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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죽지 마) 부활할 거야 - <지옥만세>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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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다는 감각은 엉망진창의 경험 뒤에 삶이 장렬히 끝나기는커녕 어떻게든 진정되어 계속된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2023.09.01)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지옥만세> 포스터

송나미(오우리)와 황선우(방효린), 둘 다 죽고 싶어하는 여자애들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일 때의 얘기다. 함께 죽자며 모인 <지옥만세>의 소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금세 딴생각으로 향한다. 어차피 죽을 거, 우리를 괴롭혔던 그 애의 인생에 “기스”라도 좀 내보자고. 그런 마음이나마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말 죽고 싶은 건 아니구나, 나를 포함한 스크린 너머의 몇몇 관객들이 안도하며 좌석 안쪽으로 몸을 좀 더 깊숙히 파묻는다. 그 애가 누구냐 하면, 일진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면서 나미와 선우를 정말 죽도록 괴롭혔던 애. 박채린(정이주). 

언젠가 학교를 떠나 자취를 감춘 채린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낸 선우는 빼곡한 정방형의 이미지로 박제된 그 미친 X의 행복을 견딜 수가 없다. 알고 보니 종교가 생겨 회개를 하고 하와이에 있는 ‘낙원’에도 갈 모양이란다. 그래, 그럴 순 없지. 혼자서 그렇게 깨끗해질 순 없지. 채린의 행방을 좇기로 한 선우와 나미가 고속버스에 오를 때 내게도 묘한 동조심이 생겨났다. 다혈질의 나미가 주머니에 챙긴 커터칼을 호기로이 꺼내는 복수의 순간 같은 걸 지레 상상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소녀들, 열악한 합숙소나 다름없는 사이비 종교 건물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 잠도 자고 밥도 열심히 퍼먹는다. 어떤 땐 오히려 살만해 보일 지경이다. 잠깐만 얘들아. 그래서 기스는 언제 내려고?

학교폭력, 10대 시절의 파토스, 사이비 종교, 외로운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 별 볼일 없는 우정 같은 것들이 <지옥만세>에선 층층이 뒤엉켜 있다. 죽고 싶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순도, 평범한 어제를 지나 졸지에 사이비 종교에 합류하게 된 오늘도 이 영화에선 모두가 성장의 계시처럼 태연하다. 얼마든지 참담한 비극의 조도를 띨 수 있는 소재지만 발걸음이 묘하게 낭랑한 영화로 완성된 건 분신과도 같은 인물들을 너무 연민하지도,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는 연출자의 시선 덕택이다. 임오정 감독은 소녀들의 웬만한 엄살은 묵묵히 지켜보되, 행여 낭떠러지로 다가갈라치면 금세 옷깃을 붙잡아주는 묘령의 수호자처럼 자기 인물들을 대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는 작가들이야말로 과거를 말하는 임무에 적임자다.

요란한 자살 시도 끝에 번번이 실패만 거듭하는 나미는 누가 봐도 허세 가득한 관종. 그 옆에서 말간 얼굴로 아무 때나 “오키오키!” 외치는 선우는 섬약하지만 정작 뒤에서 가장 크게 사고 치고 말 캐릭터다. 선우같은 애들을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마음 한 켠이 저릿해진다. 힘들 때 위악이라도 부리면 나을 텐데… 성장담의 작가들은 그럴 기운조차 없는 조숙한 소녀를 위해 대신 비명 질러 줄 누군가를 짝지어 주곤 한다. 나미와 선우도 그런 의미에선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뒷날 밝혀지기를, 둘은 절친도 뭣도 아니다. 선우가 오랜 집단 괴롭힘의 피해자라면 나미는 채린의 무리에 반쯤 가담한 채 목숨 부지해 온 방관자여서, 선우에겐 사실 나미조차도 청산해야 할 증오의 대상이다. 한때 그들을 호령했던 채린은 <더 글로리>의 무리들하곤 달라서 빽도 가족도 없는 애잔한 여왕벌로 나온다. 덜 불행했다면 덜 나빠졌을 누군가, 우리 인생에 대부분 한 명쯤은 있는 허황된 내면의 소유자다.


영화 <지옥만세> 스틸컷

채린의 종교적 믿음을 확인한 나미와 선우는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누구보다 자신의 응징을 원하는 것이 채린이므로 선우와 나미는 채린을 진정 망가뜨릴 수가 없다. 복수하는 순간 마땅한 죗값을 치른 채린은 오히려 구원받을 것이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용서해 주자니, 쉽게 타협해버린 스스로를 언젠가 미워하게 되리라는 예감도 찾아온다. 이 무렵 <지옥만세>는 선우-나미-채린의 뒤틀린 삼각관계 바깥에 혜진(이은솔)이란 변수를 놓는다. 교주의 선택을 받아 낙원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자리를 놓고 채린과 혜진이 경쟁하는데, 교단의 인물들을 지켜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는 혜진의 처지가 과거의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괴롭힘 당해본 이는 괴롭힘 당하는 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듯이 혜진에게 자신을 대입한다. 염려와 연민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당할 테지만 혜진을 지켜보는 선우의 얼굴에서 내가 읽은 것은 모종의 위안이기도 했다. ‘우리는 같은 고통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약간은 더 버틸 만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예기치 못한 어느 죽음과 화재 사건까지 연달아 일어나며 소녀들의 모험은 활활 불타오른다. 파국적인 밤을 지나고 다시 날이 밝아온 아침에, 종교의 갑옷을 잃은 채린이 맨살로 나미와 선우 앞에 선다. 나미는 한 걸음 물러나고 선우가 채린에게 다가간다. 선우의 덤덤한 마지막 선고는 이렇다. “그냥 잘 살아.”

동네로 돌아온 나미와 선우는 갈래길에서 순순히 헤어진다. 이때 멀어지는 선우를 나미가 잠시 불러 세운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장면은 이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멀리 사라지던 선우가 나미의 부름에 아웃포커싱 된 화면을 뚫고 기세 좋게 초점 거리 안으로 되돌아온다. 슬며시 물기가 고인 눈에 비친 듯한 맑은 클로즈업이다. 나미가 외치고(“웰컴 투 헬이다!”) 선우가 응답한다(“오키오키!”). 둘은 다시 등을 돌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어느 때보다도 함께 있다.

희망적 엔딩이 반드시 현실을 간과한 영화적 소산일 리는 없다. 성장한다는 감각은 엉망진창의 경험 뒤에 삶이 장렬히 끝나기는커녕 어떻게든 진정되어 계속된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다시 찾아온 나미와 선우의 아침은 묘한 자조와 안도감으로 끈끈히 연결된다. 요컨대 인생은 우리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반복되는 패자부활전의 연속이라고 소녀들은 그제야 어렴풋이 직감한 것 같다. ‘지옥만세’라는 외침이 꼭 링 위로 다시 기어 올라오는 선수의 기합 같아서, 나는 송나미와 황선우가 다시 자기 앞의 생과 박 터지게 싸우는 날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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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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