했다. 김훈 씨는 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겠지만 대학이라는 곳이 사회인이 되기 전에 학생들을 몰아둔 포로수용소 같은 곳이잖아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1년 내내 데모를 하고, 수업은 휴강이고, 학교 문을 닫아 놓고, 최루탄을 쏘고 그랬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학교는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동기들과 선배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데모를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대학을 중퇴했지만 대학을 안나왔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자격지심이 없다. 27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고, 지금은 소설가로 글을 쓰고 있다. 소설가로 그가 매달리는 테마는 ‘생로병사’다.
“나는 인생에 생로병사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병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요.(웃음) 생로병사는 인간의 문제이고, 그것은 합쳐진 것, 한 덩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감과 죽어감이 완전히 똑같은 것이 아닐까, 깨닫고 있죠. 저의 문학은 더럽고 억압적이고 가엾은 중생들의 세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자로서 그는 언론에 대한 검열과 통제 때문에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없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기자로서 자신의 직업적 정신이 썩어문드러진’ 어두운 시절을 보냈다. “저항도 분명 있었지만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기자로서 전 정당한 기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의 문제를 우리가 정리하지 못하고 좌절한 채로 다음 세대-공지영 작가의 세대-로 넘겨 버렸죠.”
데뷔할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공지영 작가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1980년대에 제 문학관이 성립되었습니다.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작가가 되자, 그렇게 결심했지요. 그리고 요즘에 와서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나의 문학관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는가를 고민해 봤어요.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의식 있는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사회운동 노동운동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은 항상 현시대에 맞추어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죠. 살아있는 모든 것은 환경에 맞춰 살아나가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노동운동이나 진보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일 안타까운 점은 새로운 시도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죠. 시위문화만 봐도, 정권은 진보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시위하시는 분들은 별로 변한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결국 소외되어 버리는 것이 안타까워요.”
한 독자는 김훈 작가에게 ‘나이가 들수록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지’를 물었다. 거기에 대해 그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년에 제가 60살입니다. 앞으로 서너 편만 쓰고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소설로 씌어질 이야기가 쌓여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너 편은 기어코 쓰고 가려고요.” 그러면서 후세가 자신을 작가로 기억할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김훈, 공지영이 생각하는 좋은 문장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언어로 할 수 없는 것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다. 체험 중에 인간이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언어의 한계가 눈에 보이니까, 소설을 쓰는 것도 그렇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한국어가 불편해요. 조사 때문에요. 한국어는 조사가 없으면 문장의 의미를 알 수가 없죠. 그런데 이 조사가 몇 개 안되잖아요. 한 움큼도 안 되는 조사를 가지고 살림을 살아야 하니 옹색해요. 조사가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그가 생각할 때 좋은 문장은 조사가 돌출하지 않는 문장이다. “그런 문장을 쓰는 건 아주 힘든 일이죠.”
그에 비해, 공지영 작가는 괴테의 ‘모든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같은 문장을 좋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여성작가가 대거 등장하고, 여성적인 글쓰기가 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문장에 대해 공을 들이는데, 문장에 대해 이런저런 시비가 있었어요. 그런데 언제쯤부터는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문장과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문장 사이에 간격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녀가 좋다고 생각하는 문장은 인생 전체가 ‘찰칵’하고 잡히는 문장이며, 순간적이고 섬광적인 생각을 잡아내는 문장이다. 그녀가 쓰고 싶은 문장은 그렇게 인생 자체를 순간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문장이다.
질문은 독서는 왜 해야 하는지, 문학의 매력이 무엇인지로 이어졌다. 공지영 작가는 ‘오픈북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하면서, 책을 읽는 것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에게 나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김훈 작가는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저는 책만 본 세대입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나의 낙후성을 나타내는 이야깁니다. 흔히들, 책 속에 길이 있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책 속에 길이 있나요? 책 속엔 글자가 있죠.(웃음) 사실 전 책 속에 길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사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해도 그 길이 세상의 길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책 속의 길은 있어도 없는 것과 다름없다고,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이 세상을 바꾸기가 쉬울까요, 폭탄이 세상을 바꾸기가 쉬울까요? 폭탄이 바꾸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폭탄이 바꾼 세상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책이 세상을 바꾸는 길은 멀고도 아득한 길이지만, 이 길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일은 눈물겹게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소한 일에 감동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두 작가는 독자들에게 덕담을 하면서 시종일관 웃음으로 가득했던 독자와의 만남을 끝맺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스님에게 했답니다. 그러자 스님이 ‘앉아 있을 때 앉아 있고, 걸어갈 때 걸어가는 것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저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라고 반문했죠.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는 일어서면서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요. 사실 저도 지금 이 시간 끝나고 술 마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웃음) 순간순간을 명징하고 열렬하게 살아가세요.(공지영)”
“사소한 일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 말할 줄 아는 사람보단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인류는 잘 모른다. 나는 다만 쓰레기통에 버려진 갓난아이를 사랑한 것이다’ 그 말처럼 개별적인 인간을 사랑하고 보듬어 안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김훈)”
담양 대나무숲과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걷다
마지막 날 아침, 버스는 담양을 향했다. 목적지는 죽록원과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죽록원에 들러 대숲을 산책하고, 담양의 명물이라는 죽통밥을 먹고,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을 걸었다. 도로가 확장되면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담양읍에서 순천으로 가는 24번 국도의 약 9킬로미터는 보존되어 있다. 지역 주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가로수 길을 남겨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2박 3일 내내 약이라도 올리듯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쌍계사를 둘러볼 때도, 노고단에서 내려올 때도, 피아골에서 퀴즈 이벤트를 할 때도 비가 쏟아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비였다. 그 비구름이 지리산에서 쫓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 서울로 들어왔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비는 해산장소인 광화문에 도착했을 때 말끔히 그쳐있었다. 지리산 문학캠프의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지는, 상쾌하게 갠 파란 여름 하늘이었다.
문학캠프 기간 동안 많은 분들이 애를 써주셨다. 허순용 팀장님을 비롯한 YES24 직원 분들과 웹투어의 가이드 분들. 비가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끝까지 즐거웠던 것은 이분들 덕택이다. 또,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독자들에게 나누어준 신경숙, 공지영, 김훈 작가님, 쌍계사의 문화재해설사 분, 담양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담양군청의 직원 분, 일정 동안 안전하게 차를 운전해주신 기사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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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초롱
2011.07.04
갔다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그러나 군더더기 없이 잘
쓰셨습니다. 또 이글을 보니 2011년 행사에 꼭 참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평소에 소설을 잘 안읽는 편이지만 만약 당첨이 되면 2011년
행사에 참가하는 공지영 작가의 작품들을 모두 읽어 보고 참가하고 싶습니다.
hyunju1005
2006.09.06
국내작가의 이런모임이 자주 있길바라는 마음입니다.^^
oasis
200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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