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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의 한 발 느린 집사람] 이토록 많은 인사

<월간 채널예스> 2023년 9월호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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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과 예의를 갖추되 최선을 다해 침범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므로.” 계속 있어줘요 거기. 그리고 여기.


1

정동초등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비누방울 수십 개가 머리와 얼굴 위로 포자처럼 날아온다. 여기부터 환희입니다, 하고 기분을 알려주는 표지판 같다. 축제의 기분이 항상 그런 데서 시작되는 건 아니지만 애매하게 들떠 있던 우리는 그제야 본격적으로 축제에 입장한다. 

춤추는 사람, 챙이 긴 모자를 쓴 사람, 바다에서 놀다가 튜브를 들고 온 사람들 모여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축하하고 있다. 줄을 서고 스티커를 붙이고 포토 존 앞에 선다. 한여름 우리가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준비를 한다. 미래의 우리가 여기로 돌아올 수 있는 인덱스를 만들며. 실제로 가는 것만큼 갔었다는 감각은 중요하니까.

멀리 사람들이 보인다. 드넓은 운동장에 띄엄띄엄 흩어져 앉아 있다. 쏟아진 주사위처럼. 돗자리 위에. 나무색 캠핑 의자 위에. 희고 투명한 모기장 안에.  

임의의 질서. 오늘만 이렇게 만나는 어느 영화제의 관람객들.

2

흰 부스들이 나열돼 있다. 사람으로 가득하다. 양손에 맥주를 쥔 연인과 손바닥 선풍기 하나로 번갈아가며 열을 식히는 가족, 영화제 티셔츠를 사서 바로 갈아입는 소년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그 모든 광경 뒤로 키가 작은 산이 보인다. 작고 채도가 낮다. 운동장을 껴안듯 둘러싸고 있다.

이렇게 더운데 한 공간에 모이다니. 전국에서 모인 불특정 다수가 영화를 보겠다고 이 무더위 속에 함께 앉는 게 이상하다. 영화를 아끼는 사람이 아직 많구나. 




기차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보인다. 오늘 이전에 만난 적 없는데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게 이상하다. 그들도 나를 본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하나의 인파 같은데 무리의 표정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니 그렇게나 개인일 수 없다.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운동장에 모인 이야기의 주인들. 문장이 되길 기다리는 낱말처럼 조용해지는 두 눈들. 

밤을 통과하던 새가 이 모든 광경을 봤다면 그저 수박씨라고 생각했을지도.

시커먼 능선. 너무 밝은 인공 조명, 흙 냄새, 모기를 쫓기 위해 타고 있는 나뭇가지 향, 인기척. 냄새 아닌 것들이 뒤섞여 비로소 지금 이 여름의 냄새가 된다. 거의 맡아진다. 맡아진다는 건 내가 맡기로 했다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나 또렷한 걸. 

3

향 없는 것들이 모여 어떻게 냄새가 되는지 생각한다. 은박 돗자리에 반사된 빛이 수신호처럼 반짝인다. 이것은 내가 곧 보고 크게 감동하게 될 영화 <너와 나>의 등장에 대한 전조 같다.




4

밤에는 친구들과 마피아를 했다. 대학교 이후로 십 년만이었다. 


"님은 뭐세요?"

"저는 경찰이요."

"왜 본인을 경찰이라고 하세요?"

"경찰이니까요."


"저는 시민입니다."

"저도 시민입니다."

"저는 진짜 시민입니다."


"저는 마피아예요."

"왜 본인을 마피아라고 하세요?"

"마피아였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 할 테니까요."


보는 데 보는 게 아닌 거. 묻는 데 묻는 게 아닌 거. 듣는데 듣는 게 아닌 거. 같은 장면을 통과하면서 다 다른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 당신을 속이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도 하면서. 

아, 이것은 사진에 대한 완벽한 은유.



5

첫 영화 상영이 시작되자 운동장은 고요해졌다. 

거대한 스피커에서 꽤 두꺼운 폭으로 흘러나오는 대사. 음악. 그리고 그것이 산에 부딪혀 돌아오는 소리. 

영화가 반쯤 지나서야,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이동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묘하게 돌아오는 소리가 메아리인 줄 모르다가, 운동장의 관객들 전부 박장대소하는 순간에야 알게 되었다. 두 겹의 소리를 듣고 있었구나. 대사 소리와 대사가 되돌아오는 메아리 소리 사이에는 시차가 있구나. 

또 다른 소리가 균열을 내자 그제야 듣게 된 거다. 

야외에서 영화를 보면 나란히 앉은 이들의 기척이 다 들린다. 웃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 잠든 소리는 꽤 크지만 이상하게 영화를 침범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옆을 쳐다보며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영화관이라면 서로를 훨씬 거슬려했을 텐데. 왜 달랐지. 바깥에서 시청하기로 미리 합의해서일까. 어쨌거나 공동의 경험이 점점 드물어져서일까. 여럿이 함께한다 해서 늘 더 좋은 건 아닌데 이날은 그랬다. 야외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거실이면서 좌석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상영관이구나.

6

'많은 것이 변했구나. 그리고 그중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

친구가 생일 카드에 썼다. 그 세월의 일부는 공동으로 지나왔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린 당신과 함께 몇 여름을 지났다. 서로에게 틈입하고 침투하며. 또 다른 친구의 말을 떠올린다. “정성과 예의를 갖추되 최선을 다해 침범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랑이란 본래 그런 것이므로.”

계속 있어줘요 거기. 그리고 여기.   



7

쓰고 찍다 보면 누가 이걸 읽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갸우뚱해지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그 질문이 너무 시끄럽다. 그런 날은 또 돌아올 텐데 그때마다 기억하고 싶다. 정동초등학교를 둘러싼 산에 부딪힌 음성과 음악이 돌아오는 데 걸린 시차를. 어떤 소리는 땅에 떨어져 돌아오지 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렇다 해도 계속 하고 싶은 말하기였다. 어딜 가든 한 발 이상 느리고, 말도 느리며, 긴 호흡의 쓰기를 덜 선호했던 나에게 이 연재는 산문으로 발화하는 연습이었다. 집을 사랑하고 잘 벗어나지 않는 내가 멀리 가는 운동장이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 이 우정에서는 그렇다. 이 연재에서는 그렇다. 포자처럼 크고 작은 고마움을 당신의 운동장으로 날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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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훤(시인, 사진가)

시인, 사진가. 시집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양눈잡이』를 썼다.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를 쓰고 찍었으며, 산문집 『사람의 질감』을 집필 중(2023년 출간 예정)이다. 미국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사진학 석사를 마쳤고 2019년 큐레이터 메리 스탠리가 선정한 '주목해야 할 젊은 사진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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