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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X정희원 칼럼] 휴가철의 여행

전현우 정희원의 거대 도시에서 이동하기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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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열차에 각자의 이야기를 타고 오른다. 이 모두를 조용히 잠들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밤 기차는, 어둠을 가르고 고요하게 질주한다. (2023.08.11)


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언스플래쉬

서울을 벗어나며

오늘도 역은 붐빈다. 코로나19가 끝나자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다닌다. 억눌린 욕구보다 무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이 연재의 또 다른 주인공처럼, 기차를 타고 싶어도 타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이다. 이번 휴가철에는 다행히 예매를 해 둔 덕에 나는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많은 플랫폼만큼이나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시시때때로 달라진다. 늘상 열차를 이용하는 평일, 승강장에는 정장을 입은 출장객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무래도 더 많다. 이 사람들은 객실 내에서 노트북을 펼쳐 뭔가 작업을 할 확률도 높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휴가철, 휴일에는 캐리어를 끌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쌍쌍이 붙어 다니는 연인들의 비중도 높다. 노선별로도 풍경은 다르다. 아무래도 강릉으로 가는 KTX보다 젋은이들의 비율이 높은 열차도 없을 것이다. 전주로 가는 열차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근처에 멋쟁이가 탈 확률도 높다는 개인적인 느낌도 있다. 『오송역』에서 언급했듯, 각종 양복쟁이들은 오송에서 많이도 내린다.

건너편 플랫폼, 승강장에 막 도착한 열차에서는 잼버리에서 떠나온 듯 자기 몸통보다 큰 배낭을 맨 외국인 청년, 빵집이나 어묵집 쇼핑백을 든 아저씨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물론 이들과 속도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걸음이 불편한 노인들. 엘리베이터로 향하도록 안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느새 엘리베이터 앞에는 장사진이 펼쳐져 있다. 에스컬레이터로 가든, 엘리베이터로 가든 어차피 대기해야 하는 셈이다. 이 사람들을 여러 방향으로 편리하게 벗어날 수 있도록 보행 동선을 짜면 좋겠다는 것이 오래된 욕심이었다. 실제로 사람들이 높이 차이를 극복하지 않고도 역을 벗어날 수 있는 역 구조도 있다. 이런 두단식(terminal) 역은 19세기부터 있던 역들에서는 아주 흔한 구조다. 유럽 여행을 가면 볼 수 있는 그런 구조. 하지만 이만큼 많은 사람들을 이 정도로 높은 밀도의 도심에 데려다 놓으려면 이 구조는 사용할 수 없다. 그래도, 서울역처럼 늘 장사진을 사람들이 치고 있는 역쯤 되면, 출구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든다. 

조금 서두른 덕에 열차에서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도중역이 아니라 시발역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처음, 아니면 오래간만에 열차를 탄 듯 상기된 아이들의 목소리가 맑다. 이어폰을 꽂고 영상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지만... 잡념을 씻어낼 겸 사람들이 거대 도시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축인 고속 도로 상황을 살피기 위해 포털 지도를 켜 본다. 역시나 시뻘겋다. 고속 도로에서 30km/h가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아직도 상습 정체 구간에 오징어와 뻥튀기를 파는 행상인이 나타날까? 아무튼 무면허자라 운전을 하는 부담이 없긴 해도, 충청도 언저리까지 사람들을 괴롭힐 이 정체는 동승자라 해도 괴롭다. 승용차가 약속했던 자유의 발목을 잡는 이 정체는 아마도 도로를 배로 늘려도 여전히 계속될 것이다. 열차 차창으로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고속 도로에서 이 정체가 끝없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는 걸, 그리고 군데군데 산을 잘라 새 도로를 여전히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다.


길 위와 목적지에서

터널로 빨려 들어가는 열차 속에서, 끝나지 않는 논증의 사슬을 풀어내다 지치면 다시 창밖의 풍광을 살피며 쉰다. 지평선이 보일 듯한 평택 주변의 평야, 뱀처럼 휘어지며 문자 그대로 사행(蛇行)하는 미호강과 금강, 추풍령과 울산 주변의 1천m 넘는 아득한 산악, 유장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는 낙동강, 비탈에 덤벼들 듯 솟아 있는 수많은 아파트들, 그리고 불쑥 머리를 내미는 부산만... 카스피 해부터 테헤란을 지나 페르시아 만까지, 온갖 자연 환경을 극복하며 거대 도시와 고도를 잇는 토목 구조물의 보고라는 이유에서 최근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란 종관 철도(Trans Irainan Railway)'만큼은 아니겠지만, 한국 철도 각 노선의 차창 역시 하나의 서사를 갖춘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 글도, 집필했던 여러 책들도 이 이야기의 힘을 받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던 것 같다.

이런 서사의 끝에, 우리는 모두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 목적지를 결정하기 위한 고민이 실은 여행의 시작이다. 왜, 여행의 재미는 계획하는 재미가 절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집필과 개념화에 쓸 땔깜을 얻기 위해 혼자 다니는 답사라면, 이렇게 계획을 짤 때도 거의 군사 작전처럼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정찰 지역과 점령 지점만 정해진다면 나머지는 현장에서 느끼면 된다. 모바일과 온라인 플랫폼의 도움도 있어 필요한 걸 찾기도 편하다. 책임도 그냥 내 몸만 힘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족시켜야 한다면 머릿속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인원이 늘수록 프로그램 구성은 힘들어진다. 지금껏 도시 답사를 여러 차례 조직해 보았다. 기억에 제일 많이 끌고 다녀본 인원은 대략 15명이었다. 사전 조사가 빈약할수록 해 줄 말도 적어지고, 이례적 상황이 벌어졌을 때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판단도 둔해진다. 사람마다 다른 체력 안배도 해야 한다. 오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진다. 표정만 굳어지면 다행일 것이다. 사람마다 현장에서 반응도 다르다. 천진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면 가이드 역시 편하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뭔가 의식을 해야 할 필요도 적으니. 하지만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한 번 잘 해 봐라... 라는 표정으로 서 있다면 나 역시 당황하고 만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친한 여행 가이드와 상담을 해 본 적도 여러 차례. 그는 가이드를 할 때 가장 피해야 할 직종으로 교수를 꼽았었다. 도움을 요청했으나 교수 집단이라고 하자 거부했던 적도 있을 정도! 무슨 뜻인지 상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구력이 수십 년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다니,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몇 가지 트러블을 수습하고 나니, 그가 무슨 뜻에서 했던 말인지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상황도 있었다. 그렇게 많이, 많은 사람들과 돌아다녔는데,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고 놀았던 기억은 올해까지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로. 개인의 관심 문제도 있긴 했지만, 아마도 철도 노선 문제도 있을 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나라이지만 기차가 닿는 해변은 생각보다 드물다. 해수부 데이터1)에 잡히는 278개 해수욕장 가운데, 역에서 걸어 갈 수 있는 곳은 정말로 부산이나 강릉의 몇 군데로 손에 꼽는다. 서해와 남해의 많은 해수욕장은 버스로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거나(대천도 역과 약 8km 떨어져 있다) 기차로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고, 동해안의 대부분은 철길이 닿지 않는다. 동해선 덕에 포항과 영덕의 해안에 철길이 몇 군데 더해졌고, 영덕~삼척 사이 구간의 완공이 몇 년 남지 않았으니, 앞으로 조금 상황이 달라지는 걸 기대할 따름이다.


물과 더불어

이렇게 해변을 앞에 두고도 기찻길 생각을 하며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결국 일행 덕에 바닷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물과 함께할 때면 인간보다는 동물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나는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모래사장에 상륙할 때는 해운대에 수십년 전에 찾아왔다던 바다거북, 그리고 용궁과 토별가가 떠올랐다. 인천 앞바다 같은 곳에서 유람선을 타면 새우깡을 노리는 바닷새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미 동물에게 너무 위협적일 정도로 빠르게 된 육상의 차량보다는, 여전히 동물의 근육으로도 수월하게 따라잡을 수 있는 배가 가진 일종의 여유(?) 덕일까. 

이런 여유야말로 휴가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찰나를 깨고 소나기가 내린다. 동남아 경험이 늘어나서인지, 아니면 기후 위기에 대해 경각심이 늘어나서인지, SNS에서 이건 소나기가 아니라 '스콜'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확인할 수 있는 그 소나기.2) 말마따나, 쫄딱 젖은 생쥐 꼴이다. 비를 피해 들어간 건물 화장실에서 셔츠를 벗어 쥐어짜니 물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젖는다. 숙소는 이미 체크아웃을 한 상태이니 적당히 에어컨 바람에 말려야 한다. 아아, 조금만 잘못 말리면 옷에서 쉰내가 풍길텐데... 여름 옷이 잘 마르고, 설사 안 되더라도 쉽게 살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역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이렇게 젖고 나면, 결국 앉으면 졸음이 밀려오게 마련이다. 후텁지근한 열기를 뚫고, 돌아오는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번에도 다행히 예매에 성공한 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열차에 각자의 이야기를 타고 오른다. 이 모두를 조용히 잠들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밤 기차는, 어둠을 가르고 고요하게 질주한다.



2) 실제로 2020년대 들어 기상청에서 여름철의 기습적 강우를 분류하기 위해 계속해서 어휘 검토를 하고 있다. (
//v.daum.net/v/kiazbHRlVe)



오송역
오송역
전현우 저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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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현우(교통, 철학 연구자)

서강대학교에서 분석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연종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통, 철학 연구자. 과학 철학을 연구하던 중, 대규모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사람들을 매일같이 끌어들이는 교통 시스템의 마력 덕에 본격적으로 교통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에서 교통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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