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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훤의 한 발 느린 집사람] 이 동네에만 있는 능선

<월간 채널예스> 202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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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처럼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늘 있었는데, 공유하는 거리를 여름, 겨울에도 치우는 그를 보며 다른 종류의 경외심이 든다. 주인처럼 사는 사람. 원하는 사람이구나. 원하면 행하는 사람이구나. (2023.08.04)


바로 우회전하셔야 해요, 기사님. 네, 여기요. 여기, 여기, 아니 여기! 여깁니다.

...아... 네, 저기서 바로 돌았어야 해요.

세 갈래로 갈라지는 도로를 연이어 지나 뜬금없는 데서 우회전해야만,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설 수 있다. 나의 집은 서울 정릉에 있다. 고요하다면 고요하고 낙후되었다면 낙후된 곳이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면 북악중학교 정문이 보인다.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는 키치한 행사톤의 목소리가 꽤나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러취-!"

마이크를 차고 수업하시는 체육 선생님이다. 소리만 들으면 거의 레크리에이션 MC 같으시다. 아침에는 K-팝 음악이, 체육 시간에는 축구와 농구를 지도하는 선생님의 목청이 북악중 스피커를 뚫고 흘러나온다.

"고오올! 찬우 참 잘하네. 자, 다시 자리로."

북악중학교 앞에는 북악슈퍼가 있다. 웬만한 침실보다 작은, 아담한 슈퍼다. 안에는 머스터드색 강아지가 있다. 혀를 길게 빼고 사람 구경하며 앉아 있거나 곧 잠들듯 귀를 접고 있다. 난로 앞에 누워 그 옆에서 TV를 보는 할머니도 있다.

서른 살을 거뜬히 넘긴 이 슈퍼는 모던과 거리가 멀다. 슈퍼마켓을 열었을 당시 외관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옆에 성인 남성만 한 작은 담장이 생겼다. 슈퍼를 개조해 일부 집으로 만드셨다 해도 믿을 만큼 집과 슈퍼 사이 공간이 협소하다. 팔을 안으로 웅크린 포즈처럼 어색하게 생겼달까. 두 공간을 꿰맸을지도 모른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천천히 집을 마련하고 확장하고 온갖 생의 사건을 여기서 맞으셨을 할머니의 삶을 상상해 본다.

북악슈퍼 앞에는 열 개 가까이 되는 밥그릇과 물단지가 있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씨에도. 한여름에도. 슈퍼 할머니가 챙기는 길고양이 식구 수는 늘어간다. 사료 포대를 들고 작은 생명을 보살피는 그를 본다. 고양이들에게 영역은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밟는 곳마다 자신의 영역이라 생각해 매일 순찰하듯 돌아본다고. 북악중의 고양이들에겐 여기 모든 언덕이 지켜야 할 땅일 텐데, 한편 얼마큼 피로할까 싶다. 그런 그들에게 할머니가 자기 동네를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영역보다 더 안쪽의 땅. 동네. 돌아오고 편히 잠드는 곳.

고양이들을 보살핌으로써 할머니는 자신 또한 살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돌볼 힘은 모자라지만 타인에겐 넉넉해지는 우리도 있다. 이러한 돌봄에 관해 안담 작가는 "가장 최종적인 형태의 돌봄은 '돌봄 받기'다. 누군가 돌봐주지 않아서 망가지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를 돌볼 수 없어서 망가지는 사람도 있다."고 쓴다. 남을 돌보다 구비되는 이상한 순리. 그들도 그걸 느꼈을까? 자주 할머니네 근처에 있다.



북악슈퍼를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집 위에 집을 쌓아 만든 것 같은, 복층 빌라가 있다. 경사 높은 데 지어진 이 작은 빌라는 조금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돌과 타일로 만든 데코가 1층과 2층 사이에 있고, 횟집이 있었는지 거대한 어항처럼 생긴 공간도 있다. 여러 도시에 살다 온 사람을 모아 지은 마을 같다. 한 층을 먼저 만들고 즉흥적으로 더 쌓아 올리신 걸까.

그 빌라 앞에서 대부분 택시는 멈춘다. 내비게이션은 직진하라고 안내하지만 앞에 길이 없는데 어떻게 가나. 길이 있지만 처음 와본 이들에게는 영락없는 낭떠러지처럼 보인다. 기사님을 재촉하지 않는다. 벼랑 밑으로 천천히 내려간다. 조금만 이동하면 사람들이 판자촌이라 부르는 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양철 판자가 지붕처럼 덮여 있다. 지붕이 날아가지 않게 돌을 얹어둔 가정도 많다.

어느 집 앞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잠자는 학생 구함."

언제나 수면하는 학생을 구하시는 건지 잠깐 생각해 보았다. 곧이어 나는 잠만 자고 나갈 하숙생을 구하는 광고였음을 알게 된다.

그 근처에서 깔끔하게 단장하고 메이크업까지 마친 채로 언덕을 구석구석 청소하시는 여성이 오늘도 보인다. 중년으로 추측되지만 '언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머리를 멋지게 올리고 옷도 힙하게 입은 채로 비질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저기 빌라에서부터 쭉 내려오며 매일 자기 집 앞 500m 반경을 청소한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청소다.

집 앞의 길가를 매일 쓸고 닦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나의 집뿐 아니라 옆집과 윗집, 앞집과 아랫집을 살피는 마음은.

구도자처럼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늘 있었는데, 공유하는 거리를 여름, 겨울에도 치우는 그를 보며 다른 종류의 경외심이 든다. 주인처럼 사는 사람. 원하는 사람이구나. 원하면 행하는 사람이구나. 자신이 호스팅하는 자리에서도 손님처럼 멀뚱히 있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나.

멋진 언니는 재작년부터 청소의 반경을 계속 늘려왔다. 빌라 앞만 쓸던 그는 이제 거뜬히 빌라 양옆으로 반 킬로미터씩은 청소한다. 매일 운동하며 중량을 늘리는 사람처럼. 팔 굽혀 펴기처럼 늘어나는 가꿈의 세계.

언니를 지나, 판자촌을 지나 올라서면 정릉요양병원이 나타난다. 모부를 방문하는 젊은이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를 주로 본다. 가족이 재회하는 장면은 의외로 드물다. 노인이 된다는 건 뭘까. 몸이 늙고 내가 나를 가누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할머니 할아버지, 거긴 계단이 많이 없어서 잘 지내죠? 요새도 적당히 새콤 매콤한 그 무조림 드시나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집에 들르지 않고 내리막길을 걷는다. 토마토와 참외를 사 오려 한다. 샛길을 따라 내려가면 편의점과 식당, 주점 등이 나온다. 국민대 학생들은 그곳을 '지하 세계'라 부른다. 지하에 있는 세계라니. 섬뜩하고 환상적이다. 지하 세계 근처에는 고시원들이 많다. 타국에서 온 학생들도 산다. 창밖에 같은 브랜드의 실외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고, 도서관처럼 그들의 방은 동일한 구조로 지어져 있다.

한국에 사는 타국인을 보면 괜히 마음이 쓰일 때가 있다. 중국, 인도, 필리핀 등에서 꽤 많은 타국인이 온갖 형태로 이주해 오고 있다. 미국에서 비슷한 입장이었던 나는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주 궁금하다. 한국어가 어려울 텐데,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핀잔 듣거나 눈치 받진 않을까. 택시 타거나 대중교통

탈 때 조마조마하진 않을까. 단어와 문장 순서를 바꾸어가며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은,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자주 전화 걸겠지. 울대 안쪽으로 소낙비처럼 몰려오는 쓸쓸함을 통째로 삼킨 밤도 있겠지.

고시원을 두 블록만 지나면 편의점들이 보인다. 웬만하면 동네 마트에 들른다. 자주 가는 곳은 우리홈마트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사장님 때문에 그리고 우리 동네에만 있는 슈퍼이기 때문에 여기로 오는 게 좋다. 사장님은 자신의 앉은키만 한 스탠드에 이북 리더기로 책을 읽고 계신다.

스스로를 '활자 중독자'라고 소개하는 사장님이다. 주로 판타지 소설을 읽으신다. 이유를 물었다. 생각하지 않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사에 끌려가며 읽고 싶기 때문이라고. 산문과 시를 쓰는 파트너와 나는 생각에 잠긴다. 우리도 책을 낼 때마다 독자를 끌고 가고 싶다.

작은 마트에서 백 명 넘는 손님을 상대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금세 답답할 거다. 책도 읽을 것이다. 펼친 책이 나를 끌어당기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사유로 들어설 즈음 누군가 들어온다면? 초콜릿을 계산대에 내려놓고 전자레인지 팝콘이 맛있냐고 묻고 새로 나온 위스키도 파냐고 묻는다면? 사유의 끈은 자꾸만 끊길 것이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다시 집중해 보지만 젊은 부부가 과일을 사러 입장할 거다. 맛있는 수박은 어떻게 고르냐고 물을 것이다.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이 납득이 되었다. 빠르게 내렸다가 빠르게 올라탈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했겠다. 어쨌거나 읽는 사람들이 동네에 남아 있다는 게 좋다. 언젠가 내가 쓴 책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상상을 해본다. 계산을 마친 사장님은 카드를 돌려준 뒤 다시 독서대로 시선을 움직인다. 익숙하게 회귀할 곳이 있다는 게 좋아 보였다. 일하는 동안 그의 집은 활자였구나.

비슷하고 또 다르게 생활하며 우리가 만드는 언덕을 본다. 고양이가 식구를 낳고, 노인이 노인을 만나고, 레크리에이션 강사 같은 목소리가 대낮을 관통하는. 그것들이 포개며 만드는 능선은 여기에만 있을 거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나무가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휘었다. 이번 여름을 무사히 버텨야 할 텐데. 줄로 옆에 있는 나무에 대나무의 몸을 팽팽히 묶어준다.

언니와 할머니들이 하나둘 여름으로 들어선다. 그것을 지켜보느라 조금 늦은 나는 비옷을 챙겨 부랴부랴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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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훤(시인, 사진가)

시인, 사진가. 시집 『너는 내가 버리지 못한 유일한 문장이다』, 『우리 너무 절박해지지 말아요』, 『양눈잡이』를 썼다. 사진 산문집 『당신의 정면과 나의 정면이 반대로 움직일 때』를 쓰고 찍었으며, 산문집 『사람의 질감』을 집필 중(2023년 출간 예정)이다. 미국 시카고예술대학에서 사진학 석사를 마쳤고 2019년 큐레이터 메리 스탠리가 선정한 '주목해야 할 젊은 사진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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