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단상
2005.08.10

그런데 <멜린다와 멜린다>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디 앨런이 죽으면 이 너무나도 우디 앨런적인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앨런이 죽은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앨런이 만든 세계에서 지나치게 섬세하고 적당한 교양과 스노비즘이 넘친 삶을 살아갈까?
이런 걱정이 드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보살펴줄 수 있는 예술가가 우디 앨런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스콜세지가 자주 다루는 터프한 노동자 계급 남자들은 스콜세지가 없어도 실제 세계와 다른 사람들의 영화 속에서 잘 살아남을 거예요. 하지만 <멜린다와 멜린다>의 캐릭터들은 사정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디 앨런이 만든 세계 속에서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앨런의 초기 영화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앨런 자신을 반영하는 앨런 캐릭터들은 물론 앨런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어요. 그건 당연한 거죠. 하지만 그 앨런과 교류를 나누는 사람들은 실제 7,80년대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실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앨런처럼 지적이었고 말빨이 셌으며 닳디닳은 스노브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사실적인 미국 지식인의 캐리커처이기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린다와 멜린다>의 우주는 여전히 우디 앨런의 머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이나 그들은 ‘순수해’ 보여요. 그만큼 결백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이나 모두 우디 앨런적인 캐릭터들이라는 거죠. 심지어 치웨텔 에지오포나 클로에 세비니처럼 우디 앨런과 전혀 무관한 세계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배우들도 이 영화에 들어서면 갑자기 우디 앨런적인 순수성을 풍기게 됩니다.
이건 아마 노화의 증거일 겁니다. 전성기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대화하거나 투쟁합니다. 앨런처럼 개인적이고 내성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에요. 앨런의 70년대 걸작들인 <바나나>, <애니 홀>, <맨하탄>과 같은 작품들엔 분명 그런 투쟁의 흔적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을 통해 명성과 부와 안락과 자유를 얻은 예술가들은 굳이 바깥 세상과 싸워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되죠. 물론 계속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투쟁 자체가 고정된 습관인 경우도 많아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에도 젊은 시절의 생기와 투지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적습니다. 겉보기엔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요. 우디 앨런 역시 언젠가부터 그런 단계에 접어든 겁니다. 아마 90년대 중엽 이후였을 거예요.

예술가들은 다섯 가지 방식으로 늙습니다. 젊음을 지키거나, 젊음을 위장하거나,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을 고수하거나, 늙으면서 무언가를 더 얻거나. 노망으로 밑천까지 다 날려버리거나. 물론 첫 번째를 고수할 수 있다면 좋을 겁니다. 세 번째나 네 번째라도 괜찮고요. 하지만 쉰 살 먹은 여자들이 모두 이자벨 아자니의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정신적 노화의 과정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렵죠. 배우들에게는 성형외과의사들과 보톡스가 있으니까. 그러니 몇 십 년 뒤 젊은이들이 여러분을 발전을 가로막는 고리타분한 구닥다리 영감탱이/할망구라고 욕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길. 조금 더 지력이 남아 있다면 어리석게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조용히 길을 내어주는 현명함을 보이려 노력하시거나요. 물론 어려울 겁니다. 그 역시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다시 <멜린다와 멜린다>로 돌아가면... 전 앨런이 무척 부럽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날카로움과 무게는 사라졌습니다. 성공작을 내는 비율도 떨어졌고요. 그러나 그가 안주하기 시작한 작은 세계는 이전의 명료함을 갖추고 있고 ‘도전정신!’을 외쳐대는 젊은이들의 반항과는 무관한 노인네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앨런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순수한 앨런이 되어갑니다. 이 늙은 코미디언이 노화라는 또 다른 자연현상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와 그가 만든 세계와 사람들이 무척이나 그리울 겁니다.
6개의 댓글
필자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나야나
2019.07.03
하늘빛
2019.07.02
제천대성
2019.06.30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