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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칼럼] 재능의 집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5화
어디에 도착하든 자기만의 집을 지어야 한다. 변화에 따라 새로운 공간을 증축하고 때때로 비바람에 무너진 곳을 수리해 가며 보기 드문 집을 지어낸 이들을 떠올리며, 이내 시선이 닿는 방향으로 걸었다.
예술과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구불구불 이어지는 나무의 결을 따라 걸었다. 외딴 산속에 있는 작은 미술관이었다. 하얀 벽과 직사각형 공간을 가진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는 기다란 나무 조각을 연결해 만든 구조물로 꽉 차 있었다. 공간을 휘어잡는 작품 속을 걷자 마치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작품은 공간을 재편하며 시간도 함께 뒤틀었다.
돌이켜보면 공부는 기예를 연마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어린 나는 곡예사가 더 난도 높은 동작을 시도하듯, 점점 더 어려운 것들을 읽고 풀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동그란 눈과 기쁨에 차서 올라간 두 볼을 보면 기립박수를 받는 공중곡예사라도 된 듯한 쾌감을 느꼈다. 게임을 클리어하듯 하나씩 성취하는 기분, 그때마다 주어지는 상찬은 중독적이었다. 하지만 마약을 시작할 때 그것을 권한 사람들이 끊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듯이,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거나 상찬의 쾌감이 끝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의 공부는 재능만으로 해낼 수 없었고, 줄에서 떨어진 나는 일어서는 방법을 몰라 오랫동안 바닥을 굴러다녔다.
예술가는 재능이 전부인 직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예술가의 삶 중 상당한 부분은 작업이 아닌 일들로 채워진다. 창작 지원금이나 레지던시 등 각종 공모지원서를 쓰고 예산을 짜고 정산하는 일, 작품 설치와 철수, 홍보와 행사 참여, 생계유지를 위한 다른 직업 활동까지. 작가들은 재능이 모자라 고통받기보다는, 재능과 상관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해서 더 고통받는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일은 재능만으로 해낼 수 없다. 어떤 날은 둘러앉아 찰스 부코스키의 책 제목을 빌어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여기서 뭐 하는 건지 한탄한다.
천재라면 조금 나을까.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댄서>에서, 그는 타고난 재능을 딛고 수없는 연습을 거듭해 빠르게 정상을 향했다. 무려 19살에 영국 로열 발레단 수석 무용수가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리허설에 불참하거나 마약을 복용한 채 무대에 오르는 등 스캔들의 중심에 선다.
커다란 재능은 저 혼자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아서 처음엔 노력 없이도 쉽게 멋진 것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을 통제할 힘을 기르지 못하면 쉽게 위기에 처한다. 날 것의 재능은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완성품이 아니라 연마하지 않은 광물 파편에 가깝다. 잠깐 반짝하는 혜성이 아니라 일생을 거쳐 빛을 내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재능을 길들이고, 다른 조각들을 이리저리 이어 붙여야 한다. 접착제로는 노력과 좋아하는 마음도, 순간의 판단과 선택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지속하는 끈기도 있다. 재능과 세상을 이어 붙여 직업으로 안착시키는 과정도 포함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합쳐 재능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업이 잘되는 이른 아침을 사수하기 위해서 무조건 밤 10시 전에 잠들고 5시 전에 일어나 작업한 뒤, 남는 시간에 달리기를 하거나 재즈를 듣는다고 했다. 하루키쯤이나 되는 대문호나 가능한 루틴이라고 농담했지만, 제아무리 대문호라도 지속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노정태의 책 『프리랜서』에서는 프리랜서의 3대 덕목인 실력, 사교성, 마감 중 ‘으뜸은 마감’이라고 한다. 경쟁자가 수두룩한 업계에서 초보자의 실력은 눈에 띄지 않으며, 검증되지 않은 자에게 사교성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일의 사이즈를 가늠하고 제때 해내며, 업계의 표준을 익히고 타인과 협업하는 태도를 갖추기까지는 거듭된 마감의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것을 갖춰낸 사람에게 진짜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주어진다.
얼마 전 만난 작가는 전시가 한 달 이상 남았는데도 작품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전시 서문 미팅을 위해 종종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지만 매우 드문 광경이었다. 놀라는 내게 그는 이렇게 여유를 두어야 만약의 경우가 생겨도 수습할 시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 있게 이른 날짜의 미팅을 잡고, 내게 글 작업할 시간을 넉넉하게 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작품의 보관과 배송까지 고려하며 직접 나무 박스까지 짜는 그를 보며, 나는 폭풍이 몰아쳐도 거뜬하도록 튼튼하게 지은 집의 안정감을 떠올렸다.
재능도 머물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 커다란 재능이 멋대로 삶을 휘두르게 두면 재능도 삶도 금세 망가지고 만다. 날 것의 광물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 도구와 기술이 필요하다. 재능을 방해하는 불순물이 나오거나 연마에 실패하면 가진 빛을 다 내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다. 신은 있는 그대로 살아지는 완벽한 삶을 손에 쥐여주지 않는다. 가장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과 루틴을 만들고 원활하게 소통하며, 지자체의 지원금과 컬렉터의 후원, 또는 다른 직업 활동을 통해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하는 것은 모두 재능의 집을 짓는 일이다.
자신만의 이유와 방법을 찾아 스스로에게 가장 잘 맞는 집을 튼튼하게 지어낸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시선을 두며 그 집을 계속해서 정돈하고 가꾸는 작가들의 삶에는 단정한 빛이 있다. 재능만으로 삶에 화려한 불을 댕길 수는 있지만, 그 빛은 너무 짧아 허무하다. 오히려 재능을 삶 속으로, 작업을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담담한 태도로 오래 지속한 빛이 더 깊고 여운이 진하다. 삶의 끝에 큰 족적을 남기는 작가들이 지어낸 집은 그런 모양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영화 <댄서>로 돌아와 본다. 더는 위로 올라갈 곳이 없어진 폴루닌은 춤추는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결국 은퇴 무대를 기획한다. 발레가 아닌 창작 안무로 마음을 다해 춘 마지막 무대에서 그는 다시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이유는 타고난 재능이나 드높은 명예가 아니라, 춤을 춰야만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는 다시 무대로 돌아왔고, 백조가 되어 날아오른다. (물론 그는 여전히 문제아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예술을 업으로 삼기에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게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을 새워서라도 마감을 지키고 몸을 일으켜 전시를 보는 일상, 내 원고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손을 거치는 수많은 이들에게 감사하며 발맞추어 일하는 책임감, 원고 너머의 독자를 상상하는 마음, 도무지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도 다시 쓰는 용기 같은 것들이 나의 재능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글을 쓰던 늦은 새벽, 살아있다고 느낀 감각은 그렇게 지은 집으로부터 비롯되었을 테다.
그날 틀에 박힌 화이트 큐브를 뒤틀어 공간을 재편해 낸 누군가의 작품 속을 걷다가 두 갈래 길을 발견했다. 각자 가진 재능의 모양과 환경은 서로 달라서 누군가 지어 놓은 곳에서 살 수는 없다. 어디에 도착하든 자기만의 집을 지어야 한다. 변화에 따라 새로운 공간을 증축하고 때때로 비바람에 무너진 곳을 수리해 가며 보기 드문 집을 지어낸 이들을 떠올리며, 이내 시선이 닿는 방향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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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노정태> 저8,100원(10% + 5%)
프리랜서의 일과 삶을 압축적으로 적요한 『프리랜서』가 [워크룸 실용 총서]로 출간되었다. 프리랜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저자가 지난 10여 년간 불안정하면서도 매력적인 프리랜서의 삶을 통과하며 겪은 시간을 반추하며 적어 내려간 에세이이자, 실용적 조언서다. 이 책은 한 술자리에서 시작되었다. 혼자 일하며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