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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의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예술가의 길

<월간 채널예스> 202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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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지금은 난독증이니 다른 즐거운 일들을 찾아 보자고 결심했지만, 내가 책읽기 말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나는 놀랍도록 무지했다. 곰곰 생각해보아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러스트_김미화

난독증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오해의 여지를 품고 있다. 난독증의 의미를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읽기 어려운 증세라는 뜻이다. 나는 읽기가 무척 어려웠지만 아예 읽기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난독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내가 스마트폰으로 각종 커뮤니티나 생활 게시판의 글들을 읽으며 킬킬거리거나 씩씩거리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어떤 책들은, 어떤 경우에는, 어라 재미있네, 하면서 예전처럼 어렵지 않게 슬슬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읽을 수 없는 책과 읽을 수 있는 책이 20:1 정도로 섞여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며칠동안이나 푹 빠져서 흥미롭게 읽은 책들은 『배움의 발견』이나 『사피엔스』, 4부작인 『마지막 황태자』 시리즈처럼 매우 두껍고 진지한 책들일 경우가 많았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책을 읽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말을 이해해 줄 사람은 또 누구이겠는가? 나 자신조차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읽을 수 있는 책과 읽을 수 없는 책이 이런 식으로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었으므로 나는 내가 난독증이라고 차마 생각할 수 없었다.

스스로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내린 뒤에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보통 이런 낯선 일을 겪을 때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이 분야를 설명하는 개론서를 뒤지는 것으로 이해를 시작했는데, 이 문제는 그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난독증이란 보통 학령기 아이들이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증세를 일컬었고 전문가들은 대체로 그것을 뇌신경학적인 기전으로 해석했다. 내 경우엔 그것과는 문제가 달랐고 분명히 어떤 부담이나 상처와 관련되어 생긴 증세였다. 게다가 내 직업은 작가였다. 작가가 겪는 난독증에 대해 알아들을 만하게 설명해놓은 개론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자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내 마음의 상처를 잘 달래고 관리하며 일상을 무리없이 유지하는 것의 범주 안에서 다룰 수밖에 없었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이 PTSD나 우울증이 아닌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 나는 많은 것에서 해방되었다. 난독증은 재앙이었을지 모르나 난독증을 깨달은 것은 진정 축복이자 휴식이었다. 지난 시간들과 내 전 인생을 전혀 다른 눈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나 나 자신에게 관대하자, 나 자신의 상처를 이해하고 존중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노력했지만 난독증은 치유 프로세스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난독증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던 내 마음의 상처를 마치 부러진 다리나 화상을 입은 피부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가 되게 해주었다. 내가 생각했던 마음의 상처나 괴로움을 훨씬 뛰어넘는 더 크고 중한 사태였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도 넘쳐나는 연민으로 스스로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현 상황을 ‘부러진 다리’처럼 명확한 실체로 인식하자 나 자신을 대하는 방법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쉬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요새 골 기록이 엉망이라고 스스로 질책하며 날마다 훈련을 쉬지 않으려 한 멍청한 축구선수 같았던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훈련을 할 것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서 쉬어야 한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잘라졌는지 그것이 의문이었지만, 아예 다리를 잃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골절이든 절단이든 쉬어야 하는 것은 똑같았다.

나는 글쓰기와 책읽기에 무제한 휴식의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얼마든지 쉬어도 좋다. 반드시 쉬어야 한다. 글씨 따위는 한글자도 보지 않고 살아도 상관 없다. 이 세상에는 읽고 쓰는 것 말고도 재미있고 가치있는 다른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래도 어느새 중반에 접어든 원고를 중단할 수는 없어서, 또다시 하루 5줄의 너그러운 하한선을 정하고 조금씩 쓰기로 했다. 대신 조금이라도 화면이 떨리는 것 같으면 망설임없이 곧바로 노트북을 덮었다. 다섯 줄이 아니라 다섯 글자라도, 난독증 환자가 글씨를 쓰다니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닌가? 당연한 일이지만 초고를 쓰는 단계에서는 어떤 품질이란 것을 찾을 수 없이 유치하고 오류 투성이일 수밖에 없고 나는 내 손에서 방금 나온 문장들에 언제나 지독한 자괴감을 느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마음을 넓게 가질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확실히 난독증이 심해져서 내 머리가 타이어 같다고 생각할 때에는 문장의 품질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예를 들자면 『설이』를 쓸 때 위탁모인 이모가 설이를 꼭 껴안고 예뻐하는 장면을 그린 한 문단에 나는 ‘포옹했다’라는 단어를 네 번 사용했다. 내가 방금 써놓은 한 문단을 내 눈으로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응모작을 대하는 심사위원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라면 껴안았다, 끌어안았다, 품었다, 토닥이고 얼굴을 부빈다는 등 좀 더 정감있는 표현들을 다양하게 활용할 것이다. ‘포옹하다’는 그 모든 단어들 중에 가장 딱딱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였지만 그때는 그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른이 아이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동작과 그것을 나타내는 동사들을 그때의 나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난독증은 이런 내 모든 문제에 대한 사면의 키워드가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나 자신이 불쌍하고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괴로웠구나. 이렇게 애썼구나. 포옹하다 밖에 생각나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지, 나는 난독증이었으니까. 그런 상태로 장편소설을 쓰다니,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닌가? 베토벤이나 헬렌 켈러와 저녁식사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내가 겪은 고난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쓰기와 책읽기를 아예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식의 무제한 사면을 실행에 옮기려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버리는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사람이 한가한 시간에 책을 읽지 않는다면, 또는 읽으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말인가? 무려 십 년 가까이 난독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나는 책읽기 말고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지 못한 상태였고 그 공허한 공백을 우울로 채워가고 있었다. 책읽기 말고 다른 여가활용을 찾아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즐거운 다른 일들에 푹 빠져서 책읽기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면? 어쨌거나 지금은 난독증이니 다른 즐거운 일들을 찾아 보자고 결심했지만, 내가 책읽기 말고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나는 놀랍도록 무지했다. 곰곰 생각해보아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2016년경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웨이』를 처음 접했을 때 무작정 나는 그 책이 권하는 바대로 12주 코스를 완수했다. ‘창조성 워크숍’이라는 매력적인 부제를 단 그 책을 발견한 순간 읽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인생에서 어떤 충격적인 일격을 당하고 중독이나 자포자기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되었고, 일정한 기간동안 시키는 대로 하면 반드시 창조성이 회복될 것이라는 장담에 간절하게 희망을 걸었다. 12주 동안 열심히 줄리아의 제안을 따랐고 안한 것보다는 기분이 좀 나아졌지만 집 나간 창조성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그 후로도 긴긴 암흑기를 한참 더 견뎌야했다. 


일러스트_김미화


하지만 줄리아의 제안들 중에는 나에게 도움이 된 것들이 있었다. 갑자기 창조성의 샘이 꽉 막혀버린 예술가들을 위해 줄리아는 매주 한번씩 새로운 일들, 자신의 감각을 즐겁게 하는 활동들을 하라고 권했다. 나는 그녀의 조언을 고지식하게 따라서 자전거타기, 도예, 꽃꽂이, 짧은 여행, 동물원 가기, 요가와 명상 등 이전까지 해보지 않았거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일들을 시도해보았다. 마음의 컨디션이 바닥이었으므로 대부분은 즐겁지도 않은 데다 어색하기까지 한 하루를 보내고 난 뭐한거지 하면서 터덜터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곤했다. 하지만 딱 하나, 눈이 번쩍 뜨이도록 즐거운 경험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꽃꽂이였다. 

나는 한평생 확고하게 동물성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친구가 권해서 시작하게 되었을 뿐 나는 식물성의 어떤 것에 자발적 관심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꽃꽂이 체험 클래스에서 정말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식물이라는 존재가 아름다운 색감과 모양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싱그러운 향기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 전에는 그것도 모를만큼 꽃을 가까이 접해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꽃의 모양과 색깔, 꽃향기와 풀향기, 커팅하면서 느껴지는 사각사각한 질감, 한다발의 꽃이 균형과 조화를 가진 꽃꽂이 작품으로 형체를 갖추어가는 그 모든 과정을 나는 한없이 즐겼다. 그 중에서도 풀향기가 나를 가장 즐겁게 했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싱그러운 향기에 매혹되어 함박웃음을 웃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즐거움의 감각을 찾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곧 회복되어 창조성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도 가졌다. 그때는 즐거움을 한조각 찾으면 창조성도 한조각 돌아오는 식으로 말도 안되는 일대일 대응을 생각하던 시기였다. 물론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토록 무지했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 아마 그 꽃꽂이의 최대 성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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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윤경

소설가. 장편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영원한 유산』, 『설이』 등과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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