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 “작품에 초과당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 이경 저자 인터뷰
작품 자체에 힘이 있는 소설이 작가의 한계를 돌파하여 자기 생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쓰는 소설도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에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로 가작을 수상하며 “제목을 접한 순간부터 느낀 즐거운 당황함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다”(민규동 영화감독)는 평을 받았던 이경의 첫 소설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래빗홀, 2023)가 출간되었다. 본인의 논문에서부터 주목해온 비트겐슈타인의 ‘가족 유사성’ 개념에 착안하여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상상의 산물”이라는 전제 아래서 인간과 다르지만 닮은 존재인 ‘인공지능’을 거울 삼아 ‘인간성은 무엇인가’에 관해 질문을 이어간다. 진지한 주제를 다루지만 특유의 코믹한 상황과 친근한 인물들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여섯 편의 소설이 묶였다.
‘이경’은 본명 같기도 필명 같기도 한 이름이에요. 필명을 쓰시게 된 이유와 작명의 사연을 말해주시겠어요?
‘이경’은 ‘이경×’인 제 본명에서 마지막 한 자를 잘라낸 이름입니다. 딱히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지은 것은 아니고, 연구자 ‘이경×’가 써온 글들과 구분되는 필명을 가지고 싶었어요.
아예 다른 이름을 고민하지 않고 단순하게 원래 이름에서 한 자를 덜어내기로 한 건 제가 게을러서입니다. 하하. 그래서 ‘이경’과 ‘이×’ 중 어감이 더 마음에 드는 쪽을 골랐습니다. ‘이경’ 쪽이 뭔가 경, 하고 탁 뛰어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소설은 언제부터 쓰셨나요? 특별히 SF를 쓰시게 된 계기는요?
솔직히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약간 움츠러들게 됩니다. 처음부터 어떤 오랜 꿈과 원대한 이상을 품고 시작한 건 아니라서요. 있는 그대로 멋없는 답을 드릴 수밖에 없네요……. 간단히 말하면, 번아웃 와중에 출산과 육아로 공백이 생긴 틈을 타 ‘그래, 내가 소설을 쓴다면 지금이다!’라고 결심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이걸 자세히 풀어 쓰면 더욱 멋이 없어지는데요……. 아기 외에 주의를 쏟을 대상이 절실히 필요해서 소설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마 흩어지는 나 자신을 어딘가에 잘 매어놓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때까진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만(그러나 실제로 쓸 것 같진 않은) 있었어요. 그런데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던 그 ‘언젠가’가 느닷없이 닥쳐온 거죠. 운명처럼 바로 그때 문윤성SF문학상 공고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마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쓴 소설이 가작을 받으며 데뷔하게 되었고요. 운이 좋았어요.
'소설을 쓰고 싶다.’, ‘소설을 쓸 수 있다.’, ‘소설을 쓰고 말겠다.’가 합치하는 길이 비로소 제게 열린 게 바로 그때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 제 인생에 일어났던 모든 중요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SF소설을 쓰게 된 건 운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네, 운명론자 맞습니다.
이번 소설집은 인공지능(AI)이 테마인 소설 여섯 편이 묶였는데요, 특별히 인공지능에 주목하게 되신 이유가 있을까요?
외계인, 로봇, 인공지능처럼 SF의 전통이 공들여 구축해 온 대표적인 비인간 형상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중에서도 로봇, 인공지능을 정말 좋아합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제가 가장 사랑한 건 블랙홀에 홀로 남게 된 로봇 TARS이고, 화성 탐사로봇 스피릿과 오퍼튜니티도 언제나 마음이 가는 존재죠. 인간이 만든 이야기 안에 존재하는 인공물이기에, 우린 그들에게 계속 인간성을 의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반대로 지금 아직은 없는 인간성을 찾거나 발명하려 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 점에 계속해서 매혹됩니다. 인간성의 구조와 그 이상의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보게 해주어서요.
표제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도 육아에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가까운 가족이 없는 직장맘이 아이를 먼 지역에 사는 친정에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 AI 보육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는 여정을 담고 있어요. 특히 팬데믹 시기에 아이를 키워야 했던 분들을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는데요,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가격을 계산하고 기계에 아이를 맡기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엄마의 마음이 잔잔히 전해집니다. 작중 ‘혜인’이 황새 영아 송영 서비스를 고르기 망설여졌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소설에서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지만, 여전히 ‘어머니’ 아닌 ‘남’의 손에서 이뤄지는 육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거대한 압력이 있죠. 심리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구석구석 실질적인 동시에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압력이요. ‘어머니’에게 닿은 그 압력은 대부분 ‘나는 좋은 엄마에 언제나 미달’이라는 막연한 죄책감으로 전환되기 쉬운 것 같아요. 그러니 ‘어머니’가 제공해야 마땅할 법한 ‘서비스’를 구매하는 행위 자체에 죄책감이 느껴지는 게 아닐까요? 혜인의 경우 그 죄책감의 표면이 ‘꺼림칙한 기분’인 것 같아요.
게다가 황새의 직원은 그냥 ‘남’도 아닌 안드로이드고요. ‘인간’과 ‘사물’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여겨지는 낯선 존재잖아요. 그래서 혜인은 꺼림칙한 마음을 그리 쉽게 떨치지 못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하다는 걸 알면서도요. 마음이란 게 그렇잖아요.
이 서비스의 AI 로봇 직원은 인간 할머니와 무척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주름은 있지만 피부는 매끈하고 눈은 오렌지색으로 빛납니다. 이런 외양을 설정하실 때 고려하신 부분이 있나요?
탄력 없는 피부, 자글자글한 주름, 흐린 눈의 조합이었다면 끝까지 인간 할머니로 착각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인간과 분간할 수 없도록 의도된 ‘직원’이라면 노화가 동반하게 마련인 다른 증상들, 예컨대 느릿느릿한 걸음, 빠릿빠릿하지 못한 몸짓, 어두운 귀, 고집 같은 것도 충실히 모방했을 테지요. 하지만 우리가 과연 그런 ‘직원’이 있는 황새에 타고 싶어 할까요? 우리가 로봇을 위시한 ‘미래의 노동’에 투사하는 상상은 ‘영원히 젊은 외모와 신체 기능을 가졌으나 그 일만 100년 넘게 해온 노인처럼 숙련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나서서 지시하거나 배려할 필요 없이 힘들고 귀찮고 버거운 일을 척척 해주고, 육아처럼 까다롭고 복잡한 노동에 처해서도 모르는 게 없는 데다 나를 친절히 지도해 줄 능력도 있고, 그러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는 그런 ‘완벽한 노동자’요.
당연히 현실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풍기는 위화감을 위해 직원의 외모에 일부러 서로 맞지 않는 연령대의 특징들을 조합해 보았어요.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에서 편집된 ‘완벽한 직원’에 어울리는 외모인 셈이죠. 푸근한 할머니를 연상시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실제로 거슬릴 법한 요소는 배제한, 호감 가는 외모요. 오렌지색 눈은 그렇게 직업 적합성에 맞춰 설계된 외모를 뚫고 ‘직원 자신’이 드러나는 표지로 설정했습니다. 신호등을 보면 빨강과 초록, 위험과 안전 사이에 주황색이 있잖아요. 어느 쪽으로도 바뀔 수 있는 색깔이 지닌 긴장감과 힘을 빌리고 싶었어요.
“나는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라고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작품에 초과당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그런 소설을 좋아하거든요. 작품 자체에 힘이 있는 소설이요. 그런 소설들이 작가의 한계를 돌파하여 자기 생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쓰는 소설도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채널예스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한마디를 적어주시겠어요? 특별히 어떤 독자를 상상하고 소설을 쓰셨는지, 어떤 분이 꼭 읽어주시면 좋겠는지 말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제 책은 제 손을 떠났고, 여섯 편의 이야기 각각이 자신의 독자를 찾아가겠지요. 자기만의 소설을 모아가는 즐거운 독자의 여정에 이 이야기들이 한 자리 슬쩍 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표제작 『오늘 밤 황새가 당신을 찾아갑니다』와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는 특별히 육아로 고생 중인 독자들께 찾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기분 전환이 가장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네, 경험담입니다!
*이경 1984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신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2년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 부문에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로 가작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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