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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의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터닝 포인트

<월간 채널예스> 2023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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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단어의 힘이란 정말이지 놀라울 때가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나에게 여러 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이 닥쳤음을 알았고 온갖 심리 상담서와 강연들을 섭렵하며 이겨내려 애써왔다. 주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 쪽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고 나름 잘 대응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독증은 내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분야였다. (2023.06.12)

일러스트_이유진 

고통과 혼란의 크기와 강도를 따지자면 2018년 『설이』를 쓸 때가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는 내가 무언가를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아예 없었다. 2020년에는 모든 것이 많이 나아졌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악전고투를 겪었지만 어쨌든 책이 나왔고, 『설이』로 만난 독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나에게 굉장한 치유가 되었다. 이 세상에 M으로 고통받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었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근원적인 행복감과 자신감의 탱크가 빵빵하게 잘 채워졌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회복의 길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써보려고 했을 때 나는 여전히 날뛰는 글씨들을 마주하고 당혹감에 빠졌다. 잠시 잊고 지냈던 머리 속의 타이어가 노트북을 마주하자 또다시 시커먼 존재감을 드러내며 덜그럭거렸다. 내가 쓰려고 하는 소설은 무엇이고 그 장면들은 어떻게 시작되고 인물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는지, 어떤 길고 종합적인 생각을 지속할 수 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쓰겠다고 생각하며 노트북을 열었는데, 모니터 앞에 앉으면 생각들이 알알이 모래가 되어 새하얗게 부서졌다. 설이 때보다 고통의 강도는 덜해졌다고 할 수 있었지만 내 쪽에서 맷집이 바닥났다. 강펀치는커녕 꿀밤 한 대도 견뎌낼 수 없었다. 회복의 길이 이럴 리가 없는데, 역주행하는게 아닌가,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회복하기 위해서 안한게 뭐가 있다고! 노력할만큼 하지 않았는가! 그 꼴이 되어서도 끝내 신작도 냈다. 산책도 꼬박꼬박 했다. 힘이 되는 친구들을 만나 상처를 드러내고 공감을 나누었다. M과의 관계에도 결정적인 진전을 이루었다. 상처건 뭐건 이겨내기 위해 할 수 있는건 생각나는대로 다 했다. 아직도 뭘 더 해야한다는 말인가. 난 이제 지쳤다.

이때의 기분은 낙심이었다. 지난 5년여 시간동안 M을 미워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하늘에 주먹질까지, 분노의 힘으로 『설이』를 썼다면 이제는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에너지마저 다 쓰고 남은 것이 없었다. 이런 과정이 다 극복에 이르는 길이겠지, 이 고비만 넘기면 이제 회복이 찾아오겠지 하는 그 믿음 하나로 버텼는데 이제부터 2라운드 시작이라고 하니까 그냥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유산』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물로, 조선 왕조의 마지막을 증언하는 창덕궁이나 낙선재 답사 등의 자료 조사가 많이 필요했다. 오래된 자료들을 찾아 박물관과 도서관을 뒤지는 것도 필수적이었다. 검색해보니 내가 원하는 자료는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물관과 도서관, 고궁까지 모두 문을 닫았다. 그 때 우리는 코비드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대 재난 한가운데를 지나는 중이었고 다소 지나치도록 사회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답사나 취재 활동이 순조로웠다면, 나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감과 활기를 얻고 글쓰기에도 탄력이 붙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기초적인 활동조차 막혀버리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오로지 방구석에 갇혀 달을 쳐다보듯 손에 닿지 않는 자료들만 바라보는 상황은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된 나에게 치명적인 일격이 되었다. 세상이 나더러 더 이상 글을 쓰지 말라고 듣도보도 못한 역병까지 내렸다. 나는 다시 부들부들 떨리는 화면 앞에서 한줄도 더 쓰지 못하는 상태로 돌아갔다.



선생님, 저는 왜 소설을 쓰는 걸까요?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쓰는건 대체 뭘까요? 저는 대체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고, 도저히 이전에 행복하게 글쓰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더이상 M을 원망하고 싶지 않은데 M이라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다 보니 내가 달라져버렸어요. 그 과정에 그냥 내 안에 뭔가가 부서져 버렸나봐요, 뭔가가 아주 사라져버린 거 같아요.
달리기를 해야 하는데 발이 없어졌다거나, 노래를 해야 하는데 입이 없어진 거 같은 그런 거예요. 이젠 M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M을 원망하지는 않아요. 그냥 너무 낙심이 돼요.
발이 없는데 어떻게 달리지? 입이 없는데 어떻게 노래를 하지?
그냥 어쩔줄 모르겠고, 다음 줄을 어떻게 써야할지 하나도 모르겠고, 중요한 일인데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겠고,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지요 선생님?

2020년 3월 31일의 일기 중에서


나는 하루에 몇 분쯤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포기하고 침대에 누웠다. 슬프고 자포자기한 기분이었다. 일기를 보면 이때까지도 나는 내가 난독증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여전히 집중력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하고 있다. 집중력 없는 나. 나태하고 무기력한 나. 그런데도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만은 남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어떻게 해야 사라진 집중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무렵 정말로 간절하게 잃어버린 집중력을 되찾고 싶어서, '하버드대 학생의 집중력 비법' 또는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평소라면 한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을 자기 계발서들까지 뒤적이며 자괴감을 곱씹곤 했다.

산책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으므로 나는 이 무렵 산책을 열심히 다니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을 때 혼자 걷는 것이 과연 우울증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훗날 상태가 좋아진 뒤에는 남들이 말하는 산책의 기분전환 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바닥일 때에는 걷는 내내 나 자신에게 저주만 퍼붓고 더 쓰레기 같아진 기분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일기에 쓴 것 같은 처량한 넋두리를 곱씹으며 혼자 둘렛길을 걷고 있었는데, 일종의 신비 체험이라고 할만한 경험을 했다. 분명 나는 혼자였는데 누군가 내 곁에서 함께 걸으며 내 넋두리에 대답을 해주는 거였다. 그 목소리와 얼굴은 내가 한두 번쯤 만난 적이 있는 사람으로, 일기 속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사람이다. 나는 그를 잘 모르지만 아주 현명하고 강인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더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나의 처량한 산책길에 불현듯 나타나 내 넋두리에 대답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그렇군요. 집중력이 없어진 것 같다고 고민하시는데, 집중하는 일이 심작가님한테는 특히 어려울 수 있어요. 남들에겐 쉬운 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의지력이 없다고 자꾸 그러시는데, 보통은 다리가 없으면 달릴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요. 다리가 없는데도 달려야 하고 입이 없는데도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의지력이 무척 강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심작가님은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아닌가요?"

그는 더 많은 말들을 했는데 나는 난생 처음 겪는 신비 체험에 너무 놀란 나머지 다 잊어먹고 이 두 가지만 겨우 기억에 남겼다.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부랴부랴 일기에 적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까먹었을지 모른다. 그는 분명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지점을 짚어주었다. 나는 집중해서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을 몹시 한탄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당신에게는 원래 어려운 일일 수 있다"고 했다. 집중하기가 남보다도 특히 어려울 수 있다는 그 말은 뜻밖에 나에게 몹시 중요한 깨달음과 커다란 해방감을 함께 안겨주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지난 몇 년간 더 악화되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전부터도 나는 무엇엔가 집중하는 것이 늘 무척 어려웠다. 나의 내면에는 '집중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M의 재림으로 해석하고 기겁해서 비명을 지르는 꼬마가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언제나 찢어지게 비명을 질러대는 그 아이를 데리고 나는 시험도 보고 대학도 가고 등단도 하고 작품 활동과 사회생활을 해야 했다. 등단 후 10년은 새로 시작한 글쓰는 일의 신기함과 흥분으로 꼬마를 잠시 잠잠하게 했지만, 이제 글쓰는 일은 나의 삶이자 생활이 되었다. 지루함과 막힘을 이기고 그래도 써야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는 것에 꼬마는 반발했고, 둘 사이의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채 일이 꼬이고 꼬여서 여기까지 왔다. 어쨌거나 정도의 차이일 뿐 나는 원래 그랬을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일러스트_이유진 

그리고 이것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리가 없어졌는데도 휠체어 마라톤에 도전하는 어떤 사람을 본다면, 그가 이전처럼 빠르게 달리지 못한다고 나는 그를 비난할 것인가? 성대를 잃고서도 다시 노래를 부르는 사람에게, 예전처럼 컨트롤이 완전하지 않다고 비웃을 것인가? 아니,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을 존경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들은 게으르거나 나태하기는커녕 의지와 신념의 화신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다. 나는 내가 이전까지 나 자신에게 부당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을 깨달았다.

신비로웠던 숲길에 다녀온 얼마 후, 여전히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의지력으로' 극복해보려고 몸부림치던 어느 날, 격렬하게 흔들리던 나의 모니터에서 드디어 글씨들이 산산히 부서져 분수에서 뿜어진 물방울들처럼 이리저리 날아가버렸다. 나는 타이핑하던 두 손을 허공에 띄운 채 놀란 눈으로 날아가는 글씨들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의 타이어 같은 머리 속에서 '난독증'이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정확한 단어의 힘이란 정말이지 놀라울 때가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나에게 여러 가지 정신적인 문제들이 닥쳤음을 알았고 온갖 심리 상담서와 강연들을 섭렵하며 이겨내려 애써왔다. 주로 우울증이나 트라우마 쪽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고 나름 잘 대응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독증은 내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분야였다. 이건 난독증이잖아, 세상에, 내가 난독증이었다니, 하고 깨닫는 순간 그동안 겪어왔던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엉망으로 뒤섞여있던 직소 퍼즐 조각들이 촤르르르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난독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이미 타이어의 두께가 절반 정도로 얇아진 기분이었다.


2020년 4월이었다.



설이
설이
심윤경 저
한겨레출판
영원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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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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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윤경

소설가. 장편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영원한 유산』, 『설이』 등과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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